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영화 〈엘 시드〉
복합상영관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구시대의 遺物처럼 되었지만 텔레비전이 등장하자 영화가 TV와 경쟁하는 한 방식으로 찾은 것이 70밀리미터 와이드 스크린을 활용한 스펙터클 영화였다. 이런 70밀리미터 와이드 스크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는 역시 대형 史劇物이었다.
<벤허〉의 전차 경기 장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장쾌한 사막 신, 〈엘 시드〉의 발렌시아 攻城 장면은 이런 영화의 전투 장면 중 단연 白眉 중의 하나로 꼽을 만했다.
실제 스페인 현지에서 촬영된 발렌시아 전투 장면에서는 수천 개의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가는 장대한 스펙터클이 미클로스 로자의 웅장한 음악과 어우러져 깊이 기억될 만한 명장면을 보여주었다. 영화 〈엘 시드〉는 무려 세 시간의 러닝타임을 가진 대작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은 진지해 보이는 고전적인 외모 탓인지 〈벤허〉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여러 서사 장르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찰턴 헤스턴이 스페인의 영웅 엘시드(본명: 로드리고 디아즈 데 비바르)로, 소피아 로렌은 그의 전설의 사랑 시멘으로 분해 불꽃 튀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찰턴 헤스턴은 이 영화를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연출했더라면 古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리라 말했다.
하지만 몇 가지 스토리 문제를 제외한다면 〈엘 시드〉의 감독 안소니 만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게 볼 감독은 아니었다. 안소니 만 역시 1965년에도 대형 역사물인 〈로마제국의 멸망〉을 연출했다. 이전의 〈엘 시드〉만 한 호평이나 흥행 성적은 올리지 못했지만 역시 敍事劇 장르에 강한 면모를 보인 감독이었다. 명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이 영화를 최고의 작품으로 극찬했다.
영화 〈대장 부리바〉에 출연했던 美人 여배우 크리스틴 카우프만과 숀 커네리는 각각 여주인공 시멘 역과 시멘을 짝사랑하는 오르도네즈 백작 역을 의뢰 받았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양했다고 한다. 실제로 엘 시드는 * 레콩키스타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그는 이슬람군과 싸우기도 했지만 가톨릭군과도 싸운 인물이었다.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은 서로가 티격태격하면서 전투도 했지만 공생 관계도 유지했었다. 엘시드 생존 당시에는 그가 죽은 이후에 나타나는 종교적인 狂信은 없었던 시대였다. 어떻게 보면 엘시드는 자기의 생존을 위해 싸웠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 레콩키스타
레콩키스타(Reconquista)는 '재정복'을 뜻한다. 스페인에서 카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활동을 의미한다. 레콩키스타를 단일 전쟁으로 본다면 세계사에 기록된 전쟁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스페인 반도에서 쫓아내는데 780년이 걸렸다.
사진, 마지막 출전에 나서는 엘시드
II. 사극의 지존(至尊), 찰턴 헤스턴
190cm의 장신에 굵은 선의 이목구비, 근육질의 탄탄한 골격을 갖춘 찰턴 헤스턴은 영화사에 남을만한 기념비적인 몇 편의 사극 대작에 출연하면서 최고의 사극 배우라는 트레이드마크를 달게 된 배우였다. <십계>의 모세, <벤허>의 유다 벤허, <엘 시드>의 엘 시드, <고통과 황홀경>에서의 미켈란제로, <위대한 생애>에서의 세례 요한이 그것이다.
특히 <십계>와 <벤허>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끊임없이 다시보기를 하는 전설적인 대작물이다.60여 년 동안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헤스턴은 1923년 10월 4일 미국 일리노이 주 노맨즈랜드에서 출생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혈통이었던 아버지는 목재소를 운영했다.
