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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만히 있어
출 14: 6-16
20세기 중엽, 특히 미국의 신학계를 중심으로 가장 중심을 이루었던 화두는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성장을 이룰 것인가가 지대한 관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침체되어 있던 교회로 일어설 수 있게 했습니다. 커다란 교회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외형이 커졌다는 것하고 바른 교회,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는 것하고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20세기말, 21세기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가장 중심적인 화두는 "건강한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매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신앙인이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신앙인,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을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한 자기 확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교회인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인가?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아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그들은 신약의 교회와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들이라는 의미로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면 구약 히브리어에서는 "카알"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그들을 향해 "광야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교회는 '건강한 교회'였는가? 우리가 정말 본받고 싶은 건강한 교회였는가에 대해서는 긍정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건강한 교회'였느냐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대답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행복한 교회"였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가까이에서, 그만큼 구체적으로, 그만큼 놀랍게, 그만큼 직접적으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신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고, 말씀하시고, 품에 품고 사랑하셨다는 점에서 그 교회는 참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어느 시대에서도 그러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그 교회는 참으로 행복한 교회였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만큼 선명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들만큼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한 교회가 없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누린 교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고 계시는 교회였습니다. 고개만 들면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친히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들려주시던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면 우리의 인생은 암흑 가운데 빠져 들게 됩니다. 중세 교회를 보십시오. 중세 교회의 장식은 아름다워지고, 외형은 화려했습니다. 예배 형식도 아주 정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열을 올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희미해집니다. 그들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침묵하십니다. 그때 중세 교회는 1000년이 넘게 깊은 암흑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생생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Move2: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전격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힘입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격적인 은혜로 인해 그들은 오랫동안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이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구원해 내시기 위해 애굽에 내리신 수많은 재앙들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모두가 넘어지던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더니 죽음의 통곡 대신에 생명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던 그 때를 기억했습니다. 장자가 죽은 것은 생명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온 이집트를 덮고 있을 때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았습니다. 흑암의 권세가 그들을 뒤덮고 있을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있었던 집은 살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죽은 어린양의 피는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첫째 주일을 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무엇하는 절기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찢기신 어린 양의 피를 우리의 심장에 바르는 절기입니다. 가정에 바르는 절기입니다. 삶에 바르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허락하시는 새생명에 감격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명이 구원받은 놀라운 감격을 맛보며 이제 애굽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종노릇하던 그곳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제국의 바로를 섬기던 그들이, 바로를 위해서 일하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400여년이 넘게 노예로 삼았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12:41절을 보면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부터 나왔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합지졸인 그들, 싸움에 나갈 무기라고는 농기구가 전부인 그들을 향해,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여기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구원해 주신 것도 은혜이고, 생명 주신 것도 은혜이고, 자유 주심도 은혜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군대로 불러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감격하며 나아갔을 것입니다. 춤추며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교회는 이렇게 행복한 교회였으나 "행복을 누리는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놀라운 축복은 받았으나 그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은 아니었습니다.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넘어지고, 작은 문제 앞에서도 방황하고, 작은 장애물 앞에서도 불평을 토해 놓았던 교회였고,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생생한 은혜를 입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심약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걱정하십니다. 13장 끝부분에서도 그렇고, 14장 첫 부분에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이 나옵니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인 블레셋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신 것도 그들은 연단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홍해 앞에 세우심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산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건을 통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한 사건 안으로 몰아넣고 계셨습니다.
