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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47년 전 오늘, 반듯하게 잘 자란 24세 청년 박흥숙의 인생이 한순간에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총명한 두뇌, 잘 단련된 체력과 절제력을 겸비한 박흥숙은 유난히 추웠던 봄날 일순간에 쇠망치로 건장한 남성 4명을 살해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를 '무등산 이소룡', '무등산 타잔' 등으로 부르며 광기에 사로잡힌 괴물로 묘사했다.
◇ 비상했으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산속에 움막집 세운 소년 가장
박흥숙은 전남 영광에서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위암을 앓던 아버지를 여의었고, 안타까운 사고로 형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장남이 됐다.
소년 박흥숙은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수재였다.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책임감으로 중학교에 수석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박흥숙의 가족은 그가 수석 입학해 받을 수 있었던 교과서를 팔아 차비를 마련, 생계를 위해 다 함께 광주로 향했다.
박흥숙은 중학생 나이에 철공소에 취직했지만 문제는 보금자리였다. 살 곳이 없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박흥숙은 무등산 해발 450m 덕산골에 흙과 돌로 벽을 쌓고 주운 신문지와 밀가루 포대를 벽지로 발라 집을 지었다. 고물상에서 사 온 헌 양철을 지붕으로 얹어 완성한 집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이 있는 가로세로 3m 정도 크기의 움막집이었다.
작고 허름한 공간에 여섯 식구가 다닥다닥 붙어있어야 했지만 박흥숙에게는 집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어린 남동생 둘을 데리고 절에서 허드렛일하던 엄마, 식모살이를 하던 열세 살 여동생과 비로소 한데 모여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 박흥숙이 가족을 위해 60일간 지은 산속 움막집.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도시 경관 미화로 시작된 강제 철거…어머니 쓰러졌을 때도 참았다
당시 박흥숙네와 같은 무허가 움막은 덕산골에만 약 20채가 있었다. 불법이지만 오랫동안 묵인해 왔던 정부가 움직인 건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박흥숙의 움막은 곧 설치될 케이블카가 지나는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게다가 가을에 열릴 제58회 광주 전국체전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광주시는 무등산 움막들을 하루빨리 철거해야 했다.
1977년 4월 20일 당시 '망치부대'로 불리던 철거반원 7명이 박흥숙의 움막집에 쇠망치를 들고 나타났다. 이미 철거를 예상했던 박흥숙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집안의 물건들을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철거반원들은 집을 부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불까지 붙이려 했다. 박흥숙과 가족들은 "제발 불은 지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때 박흥숙의 어머니가 미처 챙기지 못한 돈이 생각나 집으로 뛰어들었다. 움막 천장에 넣어둔 현금 30만 원이 있었던 것이었다. 시내에서 방 한 칸이라도 얻어보려 어렵게 모은 돈이었다.
철거반원들은 박흥숙의 어머니를 제지했고, 밀려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박흥숙은 참았다. 여동생이 울면서 소리 질렀지만 오히려 박흥숙은 "저 사람들도 우리 같은 서민이다. 위에서 시켜서 하는 거고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며 동생을 달랬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어떻게 개·돼지만도 못하게 대하나…우리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닌가"
어머니가 쓰러져도 참았던 박흥숙의 이성을 잃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에게 아픈 노인들이 있는 집만큼은 불을 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얼마 후 계곡 위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박흥숙은 그곳을 향해 달렸다.
노인들의 집이 불타는 모습을 본 박흥숙은 "어떻게 이렇게 우리를 개, 돼지 짐승만도 못하게 대하나, 우리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닌가"라며 울부짖었고, 잠시 후 총성이 울렸다. 박흥숙이 산짐승 때문에 쇠 파이프로 만든 사제 딱총이었다.
놀란 철거반원 2명은 그대로 줄행랑쳤고, 나머지 5명은 박흥숙을 제압하려 달려들었지만 평소 체력 단련에 성실했던 박흥숙이 흥분해 날뛰는 것을 잡을 수 없었다. 박흥숙은 철거반원에게 망치를 휘둘렀고, 그 결과 4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사건의 진정한 원인 외면했던 언론…말 못 할 외압 있었다
그날 박흥숙에게 목숨을 잃은 피해자 대부분은 구청에서 고용한 박봉의 일용직이었다. 이전에도 철거는 있었지만 불까지 지른 적은 없었으나,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 생계를 위해 무등산을 오른 그들도 어쩔 도리가 없이 집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생존의 최전선에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참사였다.
사건 직후 지역 신문사에도 시청 간부들의 외압이 들어왔다. 1970년대 당시 전국 곳곳에 있던 움막집과 판잣집은 셀 수 없었다. 특히 서울 주택의 32%가 판잣집이었다. 사건의 진상이 알려져 폭동이 일어날까 우려했던 윗선의 지시로 언론은 박흥숙을 괴물로 그려나갔다.
당시는 미신 타파를 부르짖던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무속 굿거리가 펼쳐지곤 했던 덕산골은 '무당촌'으로 보도됐으며, 박흥숙은 무당촌을 사수하려는 집념에 사로잡힌 기형적 인물로 알려졌다. 그가 쐈다는 사제총의 조악함은 감춰졌고 그는 총기를 소지한 흉악범으로 비쳤다. 그렇게 박흥순은 '무등산 이소룡', '무등산 타잔'이 됐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 자수에도 사형 집행…"나는 죽어 마땅" 수감생활 3년간 참회
박흥숙은 경찰에 자수했고 범행도 순순히 인정했다. 재판 과정에서도 자기 죗값을 덜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렇게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사형이 선고됐고, 1980년 12월 24일 그의 사형이 집행됐다.
박흥숙은 자필로 쓴 최후 진술서에서 "저의 지난날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저의 울분 때문에 아깝게 희생돼 버린 그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리다"라고 썼다.
그는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고 빗나간 영웅심의 궤변이라 해도 좋다. 하오나 다음에는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죽어가는 몸으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라며 죄없이 가난에 떨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 도시 빈민에게 무관심한 채 철거만 강행했던 나라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이 다시없기를 바란 박흥숙의 바람은 오랫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빈민촌 철거는 절정에 달했다. 올림픽으로 인해 강제로 집을 철거당한 사람의 수는 72만 명에 달했다.
정부는 일부 강제 이주민들의 임시 천막마저 철거했다. 성화 봉송 주자들이 지나가며 주변에 있던 허름한 천막들이 잠시라도 TV 중계 화면에 잡힐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임시 천막마저 뺏긴 사람들은 땅속에 굴을 파고 두더지처럼 살았고, 1987년 대한민국은 '가장 비인간적인 철거를 자행하는 나라'가 됐다.
'무등산 타잔'은 근대화 과정 속 도시 빈민의 고통과 절망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이름으로 남아 있다.
김송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