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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3月 ☞소통과 합력의 달☜
창1:26-31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교향곡을 들으면, 그 음악에 절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작곡가나 연주자는 그 절정에서 자신의 온 힘과 정열을 다 쏟아서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 온 천지를 창조하시는 데에도 절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지혜와 능력과 신성을 다 쏟아서 만들어 낸, 창조의 극치를 이루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창조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극치요. 절정입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가치(價値)를 이 정도로 소중하게 표현하고 있는 데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단순히 직장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공부나 열심히하면서 돈이나 쌓고 죽는 돈 벌레가 아닙니다.
어느 왕자가 있었다고 합시다. 이 왕자는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렸습니다. 너무 어려서 왕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열심히 동네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즉 딱지를 더 많이 딴 것으로 만족하며, 오늘 나무를 더 많이 해온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혼해서 가정을 잘 꾸려 나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것은 결코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는 그런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되찾아야 합니다.
지금 정당하지 못한 자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고,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자신은 노는 일이나. 나무하는 일에 만족하면서 지낸다면, 그것은 절대로 올바른 만족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 만난 어떤 분은 자신에게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즉 직장 생활도 성실하게 하고 있고, 가정에도 문제가 없으며, 자식도 공부를 잘 하기 때문에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운 종교(宗敎)를 가질 필요를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被造物) 중에서도 극치요.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혼신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쏟아서 만드신 작품이 곧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하루 밥이나 먹고, 돈이나 버는데, 만족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원래 이 존귀한 모습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는 데에서 특별한 점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것을 만드실 때와 달리 하나님 안에 의논(議論)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창조하는 문제를 두고 하나님 안에서 의논하시는 모습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26절)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시면서 의논(議論)하셨습니다. 다른 것들을 만드실 때에는 이런 말씀 없이 그냥 만드셨는데, 유독 사람을 만드실 때에만, *이들을 어떻게 만들며. 어떤 지위를 줄 것인지를 특별히 의논*하십니다.
둘째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창조의 절정이고, 인간의 가치(價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려줍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문화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고기나. 공중의 새나. 땅에 있는 모든 육축이나. 기는 것들을 사람이 다스리고,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의 지위(地位)입니다.
Ⅰ.하나님의 의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장 특이한 점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는 문제를 두고. 하나님 안에서 의논(議論)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26절)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식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이러저러한 일을 하게 하자*라고 하면서 의논(議論)을 하십니다. 도대체 누구와 의논(議論)하셨을까? 여기에 대하여 많은 주장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서 *천사와 의논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천사와 의논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우리의 형상은 천사의 형상이 아닙니다. 천사들은 사람을 창조하는 일에 끼어들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의논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창세기 처음에 하나님이 *우리*라고 표현된 것보다 더 곤욕스런 표현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놀라운 점은 설사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할지라도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거나. 수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처음에 나오는*우리*라는 복수 표현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나*단수로 바꾸지 않고 더 밝은 진리의 빛이 비출 때까지 그대로 두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삼위(三位)하나님의 의논(議論)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왜 창조하시며, 그들이 죄(罪)를 지었을 때,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성삼위 하나님 사이에 미리 의논(議論)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중에 우리를 초청하여 영원히 함께 그 중에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밥이나 먹고. 자식이나 키우고. 직장생활 잘 하라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우리를 초청하여 그 영광을 맛보고. 나누고. 그 안에 거하도록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三位)하나님으로 충분하십니다. 천사나 다른 피조물(被造物)이 하나도 없어도 하나님은 외롭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특히 그 중에서도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영광의 교제(交際)에, 그 기쁨의 만남에 우리 인간을 동참(同參)시키시고, 그 영광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기 전에 인간이 범죄(犯罪)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罪)에 대해서는 성자(聖子)께서 책임지기로 약속(約束)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결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거기까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 그들에게 특별한 지위(地位)를 주셨다는 것만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하늘의 모든 결정들을 우리 인간들에게 미주알고주알 밝히지 않습니다. 오직 필요한 부분만 말씀하십니다. 즉 창세기는 하나님 사이에서 의논(議論)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로 미루어 볼 때, 이 하나님의 의논(議論)이 단순히 우리를 어떻게 만들고, 우리에게 어떤 지위(地位)를 주느냐?