헤스턴은 부모가 이혼한 뒤 어머니를 따라 시카고로 가면서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부터 연기를 좋아해 노스웨스턴 대학 드라마스쿨에 장학금을 받고 다니다가 2차 세계대전 말인 1944년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2년간 복무했다. 제대 후 뉴욕으로 진출한 헤스턴은 브로드웨이 무대와 TV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연기력을 쌓아 나갔다. 이따금씩 영화에 출연하던 1952년 거장 세실 B. 드밀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지상최대의 쇼>에 출연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사진, <벤허>에서
1956년 같은 드밀 감독의 <십계>에서 모세로 출연한 그는 대작에 나오는 성인(聖人) 모습에 딱 어울리는 배우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큰 키에 인상적인 목소리를 갖춘 그는 강인함과 독실함을 지닌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의 전형이라고 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쳐났다. 기독교의 나라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이와 같은 서사적인 배우로서의 모습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대작영화 <벤허>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영화는 헤스턴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이밖에 헤스턴은 스페인의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티격태격하던 시절의 역사적 인물을 조명한 <엘 시드>, 르네상스가 낳은 인류 최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그린 <고통과 황홀경>, 로마가 제국으로 바뀌던 시대의 풍운아였던 안토니우스가 나오는 <줄리어스 시저> 등을 통해 사극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한편 서사적 인물로 이미지가 굳혀지는 것은 그에게 별로 달갑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가 돌파구로 삼은 영화가 40대에 출연한 <혹성탈출>이었다. 50대에 들어서도 <대지진>·<에어포트>·<미드웨이> 등에 출연하면서 여전히 중후한 연기를 선보였다.많은 이들은 그를 골수 보수주의자로 여겨왔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진보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사진, <혹성탈출>에서
헤스턴은 1960년대 민권운동 당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1963년의 유명한 워싱턴 행진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행동했다. 여기에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진보주의자인 폴 뉴먼도 참가했었다. 이후 점차 보수주의자로 굳어가는 헤스턴과 뉴먼은 점차 사이가 멀어져 갔다.
사진, <십계>에서
헤스턴의 전미총기협회장으로써의 행보는 여러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그가 눈총을 받고 비난받는 이유는 총기 협회 회장 자리에 앉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총기 사고가 일어날 때 마다 빠지지 않고 사건 발생 지역으로 달려가서 총기 찬성 집회와 연설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런 헤스턴의 골 때리는 행보가 총기규제를 외치는 많은 미국인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우호적인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그는 보수주의자였지만 인종 차별 철폐를 지지하기도 하는 등 대중의 지지와 비판에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의지를 굳게 지키려고 한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 전립선암과 치매 등으로 고생하다가 캘리포니아 주 비벌리 힐스에서 8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III. 엘시드의 일생
엘시드는 11세기 스페인의 武將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를 말한다. 스페인에서 그는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처럼 이슬람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회자되어 왔다. 엘시드의 ‘엘El’은 스페인어의 관사이고 ‘시드Cid’는 아랍어로 주군이라는 뜻이다. 엘시드는 1043년경 부르고스의 귀족가문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의 총애를 받던 경호대장이었다.
사진, 영화에서
그래서 엘시드는 어린 시절부터 나중에 산초 2세가 되는 왕자와 왕궁에서 같이 뛰어 놀면서 절친 관계를 맺었다. 이 두 사람은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함께 처음으로 전투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가톨릭 왕국들 사이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아라곤 왕인 라미로 1세는 카스티야 왕국에 *파리아를 내고 있는 사라고사 **타이파를 공격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자기가 보호하는 사라고사 타이파를 돕고자 이 둘을 보낸 것이다.
* 파리아는 이슬람 소왕국(타이파)들이 가톨릭 왕국에 내는 일종의 보호비를 말한다
**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의 통일 왕조가 사라지면서 이슬람 세력은 수십 명의 에미르(왕)가 통치하는 독자적인 소왕국들로 나뉘어졌는데 이를 ‘타이파’라고 한다. 이는 분파를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
이 때 엘시드는 武人으로서 뛰어난 자질을 나타냈다. 이 전투는 이슬람교도를 돕기 위해 가톨릭 국가가 같은 가톨릭 국가와 전투를 벌인 것이었는데 당시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페르디난도 1세는 죽을 때 산초 2세에게 왕국을 물려줬다. 이후 1072년 산초 2세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바로 밑의 동생 알폰소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다). 이 때 산초 2세의 총애를 받았던 엘시드는 미묘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형 산초 2세의 박해를 피해 톨레도에 숨어 있던 알폰소가 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사진, 부르고스에 있는 엘시드의 동상
이때 엘시드가 카스티야의 왕이 된 알폰소 6세에게 그가 형 산초 2세를 죽이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宣言해야만 그를 섬기겠다고 했다. 알폰소는 형 산초와 가까웠던 엘시드가 껄끄럽고 싫었다. 그러나 카스티야를 원만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의 지지가 꼭 필요했다.