Move3: 애굽의 기병대와 가로막고 있는 홍해
오늘의 본문 말씀은 애굽의 기병대가 총동원되어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집트의 특수 정예부대가 동원되고 가장 뛰어난 지휘관들로 편성되어 이스라엘 추격대로 편성됩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이 말씀을 읽지만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소식입니까?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이것은 얼마나 두렵고 답답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얼마나 불행한 처지인지 모릅니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남쪽과 서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앞에는 거대한 홍해 바다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내적으로는 싸움에 승리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파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총체적인 문제 상황 가운데 빠져 듭니다. 아무리 답답한 문제가 덮쳐 온다 할지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면 괜찮습니다. 아무리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어도 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괜찮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파도가 몰려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그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잠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도 해보지만 그들의 기도는 바로 원망으로 바뀝니다. 신세한탄으로 바뀝니다. 지도자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거부하면서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나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깊은 염려 가운데 떨어집니다. 불안해합니다. 방도를 강구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방도도, 대책도 없습니다. 그저 넋을 잃고 앉아서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우성을 칩니다.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좌절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나의 삶을 위협하고 몰려오는 환란을 어떻게 피할 방법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방으로 둘러싸여 어떻게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어느 침례교회 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거의 27년만에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청년 때에 만났는데 이제는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만났습니다. 젊은 청년의 때에 만났는데, 젊은 청년인 아들을 2년 전에 잃어버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2년전 대학생인 아들을 잃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들이 청년예배를 찬양을 인도하다가 쓰러졌는데 엠블란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생명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심장마비였습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이 아들의 장례를 치렀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진한 고통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아빠였다는 사실이 지금도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으로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눈앞에서 아들이 죽어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홍해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게 되었구나, 이제 우리는 망했구나, 이제 우리는 다시 끌려가서 노예로 살게 되었구나, 깊은 염려 가운데 사로잡힙니다. 불안해합니다. 답답해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는 염려할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이러한 염려와 불안은 앞날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인간 삶의 한 단면인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늘 염려합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때는 염려하고 걱정할 일들이 더욱 많아집니다. 이 시간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 앉아 있으나 사업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미래의 문제로 인해 염려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이러한 염려와 불안과 같은 삶의 압박은 벗어 버릴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걱정거리가 있어서만 입니까? 정말 죽은 문제여서 입니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이러한 일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늘 염려가 앞서 있던 염려에 충만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기도도 합니다. 예배도 참석합니다. 그러나 늘 염려하면서 사는 이 집사님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께서 범사에 평안을 허락하심으로 염려 거리가 없게 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하는 말, "요즘에는 염려거리가 없어 큰 걱정이다"고 또 염려하더랍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염려할 거리가 없어서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요즘 세상에서 너무 배부른 사람입니다. 우리 삶에는 염려하고 걱정할 일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Move4: 하나님의 처방-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그러나 이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너무 간단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너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 너는 홍해 앞에서 손을 들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광야 교회에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염려와 걱정에 대한 처방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라면서 동물과 관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가을 추수가 가까워 오면 메뚜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작은 막대기로 벼를 휘젓으면서 가면 메뚜기는 날 뜁니다. 그때 두 손을 모아 덥석 잡으면 다 잡힙니다. 신나게 메뚜기를 잡으면서 어린 마음에도 이 녀석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잡힐텐데 참 미련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꿩이란 놈은 얼마나 지혜가 있는지 바로 옆에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있습니다. 그 녀석을 맨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너희들 생각에 사로잡혀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좀 서 있어 보아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좀 조용히 있어봐라. 문제 앞에서 헤매지 말고,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좀 가만히 좀 서 있어 봐라." 이것이 하나님의 해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놀랍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통해 여기까지 나아왔으나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설칩니다. 그런 문제 상황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미련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설치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서있는 사람을 통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시 46편을 보면 시편기자도 극한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곤고함 가운데 서있었습니다. 탄식할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하나님의 또 다른 해법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손을 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최첨단의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부대가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만히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손을 듭니다.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거대한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마른 지팡이를 들고서 있다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답답하게 여겨졌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하는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홍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불신앙의 문제였습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왜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까? 홍해 때문이었습니다. 추격해 오는 바로의 정예부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환경에서도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염려'라는 영어 단어는 worry인데, 이 말은 본래 헬라어 '메림나오'에서 나온 말로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염려가 생깁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신뢰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큰 문제가 있으면 어른은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잠만 잘 잡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100 퍼센트 믿고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권고 합니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맡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큰 은혜 중에 은혜는 "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지만 염려가 안되는 것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걱정꺼리가 있어도 걱정이 안되는 은혜, 문제가 있어도 잠을 푹 잘 수 있는 은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체질 변화가 필요합니다. 염려하는 체질에서 잘 맡기는 체질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우나에 가면 늘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평안할 때도 필요하지만 어려운 때는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믿음의 힘을 활용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힘을 활용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걱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염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불신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원망도 터져 나옵니다. 나중에는 분노하게 됩니다. 그들의 심령은 강팍해 집니다. 송두리째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구원받은 감격도 사라집니다.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를 성경은 목이 곧아졌다고 표현합니다. 강팍의 반대말은 말랑말랑입니다. 부드러운 심령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강팍해지면 설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강팍해진 심령 상태를 향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기가 막히는 문제 앞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환난 가운데 서있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절)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동사는 세 가지인데, "두려워하지 말라," "가만히 서있으라!"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보라"입니다.