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범죄(犯罪)에 대한 책임과 궁극적으로 어떤 영광 중에 우리를 초청해서 어떤 기쁨으로 교제(交際)할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計畫)과 의논(議論)이 있은 후에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연히 생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면 시험관 아기는요?*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험관(試驗管)으로 태어났더라도 사람인 이상 그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되찾아야 할 영광이 있고,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Ⅱ.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인간의 창조에서 가장 특별한 점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刑像)과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26절)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1:27절)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우리가 어렵게 느끼는 문제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도 우리처럼 얼굴이 있고. 몸이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우리 같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들었다고 하니, 어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靈)이신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는 말에는 영(靈)이신 하나님과 몸을 가진 우리 사이에 특별하고도 깊은 유사성(類似性)과 연관성(聯關性)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형상(形像)*이 무엇입니까? 형상은 원래 본체(本體)와 아주 비슷하게 만든 어떤 것입니다. 그러나 형상은 본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본체(本體)를 모방(模倣)해서 거의 똑같이 만든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형상(形像)은 초상화(肖像畵)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 때, 사용하던 동전을 보면, 왕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거기에 새겨진 것이 곧 황제의 형상입니다. 물론 그 동전의 그림 자체가 황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를 닮은 그림입니다.
공원에 가면 위인(偉人)의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동상 자체가 그 위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동상은 아무렇게나 만든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얼굴이나. 모습을 모델로 해서 아주 닮게 만든 것으로서, 모델이 된 사람을 생각나게 하고. 그 사람의 업적(業績)이나. 위대한 성품(性品)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유추(類推)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유추(類推)해 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하나님을 모델로 해서, 즉 하나님을 원판(原板)으로 삼아서 우리를 찍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왕의 흉상(胸像)을 만들려면, 왕이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 그리는 그림이나. 흉상은 곧 왕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원판(原板) 원형(原形)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특별한 점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도덕적인 성품들이 있습니다. 즉 정의감(正義感)이나. 사랑의 원판은 곧 하나님입니다. 또한 인간은 언어(言語)를 사용합니다. 이 언어(言語)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곧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곧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또 인간은 특별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인간관계를 통하여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혼자서 노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장난감만 잔뜩 사 주어서 혼자서 조립하고. 부수고. 울고. 악(惡)을 쓰게 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이 안 됩니다.
옛날에는 한번 애를 낳았다 하면, 6명, 7명, 넘치면, 12명까지 낳으니까 그 사이에서 저절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장난감 하나 없이 흙 주워 먹고, 풀잎 따먹고, 놀아도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들 사이에 군기가 있고. 질서가 있거든요. 넷째나 다섯째가 성질을 부렸다 하면, 그날 밤은 완전히 비상이 걸립니다. 형이 *엄마한테 맞아죽더라도 이 놈 버릇은 고쳐 놓는다*하면서 엄마가 시장 갔을 때, 완전히 손을 봅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만듭니다.
요즘 코로나시대 집 콕, 컴퓨터는 사람을 버려 놓습니다. 사람은 어울려야 만들어집니다. 혼자 벽을 보면서 피아노만 치면, 인간이 안 됩니다. 컴퓨터나 피아노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혼자 벽을 보고 침묵하는 것이 안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사회를 이루고 계십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사회성을 띠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진 지식(智識)은 사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절대로 도서관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전도하면서,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깨닫고, 배우는 것이 성경적인 지식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진리(眞理)는 교회에 선포된 것이며, 거룩은 혼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원에 혼자 가 있는 것이 거룩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도와주면서 거룩해집니다. 남의 필요를 채워 주면, 죄가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고립시킵니다. 모든 거룩함과 모든 지식은 사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을 모아놓습니다. 사람의 외모(外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外貌)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사람들은 몸에도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만 보아도 하나님이 생각날 정도로 아주 아름답고 빛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을 입었기 때문에 벌거벗었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덧입혀졌던 것이 아닙니다. 원래는 다르게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영광을 색칠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만들 때부터 하나님을 원형으로 삼아서 찍어 냈고, 하나님의 설계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이후에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난 후에도 우리의 원형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형을 알지 못하면, 그 정체를 알 수 없고, 고장난 부분을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우리 자신을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델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설계 도면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장이 나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고장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 데리고 가서 고치기만 하면, 천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존재가 됩니다.