엘시드는 귀족들과 백성들에게서 전폭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는 기분이 영 더러웠지만 엘시드의 말대로 자신이 산초 2세가 죽는 데 가담하지 않았다고 공개적인 맹세를 하고 간신히 엘시드의 지지를 끌어냈다.
1074년 엘시드는 귀족 출신의 히메나와 결혼했다. 알폰소는 엘시드 대신 레온́ 왕가의 핏줄이 흐르는 가르시아 오르도네스를 重用했다. 영화에서는 오르도네스가 히메나를 짝사랑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1080년, 내심으로 꿍하고 있던 알폰소와 엘시드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사건이 일어난다. 다시 또 타이파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엘시드가 허락 없이 알폰소 휘하의 톨레도의 타이파인 소리아를 약탈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다. 톨레도의 소리아는 알폰소를 형으로부터 몸을 숨겨준 타이파이기도 했다.
사진, 영화에서
알폰소는 그렇지 않아도 눈에 거슬리던 엘시드를 이를 기회로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쫓아버린다. 엘시드는 그를 따르는 수백 명의 부하들과 정처 없는 放浪의 길을 떠난다. 이제 세력이 커진 알폰소의 눈치를 슬슬 보고 있던 여러 가톨릭 소왕국들도 엘시드에게서 등을 돌린다. 엘시드는 옛날에 도와준 적이 있었던 사라고사의 타이파를 찾아간다.
사라고사의 타이파는 엘 시드를 받아들였다. 알폰소는 그동안 이슬람 소왕국들로부터 보호비인 파리아를 받아먹는 대가로 그들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힘이 강해진 그는 이슬람 소왕국들인 타이파들을 쫓아버리고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가톨릭 왕국으로 통일하려는 야심을 먹는다.
그래서 먼저 톨레도의 타이파를 삼켜버렸다. 세비야의 알 무타미드 왕은 알폰소가 톨레도를 점령하자 같은 이슬람교도인 북아프리카의 알모라비데 족에게 도움을 청했다. 알모라비데족의 왕인 유수프가 군대를 이끌고 이베리아반도로 건너왔다. 그리고 알폰소의 군대를 사그라하스에서 쳐부수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유수프의 아들이 위급하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알모라비데족에게 혼쭐이 난 알폰소는 그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 걱정되어 사라고사에 있는 엘시드를 부랴부랴 불렀다. 엘시드를 불러들이는 등 陣營을 재정비한 알폰소는 다시 이슬람 소왕국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또다시 알모라비데족이 이베리아반도로 건너온다. 알폰소는 이를 막기 위해 출동하면서 다른 지역에 있던 엘시드에게 속히 오라고 전갈을 보냈으나 엘시드의 도착이 늦어졌다. 알폰소는 간신히 이슬람 군대를 물리쳤지만 늦게 도착한 엘시드에게 단단히 뿔이 나 있었다. 알폰소는 엘시드를 또다시 추방시켰다.
사진, 엘시드의 고향 부르고스
알폰소가 엘시드를 이렇게 사사건건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엘시드와 반목하고 있던 그의 측근 오르도네스가 옆에서 쏘삭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엘시드는 追放당한 뒤 치를 떨면서 이제 다시는 절대로 알폰소를 모시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사병들을 이끌고 스페인 동부 해안 발렌시아 근처로 가서 그곳 이슬람 소왕국들로부터 보호비를 받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점차 그 지역을 평정해 나갔다. 발렌시아 지역은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다른 왕국들도 침을 흘리는 곳이었다. 마침 발렌시아에서 내부 반란이 일어나자 엘시드는 이를 제압하면서 완전히 자기 왕국으로 만들어버렸다. 발렌시아가 엘 시드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알모라비데족은 또다시 바다를 건너와 싸움을 걸었다.
이 전투에서 엘시드가 승리하자 알모라비데족에 대하여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엘시드의 傳說이 시작되었다. 엘시드는 비록 자기를 여러 번 걷어차기는 했지만 애초에 충성을 맹세했던 알폰소 6세에게 발렌시아의 왕관을 바침으로써 끝까지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였다. 중간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한 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이라는 것이 엘시드의 信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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