노자의 스승이 나이가 들어 이제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훈을 주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경청하던 젊은 노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곁에는 많은 제자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선생님 곁에 우리가 있기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아픔이 있었지만 선생님을 만나면 아픔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갈등이 있었지만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걸 느꼈습니다. 그 비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때 노자의 스승이 노자의 손을 끌어다가 입 속에 집어넣습니다. "얘야, 딱딱한 이빨이 있느냐?" "선생님 이빨이 하나도 없습니다." "말랑말랑한 잇몸은 있느냐?" "예 잇몸은 그대로 있습니다." "말랑말랑한 혓바닥은 그대로냐?" "예 그대로 있군요." "너도 그렇게 살아라! 남을 찌르지 말고 딱딱하게 살지 말고 부드럽게 살아라. 부드럽게 사는 길이 이기는 길이다."
그렇습니다. 부드러운 심령은 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딱딱해지면 우리도 넘어집니다. 말씀 앞에서 강팍해지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계획이 너무 뚜렷하고, 나의 호불호가 뚜렷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Move5: 너희는 내가 인도하고 있다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듬직하게 서있으면 좋으련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날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 편에서 아무런 노력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왜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홍해 앞에서 가장 원하셨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으며,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셨고,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들과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천국으로까지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8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담대히 나갔다"고 되어 있다. "담대히"라는 말의 히브리어 야드 라마의 본래의 의미는 "높은 손"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무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이 아니라 능력을 갖춘 여호와의 높은 손입니다. 하나님의 높으신 손에 이끌려, 그분의 보호하심 가운데 나갔다는 말씀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사 26:11에도 사용되는데,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실수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찌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흥분해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너무 들떠서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잘 나서 이러한 놀라운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의 손이 보호하심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마치 자신의 담대함인 것처럼,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나아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그러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을 사르니이다."
지금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보호하고 계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도하고 계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13:18절을 보십시오.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인도하고 계십니다. 13:21절은 얼마나 생생하게 그 인도하심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들 앞서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생생한 구원, 생생한 은혜, 생생한 인도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 교회는 구원받은 감격 속에서 영적 순례의 길을 떠나는데, 그 길을 하나님이 친히 인도해 가시는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앞서 행하고 계셨습니다.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낮에도 밤에도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고 계십니다. 고개만 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모습인가? 고개만 들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그런 삶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손을 들고 그분께만 순종하고 의지하면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문제가 어려워도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듭시다. 날마다 고개를 들어 그분이 인도하시는 방향을 봅시다. 기가 막히는 웅덩이에 빠졌다 할지라도 광야 길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주님이 인도하실 줄 믿고, 그분을 신뢰하면 사십시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에 이끌려 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알프래드 테니슨이 "나 모래톱을 지날 때"라는 시를 썼습니다. "해지고 저녁별/ 나를 부르는 소리!/ 나 바다로 떠나갈 때/ 모래톱에 슬픈 울음 없기를// 무한한 바다에서 온 것이/ 다시 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소리나 거품이 나기에는 너무나 충만한/ 잠든 듯 움직이는 조수만이 있기를// 황혼 그리고 저녁 종소리/ 그 후에는 어둠/ 내가 배에 오를 때/ 이별의 슬픔이 없기를//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부터/ 물결이 나를 싣고 멀리 가더라도/ 나를 인도해 줄 분을 만나게 되기를/ 나 모래톱을 건널 때."
어쩌면 테니슨은 가물가물 껴져가는 노년에 이 시를 쓴 것 같습니다. 점점 기운은 쇠하고 호홉이 끊어져 모래톱을 지날 때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곤고한 때에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의 마음이 서린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젊은 날이 다 지나가고 우리의 인생이 다 끝난다 할지라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나 모래톱을 지날 때에라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에 대해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기로, 주님만 바라보며 살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입니까?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약속입니다.