즉 그렇게 술 마시고. 토하고. 마누라 두들겨 패고. 아기를 발로 차던 사람이 천사보다 더 뛰어나게 변해 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장에 데려가서 수리만 하면, 천사가 못 따라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개나 돼지나 원숭이에 비교하겠습니까? 사람이 고장이 나니까 *원숭이랑 맞먹게 해서 진화가 되었다느니* 하는 헛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원숭이가 병 들면, 수의사한테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수의사한테 데려가도 못 고칩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한테 데리고 가야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생명의 말씀이 있는 셀(cell)예배 공동체입니다.
마18:20절)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고장난 텔레비전은 보기 힘들지만, 고장난 사람은 찾기 쉽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고장 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돈도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번 수리하기만 하면, 아주 달라집니다.
천사가 흠모할 정도로 뛰어난 존재가 되어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볼 때,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선 인간은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살려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살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그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저 사람은 안 돼* 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에 빠져 있고, 짐승 같은 짓을 하면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 죽지 않았으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치면 됩니다.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장난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아무리 비싼 옷을 입었고, 좋은 학위를 가졌어도, 아무리 전 현직 대통령이라도 안 됩니다. 고치지 않으면, 고철(古哲)도 못되고, 쓰레기 같은 존재에 불과하고, 죽은 후엔 지옥 땔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 해 줍니다. 왕의 초상화가 있다는 것은 어디엔가 왕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면, 실제로 그 집에 왕이 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나라에 이런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계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진이고, 초상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주인 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에 있는 물고기나. 공중의 새나. 땅의 짐승, 사람, 이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셔서 하나님의 사진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초상화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나 하는 말을 보면, 하나님이 어디엔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실제적인 인물 없이 초상화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본인 없이 그 사람의 동상이 만들어질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대로 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뒤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기 기질이나. 정욕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온유한 성품대로 사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뒤에 진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그렇게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존재할 순 없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진이고. 초상화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제멋대로 살면, 반드시 찾아오셔서 책망하십니다.
*너는 왜 네 멋대로 사느냐! 너, 내 사진한테 어떻게 했어?*
*그 사람 보니까 우습 던 데요. 뭘*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더냐!.*
제일 미련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 앞에서 거만 떠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 주는 사진입니다. 그 앞에서 교만을 떠는 것은 자기 스스로 멸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몇 명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이라도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으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입니다. 사진이 한 장이 있든지. 백 장이 있든지, 사진의 주인공은 존재합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단 한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統治)를 보여줍니다. 왕의 사진이 걸려 있는 집은 자기 집이 곧 그 왕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아무도 없던 곳에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한 명 입사하거나 이사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쳐들어온 것입니다.
여리고 성(城)에 하나님을 섬기는 두 정탐꾼이 나타나자, 여리고 성(城)은 발칸 뒤집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쳐들어왔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깃발입니다.
그가 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쳐들어갑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하여 그곳을 점령(占領)해 나가실 것입니다. 즉 어둠의 세계를 몰아내며, 불필요한 두려움을 쫓아내고, 정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한 사람만 있어도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 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 어둠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거기에는 갈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엉터리 거짓말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빛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확신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Ⅲ.모든 것을 다스리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특권(特權)을 주셨습니다.
1:26절)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오늘날 우리는 *다스린다*는 말에 아주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치(統治)*라는 말 속에는 억압과 강제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연(自然)이 이토록 황폐하게 된 것이 곧 창세기의 이 명령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즉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를 다스리라고 했기 때문에 *물고기라는 물고기는 다 잡아 먹었고, 하늘의 새라는 새는 다 잡아서 멸종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의미의 다스림입니다.
