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87)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1장 조정(趙政), 진왕에 오르다 (1)
- 일통천하(一桶天下)의 기반을 이룩하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550년을 마감한 것은 진시황이지만, 사실 그 이전에 이미 진(秦)나라는 천하 통일의 기반을 확고하게 굳혀놓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인질을 바치고 정기적으로 입조하여 조공을 바친 것이 그 실례다.
이러한 기반을 이룬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진소양왕(秦昭襄王)이다.
그리고 정책 입안자이자 조력자인 승상 범수(范睢)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천하 통일의 실제 주인공은 진소양왕이다, 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 천하를 하나로 이루리라.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즉위 당시 외쳤던 말이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반을 닦아놓았다고 해서 천하가 하나로 된 것은 아니다.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각 나라가 독립국 형태를 취하고 있질 않은가.
굴복과 통합은 엄연히 다르다.
언제 누가 진(秦)나라에 대항하여 입조 거부를 주창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굴복이 아닌 통합!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여기까지 생각했을까.
아니면 6국의 굴복으로 만족했던 것일까.
진소양왕 54년,
옹성의 남쪽 교외에 나가 상제(上帝)께 제사를 드리다.
진소양왕 54년이면 BC 253년.
진시황(秦始皇)이 통일을 이루기 32년 전이다.
상제에게 제사를 드리는 행위는 천자만이 할 수 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말년에 다음과 같이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 나는 천자다.
그 2년 후인 BC 251년 가을, 진소양왕(秦昭襄王)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재위 56년.
나이 70이 넘어서였다.
덧붙여 말하면, 이 해에 전국사군 중 한사람인 조나라 평원군(平原君)도 세상을 떠났다.
세자 안국군(安國君)이 그 뒤를 이어 진나라 왕위에 올랐다.
그가 진효문왕(秦孝文王)이다.
아내 화양 부인은 왕후가 되었고, 한단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가 여불위에 의해 함양으로 돌아온 자초(子楚)는 세자가 되었다.
- 그대의 집에 천하 제일의 대문을 세워 드리겠습니다.
라고 약속한 여불위의 호언장담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불위(呂不韋)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세자는 세자일 뿐 왕은 아니다.‘
진소양왕의 죽음과 더불어 여불위는 별안간 바빠졌다.
가장 먼저 한단성에 남겨두고 온 자초의 아들, 아니 실제로는 자신의 아들 조정(趙政)의 귀환을 도모했다.
자초에 이는 또 하나의 기화(奇貨)가 아닌가.
어쩌면 자초보다 더 확실한 보물일지도 몰랐다.
조정(趙政)의 귀환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지난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질 때와 달리 지금은 진(秦)나라가,
- 보내라.
명령만 내리면 보내야 하는 상황으로 변해 있었다.
여불위(呂不韋)는 자초를 통할 것도 없이 왕후인 화양 부인을 찾아갔다.
"한단에 세자 자초의 아들과 그 아내 조희(趙姬)가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그날로 진효문왕(秦孝文王)은 조효성왕에게 사자를 보냈다.
조나라 도읍인 한단성은 발칵 뒤집혔다.
조정(趙政)과 조희(趙姬)를 찾기 위해서였다.
조희의 아버지 조 대인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위험이 사라졌음을 직감하고 즉시 자신의 딸과 손자를 조효성왕에게로 들여보냈고,
조효성왕은 극진한 예(禮)에 따라 그들을 함양성으로 호송했다.
마침내 조정(趙政)과 조희(趙姬)는 자초와 해후했다.
헤어진 지 6년 만이었다.
이때 조정(趙政)의 나이 9세.
자초의 아들 조정(趙政)을 함양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 여불위(呂不韋)는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이제 진짜 기화(奇貨)로 다듬어야겠다."
진효문왕(秦孝文王)은 왕위에 오르긴 하였으나 아직 본격적으로 정사를 보살피지는 않았다.
진소양왕에 대한 장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효문왕(秦孝文王)은 매일 빈소에 나가 머물렀다.
그에 대한 수발을 여불위(呂不韋)가 자청했다.
물 한모금, 밥 한술 모두 여불위의 손을 거쳐야 했다.
진효문왕(秦孝文王)을 수발하는 여불위의 행동은 지극 정성이었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그의 손을 거쳐 진효문왕에게 바쳐지는 모든 음식물에 미량의 독약이 들어 있을 줄이야.
진효문왕은 자신이 독물에 중독된 줄 모르고 하루 하루를 지냈다.
이윽고 6개월이 지나 복상을 마쳤다.
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 3일 뒤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내궁으로 든 진효문왕(秦孝文王)은 갑자기 피를 토했다.
"독물입니다.“
어의(御醫)의 이 같은 진단에 음식을 담당하던 관리와 요리부들만 애꿎게 잡혀와 문초를 받은 후 처형을 당했다.
물론 여불위(呂不韋)가 6개월에 걸쳐 음식에 독물을 넣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효문왕(秦孝文王)은 끝내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 훙(薨)!
또 국상이 났다.
어수선한 가운데 세자인 자초(子楚)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진장양왕(秦莊襄王)이다.
여불위가 호언한 대로 자신의 집에 천하제일의 대문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때의 자초의 감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었다.
왕후이던 화양 부인은 태후(太后)가 되었고, 자초의 아내인 조희(趙姬)는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아울러 그 아들 조정(趙政)은 세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조정은 조(趙)라는 어머니의 성을 버리고 그냥 세자 정(政)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여불위 또한 공식적으로 벼슬을 받았다.
- 태부(太傅).
왕을 보좌하고 가르치는 관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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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