광야교회는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왜 그들은 건강한 교회가 되지 못합니까? 건강한 그리스도인들로 서지 못합니까? 그들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신뢰하지 못하니까 무엇이 나옵니까? 방황이 나옵니다.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함이 없으니까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현장에서 작은 문제 앞에서 그들은 흔들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하심을 입고 살아가는 이 영광스러운 교회가 진행해 가는 가운데, 그 방향을 잃거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튀빙겐 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은퇴한 후 현재는 명예 교수로 있는 한스 큉(Hans K ng)은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지를 결정짓는 기준(criterion)이 무엇이어야 함을 언급하면서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 교회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표준이 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 교회가 전했던 그 복음을 전할 때, 그 교회는 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 스스로 생겨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내셔서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인 에클레시아(Ecclesia)가 되게 하신다. 또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온 인류를 불러 세우는 이러한 사역을 계속해 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교회를 불러 세우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의 순례자 공동체이다. 그들은 미래의 것을 이미 보고(see), 모든 것을 아는(know)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시 광야를 헤맬 수도 있고, 깊은 흑암 가운데서 헤매 일 수도 있으며, 교회가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그 자체를 새롭게 하고, 갱신해 가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새로운 길을 언제나 찾아 나가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비록 그 길은 광야 길을 헤매고 어두움 속에서 헤매이면서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도 언제나 인도자를 가졌던 것처럼, 교회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인도하는 빛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를 인도해 나간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가져야 할 몇 가지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그 표준(criterion)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리고 초대 교회가 증거했던 "복음"이며, 교회는 그 복음의 증거자들로 위임받았습니다. 즉 사도들을 통해 전해 받은 복음이 교회로 하여금 그 영광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순례 공동체인 교회는 언제나 오류 가운데 떨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을 새롭게 갱신해 나갈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갱신을 위한 표준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해 나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붙들리지 않을 때,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표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중한 절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깊이 깨닫게 되는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교회,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온 가슴으로 경험하면서 생생한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가슴 떨리는 감격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비록 홍해 앞에 서 있고, 바로의 군대가 나를 추격해 와도, 오늘 비록 어려움이 있고 환난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세우셨으니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새롭게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감격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나아가면 살아계신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찬양을 통해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빛과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빛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로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빛과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빛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 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 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바라봄의 법칙
출 14: 10-14
행복 나눔 축제에 초대받아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행복을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갈망합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이제 나에게도 행복한 나날이 찾아오겠지!' 하는 기대를 안고 살아갑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더 행복한 일들로 가득할거야!' 하며 큰 행복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을 막연히 기대하고 살았지, 행복의 법칙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온 여러분들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불행의 사슬을 끊고 행복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길을...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더 큰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저는 행복의 법칙을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바라 보느냐?에 따라 불행과 행복으로 운명이 갈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은 아주 유명한 내용입니다. 아마 여러분중에는 '엑소더스'라는 영화를 통해서 이 장면을 보신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의 장면입니다. 히브리민족은 이집트라는 나라에서 400년동안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집트의 큰 왕궁과 피라밋등을 건설하는 일에 동원되어 채찍에 맞으며 일했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인권도 마구 짓밟혀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비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우시고 이집트의 파라오와 맞서게 하셔서 모두 이끌어내셨습니다. 히브리민족이 이집트의 국경을 넘어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파라오가 이집트의 병거와 마병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꼼짝없이 잡혀 죽을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아우성을 치며 진중에서는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로 감격해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곧 들어갈 것이라는 기대와 꿈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랑으로 보살피시고 있음을 발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행해졌습니다. 감격도 사라지고 꿈도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는 말이 폭포수처럼 입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차라리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며 지낼 것을 괜히 출애굽하였다고 후회와 탄식에 빠졌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갑자기 불행해 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파라오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왔기 때문입니까? 지도자를 잘못 만나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입니까?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모험을 하다가 위험해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시선이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은 늘 잘못된 길에 들어설 수 밖에 없습니다. 시선이 잘못된 방향을 향하는 사람은 다른 길로 가도, 어느 길로 가도 늘 후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선이 잘못된 사람은 불행의 원인을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려하고 원망을 일삼습니다.
시선이 잘못된 사람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삶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불행한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어 책임전가 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언제나 지나간 과거를 떠 올리며 후회와 탄식을 할 뿐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세를 버리지 않으고서는 백날 천날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반응에 주의를 기울여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모세는 다른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흐트러지지 않고 백성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모세가 하는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시선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시선을 바꾸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시선을 바꾸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시선을 바꾸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선을 어느쪽으로 바꾸어야 합니까? 우리가 시선을 어떻게 바꾸어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1.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0)
히브리 민족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당대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이집트의 군대가 추격을 해와 코앞에서 위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도 없도록 홍해바다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꼼짝없이 자신과 가족이 몰살당하고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같은 상황에서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집트의 군대를 바라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보내어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겠다.'(출 3:10)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우리 앞에 전개되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얼마든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어느날 배를 타고 가다가 스승이신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스승처럼 물위를 걷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도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는 말씀에 의지하여 물 위를 걸어보니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나게 걷다가 갑자기 옆을보니 검푸른 파도가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환경즉 덮쳐오는 파도를 바라보고는 물에 빠졌습니다.
인생을 살며 주위의 환경 즉 상황만을 바라보고 살면 위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언제나 입을 벌리고 우리를 삼킬 듯이 다가옵니다. 여러분 주위에도 언제나 위기가 여러분을 둘러싸고 위협하지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늘 우리 주변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재앙이라는 말이 들릴 때가 많습니다.
위기를 이기는 힘은 약속을 바라보는 데서 옵니다. 주위 환경만을 바라보는 것은 낙심만 가져다줍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절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환경만 보았다가 실족하였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인해 우리가 일시적으로 두려워 떨게 되지만 그럴지라도 성도는 그런 상황 속에서 분명히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펼쳐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위험한 순간에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여러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원수 마귀로부터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슴하십니다.