*다스린다.*고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의미의 다스림입니다. 이것은 역(易)으로 생각하면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환경이나. 다른 어떤 영향에도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그 어느 것에도 정복(征服)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즉 성난 물결과 바람도 예수님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가난도 예수님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났지만, 예수님은 무릎 꿇지 않으셨습니다.
귀신들도 예수님께 굴복했고, 질병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가난도, 외로움도, 궁핍도, 굶주림도. 예수님을 굴복시킬 순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의 공포마저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곧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스린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굴복당하지 않는 당당한 자존감(慈尊感)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나쁜 의미의 자존심(自尊心)이 아닙니다.
나쁜 의미의 자존심(自尊心)은 어떤 것입니까?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하는 것, 가난한 사람이 부자(富者)처럼 행세하며, 돈을 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나쁜 자존심(自尊心)은 경비가 많이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고 죽자고 비싼 것을 먹습니다.
또 카드로 긁더라도 일단은 비싼 옷을 사고 봐야 합니다. 꿀리면 안 되니까요. 가난한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뭐가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자존심(自尊心)때문에 부자(富者)처럼 행세하려니까 결국 무리가 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존감(慈尊感)은 그런 자존심(自尊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가치(價値)를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숙이지 않는 당당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즉 가난도, 질병도, 외로움도, 사람들의 비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라*는 것은 이렇게 *그 어떤 것에도 지배당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옳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때문에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것에도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여러분, 외로움 때문에 양심을 팔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40일을 굶주리면서도 마귀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외로웠지만. 이겨 내셨습니다. 이것이 곧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적극적인 의미의 다스림입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장악해서 바른 위치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자연계(自然界)를 보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최초에는 짐승들끼리도 서로 해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 중에 교만한 것이 있어서 약(弱)한 동물을 해치고 물어 죽일 때, 아이구! 사자는 너무 무섭고. 곰은 내 힘으로 처리가 안 되니까 *곰, 너 이리 나와 봐. 임마! 이빨은 풀 뜯어 먹으라고 준 거지. 다른 동물 해치라고 준 줄 알아?* 하면서 곰을 잡아다가 구속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특공대라도 조직해서 그 사나운 동물을 체포하여 다시는 다른 동물들을 해치지 못하게 가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돼지는 새끼를 낳을 때, 누군가가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련해서 새끼를 깔아 죽이거나. 잡아먹어 버립니다. 토끼는 더 그렇습니다. 분명히 많이 낳았는데, 몇 마리가 없어요. 그럴 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잘 지켜 주는 것입니다. 즉 돼지는 돼지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토끼는 토끼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감히 뱀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자에게 이러니저러니 할 수 있습니까? 뱀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해서 신(神)들렸습니다. 뱀이 신(神)들려서 떠드는 헛소리를 받아 준 것이 여자의 잘못입니다.
여자는 뱀을 야단쳐야 했습니다. 야단쳐도 안 되면, 발로 밟아 버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에덴동산)는 지켜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鬼神)들린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귀신(鬼神)들린 사람이 하는 말은 절대로 듣지 마십시오. 혹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듣지 마세요. 귀신(鬼神)에게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 정보가 설사 맞는다 해도 그 사람은 자신의 영혼(靈魂)을 판 것입니다.
절대로 점(占)치지 마십시오. 왜 귀신(鬼神)들린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게 합니까? 새가 점(占)을 치고, 물방개가 점(占)을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새나 물방개를 정의(正義)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것이 곧 다스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뱀이 말을 합니까? 여자가 *혀가 두 개나 있다고 어디서 감히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하면서 혀를 뽑아버렸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는 것인데, 그 말에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무참히 파괴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질서(秩序)를 어기고. 자신의 영역(領域)을 이탈하는 것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것들은 분명히 나의 책임 아래 있는 것인데, 교만하게 월권(越權)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죄를 책망하고, 지적해서 원상복구 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子息)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해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내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지적하기를 겁내면 안 됩니다. 즉 *내가 야단치면 이 자식이 기물을 부수고 외박할 텐데.....*하면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외박(外泊)하려면, 하라고 하세요. 썩 나가라고 하세요.
