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편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의 충돌/제 1장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관계 유래
南樂浪ㆍ北扶餘의 存亡과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의 관계
고추모(高皺牟)와 소서노(召西奴)의 한 쌍 부부가 분리하여 고구려ㆍ백제의 남북 두 왕국을 건설한 후에 고구려는 북쪽 여러 나라들을 차차 정복해 들어가 북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는 동시에,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통일하고, 진(辰)ㆍ변(弁) 두 나라와 신라 가라(加羅)를 정복하여 남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음은 이미 제4편ㆍ제5편에서 대강 서술하였다. 두 강대국이 이처럼 남북에서 대치하였으나 수백 년 동안 피차 한 번의 접촉도 없었음은 남낙랑과 동부여가 두 나라 중간에서 장벽이 되었던 때문이다. 이제 두 나라의 접촉 사실을 쓰려고 하매, 먼저 남낙랑과 동부여의 존망(存亡) 관계부터 말할밖에 없다.
남낙랑과 동부여의 열국이 고구려 대주류왕의 정복을 받고는 고구려를 원망하여 늘 지나의 후원을 얻어 이를 보복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고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遂成)이 한(漢)과 싸워 이기고 요동과 북반랑을 회복하니, 남낙랑과 동부여는 물론 고구려에 눌려 꼼짝을 못 하고, 백제도 고구려에게 신복(臣僕)하여 그 요구에 응해 기병을 내서 고구려의 서정(西征)에 참가하였으니, 이는 제4편과 5,6편에 말하였거니와 백제사가 중간에 연대가 줄어들어 고구려 태조왕 때가 백제의 어느 왕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지 아직 발견할 수 없고, 백제 초고왕(肖古王) 이후에야 그 연대를 겨우 믿을 수 있게 되었는데, 초고왕 32년은 곧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원년(기원 197년)이니, 고구려가 발기(發岐)의 난으로 하여 요동과 북낙랑을 한인(漢人) 공손씨(제5편 제1장 참조)에게 빼앗기자 남낙랑과 동부여가 고구려를 배반하고 자립하였으며, 남낙랑의 남부인 대방(帶方) - 지금의 장단(長湍) 내지 봉산(鳳山) 등지의 호족(豪族) 장씨(張氏)가 또 남낙랑을 배반하고 대방국(帶方國)을 세우니, 백제도 이를 기회하여 고구려와 관계를 끊고 자립하고, 초고왕의 아들 구수왕(仇首王)은 예(濊)의 침노를 물리쳐서 나라의 형세가 더욱 강성해졌다.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은 초고왕의 한 어머니의 아우인데, 기원 234년에 구수왕이 돌아가니, 구수왕의 태자 - 자기의 종손(從孫) 사반(沙伴)이 나이 어림을 기회하여 그 왕위를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가 관구검에게 패하고 낙랑을 습격하여 남낙랑의 옛 서울 - 지금의 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옮기고, 남낙랑은 풍천원(楓川原) - 지금의 평강(平康)ㆍ철원(鐵原) 부근으로 옮기자 고이왕이 남낙라의 변경을 침노하여 그 백성들을 붙잡아 갔다.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남낙랑과 한편이 되어 동부여를 쳐서 이기고 회군하는지라, 고이왕은 아직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백제로서 위(魏)를 대적하지 못할 줄을 알고 그 약탈한 사람들을 돌려주고 화의를 청했다.
그러나 유무 등이 듣지 않고 신라 북부의 여덟 나라를 다 남낙랑에게 떼어붙이려 하였다. 왕이 노하여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대방(帶方)의 기리영(畸離營 : 지역 미상)을 거쳐 궁준(弓遵)을 목베고 위의 군사를 물리치니 대방왕 장씨가 이에 백제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그 딸 보과(寶菓)를 고이왕(古爾王)의 태자 책계(責稽)에게 시집보내서 백제와 북방에 대항하는 공수동맹을 맺었다. 기원 285년에 책계왕이 장인과의 동맹의 의리를 위해 대방을 구원하니 이것이 백제와 고구려의 첫 충돌이었다.
그 뒤에 고구려는 선비 모용씨(慕容氏)의 발흥(勃興)으로 하여 서북쪽 방어에 급급해서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남낙랑과 동부여는 백제의 강성해짐을 시기하여 기원 298년에 두 나라가 진(晉)의 구원병과 합력하여 침노해왔다. 책계왕이 나아가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고, 분서왕(汾西王)이 서서는 아주 남낙랑의 자객에게 암살을 당하고, 비류왕(比流王)이 섰다.고구려 미천왕이 북으로 요동과 북낙랑을 격파하여 선비를 격퇴할 뿐 아니라 또 남쪽의 경영에도 힘을 써서 남낙랑과 대방을 토멸하고, 오래지 않아 백제와도 결전을 하게 되었으나 미천왕이 죽어 그 문제가 유야무야의 속에 묻히고,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이 서서 선비에게 패했음은 앞편(編)에서 말했거니와 고국원왕이 북방 경영을 포기하고 남진(南進)주의를 취하여 자주 백제를 침노하다가 마침내 백제의 근구수왕(近仇首王)을 만나 패해 꺾여서 드디어 남북혈전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다음 장에서 이를 서술하려 한다.
첫댓글 제7편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의 충돌,
제1장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관계 유래에 대한
조선상고사를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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