여러분 두려우십니까? 여러분을 위협하는 것들로 가득한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여러분에게 구원과 평안과 보호와 생명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시선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2.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12).
이스라엘백성은 위기에 처하자 과거로 시선을 고정하엿습니다. 과거에 이집트에서 이집트 사람의 노예로 있으면서 생활했던 그 시대가 더 낳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비록 자유는 없었지만 생명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민족은 이후에도 과거에 매여 이집트를 회상햇던 적이 많습니다. 여러분 자유와 인권을 잃어버리고 소처럼 일만하며 사는 삶을 동경하는 히브리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어리석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군대이야기를 자랑삼아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술자리에서도 주 안주가 군대생활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에게 군대생활은 억수로 고생한 시절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제대하면서 말하기를 앞으로 군부대를 향해서는 오줌도 눟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잊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아무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남녀 공통적으로 어릴 적 추억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답게 생각됩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 시절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가? 우리 모두 억수로 고생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어서 늘 배가 곯지 않았습니까? 일거리는 얼마나 많은지 허리가 휘도록 고생했습니다. 그래도 옛 친구를 만나면 어린 시절을 구수하게 이야기하며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것이 아름답다고 과거만을 회상하며 사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잠깐 돌아보는 것은 좋지만 늘 과거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전을 바라보아야 행복해집니다. 장래의 일어날 비젼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위기를 직면할 때는 비전에 시선을 고정해야지 과거를 생각하며 '그때가 좋았지'하면 원망과 후회와 자책의 눈물이 쏟아집니다. 미래의 비전을 향해 시선을 바꿀 때 우리앞에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동경하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지금 두렵게 느껴지는 강력한 군대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제 다 물리쳐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리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1년 후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 같습니가? 3년 후, 5년 후, 10년 후, 20년 후에는 어떨까요? 지금과 똑 같을까요? 크게 달라져 있을까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외모뿐 아니라 능력도, 지위도, 성품도, 믿음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비전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날 것입니다.
24년전에 저는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젊은 패기와 믿음으로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땅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교회당 건물도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주택2층을 세내어 시작했으나 교회처럼 꾸며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의자는 물론 강대상도 없었습니다. 교인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으나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꿈으로 부풀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교회, 건강한 교회를 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꿈으로 가득차서 마냥 행복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전도를 해도 사람들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꿈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꿈이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 꿈이 없이 어두운 현실만을 바라보며 절망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이자리에 우뚝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꿈을 파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부지런히 나오면 꿈이 점점 커질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한없이 작고 보잘 것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큰 꿈을 품게 되어 큰 영향력을 소유한 거인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꿈을 심어주는 교과서입니다. 성경을 펼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품고 살다가 잘 된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꿈을 품고 살면 우리 미래가 밝아지고 우리가 지금 처한 온갖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존귀한 삶을 살 수 있게 될지를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과거가 더 좋았다고 하며 옛날로 돌아가고자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밝은 미래를 꿈꾸는 비전의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3. 나의 방법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을 바라보아야 한다.(13)
울부짖는 백성들은 우리 즉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짖는 말을 들으면 '우리'라는 단어가 수없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6번)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기상황에서 일을 더 꼬이게 만드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는 시도에서 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문제에 부딪치며 열심히 해결하여야 할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은 풀어보겠다고 덤벼 들었다가 더 엃히고 설키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처럼 인간의 방법과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보면 사람의 노력과 수고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때를 많이 만납니다.
그래서 모세는 13절에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면 됩니다.
위기의 해결책은 나의 방법, 능력에서 찾을 수 없고 나의 할 일은 위기 앞에서 행하실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며 구원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문제만을 바라 보았지만은 모세는 문제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신앙의 힘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정말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만나면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는 자포자기합니다. 어떤 이는 자살합니다. 어떤 이는 사고를 크게 내고 도망칩니다. 신자들도 세상에서 역경을 만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가만히 서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강력한 무기와 막강한 전차군단을 이끌고 온 이집트의 군대는 홍해바다에 수장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안에도 많은 이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불치의 질병에서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기도하여 깨끗이 치유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기의 가정이 회복되어진 이들도 많습니다.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이들중에 삶의 이유와 의미를 발견한 이들도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을 접고 비전을 발견하고 기쁨으로 달려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시선을 바꾸는 것입니다. 행복을 위하여 시선을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행복의 법칙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대상을 바꾸고,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면 행복은 오늘 여러분을 찾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행복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