부모는 *내 밑에 있는 동안에는 이건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돼!*하면서 자식(子息)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교만을 뉘우치고, 올바른 자세로 살게 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문(學文)이 사람을 지배하면 안 됩니다. 학문(學文)은 사람을 돕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문(學文)이 나를 지배할 때, 원래의 자리로 복귀시켜야 합니다.
컴퓨터가 나를 지배하거나, 텔레비전이 나를 지배할 때, 그것을 용서하면 안 됩니다. 텔레비전을 없애든지 해야 합니다. 텔레비전은 정보를 주는 것이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아내의 위치를 벗어나 버리고, 교만하게 다른 길을 갈 때, 남편은 아내에게 *본래 위치로 돌아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남편이 교만하게 자기 위치를 떠나서 가장의 책임을 버리고. 방탕하게 살 때, 아내는 경고를 해야 합니다.
즉 *빨리 제 자리로 돌아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과 나 사이에 피눈물 나는 전쟁이 시작될 줄 알라*고, *나는 자식 모두와 함께 당신을 대항해서 싸우겠노라*고, 그리고 *반드시 정의의 깃발을 우리 집에 꽂고야 말겠다.*는 것을 남편에게 밝혀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소관(所關)안에 있는 것에 관한한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즉 직장에서 내 부하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돈을 어떻게 빼내고 있는지, 다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입니다.
*내 밑에서 불의는 절대로 안 통해!* 하면서 모든 것이 올바른 목표를 향하게 하는 것이 곧 다스리는 것입니다. 절대로 타협하면 안 됩니다. 자식이 잘못 행할 때, 부모가 자식과 타협하면 안 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즉 공부 잘 했다고 용돈 주고. 그러면 안 됩니다. 학생이 공부하다보면 잘할 수도 있는 것이지. 왜 거기에 돈이 따라가야 합니까?
왜 일등 했다고 돈 내놓으라고 합니까? 그럴 때,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하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가 맡은 일이 무엇이며, 그 한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계를 넘으면 안 됩니다.
남의 사람은 멍청하니 쳐다보는 것도 안 됩니다. 내 여자, 남의 여자를 알아야 하고, 내 여자가 아닌 사람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지나가다가 어쩌다 보게 된 것을 죄(罪)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뚫어지게 침을 흘리면거 쳐다보면서 마치 소유할 것처럼,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보는 것은 죄(罪)를 짓는 것입니다. 그 *눈을 뽑아버리든지, 때려주든지* 해야 합니다.
자기 물건이 아니면, 손대면 안 돼요. 우리는 공공건물을 아주 함부로 씁니다. 부모가 먼저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있는 것은 아끼면서 공공건물에는 가래침 뱉고. 함부로 가져오고. 공공시설 안에 있는 장미를 뽑아다가 집에 심으면 안됩니다.
그걸 본 아이들이 공공건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이 아니면,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종이 한 장이라도 함부로 가져오면 안 됩니다.
왜 공금(公金)을 함부로 씁니까? 내 밑에서 교만한 사람이 약(弱)한 사람을 괴롭힐 때,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밤에 웃통 벗고 만나서 *너 죽고 나 살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징계(懲戒)하고, 야단칠 때에는 항상 *사랑으로 바로 세우려는 의도로 해야지, 멸망시키려는 의도로 하면 안* 됩니다. 즉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세우려고 이러는가?*를 미리 생각한 후에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면. 타협하지 말고. 죽기 일보 직전까지* 밀어붙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Ⅳ.더 생각해야 할 것
몇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남자와 여자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할 뿐 아니라, 남녀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이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가 딸이라고 *또 딸이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 여자가 남자 옷 입고, 남자는 여자 옷 입고 립스틱 바르고 그러면 안 됩니다. *여자는 여자로, 남자는 남자로*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남녀의 성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性)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굉장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남녀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친구끼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부부가 사랑하면서 사는 것을 보십시오. 아내가 남편에게 헌신할 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성을 남용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 이외의 방법으로 성(性)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악(罪惡)이라고 하셨습니다.
히13:4절)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결혼은 단지 서로에게 품는 감정이 아닙니다. 결혼은 성(性)의 결합에 대한 사회의 승인(承認)입니다. 이 승인을 받아야 성(性)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폭행은 사회적인 죄(罪)입니다. 그것은 개인이 개인에게 행사한 폭력(暴力)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과 관계된 문제에는 사회 전체가 덤벼들어야 합니다. 성이 문란해지면, 그 사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육(生育)하고 번성(繁盛)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1:28절)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얼핏 이 말씀을 들으면. 노아홍수 사건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시고서 *그 많은 인간들을 홍수로 멸망시켰는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죄(罪)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땅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의(義)롭고, 사랑이 충만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온 세상을 뒤덮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람만 많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많아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의(義)로운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고,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채소와 풀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1:29-30절)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의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채식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할 구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의 어느 한 구절에서 자기가 원하는 구절을 끌어오는 것은 거짓 선생들이 하는 짓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먹을 것과 동물이 먹을 것을 처음부터 구별함으로써 먹이를 가지고 다투지 않게 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먹을 것을 동물들이 먹었다면, 사람들은 동물을 다 잡아서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이 아무리 많아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먹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밥그릇을 놓고 다투니까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역과 지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역이나 지위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경쟁적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나의 기업, 나의 가나안 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지켜 주십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밥그릇을 가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내가 먹을 것이 따로 있고, 그들이 먹을 것이 따로 있습니다. 같은 직장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것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결론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창조가 창조의 절정이며, 극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갖 지혜와 능력과 신성을 동원해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신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밥이나 먹고, 하루하루 세상에서 즐기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우리에게는 되찾아야 할 모습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고장난 사람을 구해서 고쳐야 합니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고장 난 사람 있으면 팔라*고 하십시오. 고장난 텔레비전을 사는 것보다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사람을 고치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사람은 성령만이 고치실 수 있고 교회 밖에서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는 교회, 바른 예배를 드리는 셀(cell)공동체가 아니고서는 고장난 사람을 고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일주일 동안 직장 생활 하면서 두렵고 자신감을 잃었습니까? 시험을 여러 번 치렀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아서 자신감을 잃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당한 모습을 되찾으십시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먹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나. 굶주림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 오늘 내 주변에서 잘못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텔레비전이 잘못 사용되고 있으면, 텔레비전을 굴복시키십시오. 우리 집 애완견이 개 이상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응징해서 개집으로 돌려보내십시오.
내 자녀가 자기의 범위를 벗어나서 잘못된 길로 나가고 있으면, 분명히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교만한 자가 가난한 자를 해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무조건 공경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자식에게 맛있는 것만 주지 마십시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게 하십시오. 심부름도 시키고, 마늘도 까라고 하고, 식사 준비도 하게 하십시오. 이것은 자식이 해야 할 일입니다.
자식이 *엄마 공부해야 하는데?* 하기만 하면 *그래, 그래 내가 다 할께 넌 공부나해* 하면서 떠먹여 주고 받드는 것은 죄(罪)짓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자녀가 부모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게합니까?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청소년 여러분!
어른들에게 인사하십시오. 모두 우리의 부모님들입니다. 또한 내가 지배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반역(反逆)하는 일이 없도록, 잘못 사용되는 것이 없도록, 강한자가 이유없이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임을 기억하고 창조질서에 순종하십시오. 아-멘
찬송가 63장 *주가 세상을 다스리니*
율법서(모세 오경)
▣ 예배 3월 13일(주일) 셀 보고서 투명하고 정직하게
주일 예배와 헌금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은혜감사
요4:23절)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순서 :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성경 : 본문 읽기와 생명의 양식 공유, ☆찬송 : 삽입된 찬송, ☆헌금 : 헌금과 봉헌기도, ☆연구원을 위한 합심기도와 주기도문으로 끝내십시요.
◈후원금 외 헌금은 전체의 10/1을 연구원 설립비로 ▽입금하고, 나머지는 성도간 교제비, 애경사, 새신자 환영, 전도비 등으로 사용하십시요.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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