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만물상
[만물상] 명품 조연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3.09.19. 20:33업데이트 2023.09.20. 00:32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3/09/19/2NT445XN4BDNBDZHUT7A4QP2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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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스무 살 청년 변희봉의 첫 직업은 배우가 아니었다. 지방에서 법대를 중퇴하고 상경해 제약 회사에 다니며 방송국 문을 두드렸지만 거푸 낙방했다. 겨우 서게 된 무대에선 악역만 맡았다.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에서도 최불암에게 쫓기는 범인이었다. 그래도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고 마침내 ‘조선왕조 500년’에서 간신 유자광 역으로 떴다. ‘00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대사는 유행어가 됐다. ‘감기 몸살은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제약 회사 광고도 찍었다.
▶1990년대 들어 긴 침체를 겪었다. 사극이 시들해지고 시트콤이 각광 받으며 설 자리를 잃었다. IMF 외환 위기 때는 수입이 끊겨 낙향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플란다스의 개’에 경비원 역을 맡아 달라고 했다. 시시한 배역으로 보였지만 봉 감독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조연이라고 했다. 수십 년 변희봉이 출연했던 작품을 줄줄 꿰며 하는 설득에 감복해 출연하겠다고 했다. 조연 변희봉의 두 번째 전성기가 그렇게 시작됐다.
▶변희봉은 조연으로는 드물게 소설 제목에도 나온다. 이장욱의 단편 ‘변희봉’에서다. 소설 속 변희봉은 주인공 ‘만기’만 그의 존재를 알 뿐, 인터넷 검색에도 나오지 않는 무명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만기 아버지가 진한 부산 사투리로 묻는다. “니, 밴히봉이라고 아나?” 아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아들은 자기 말고도 ‘대배우 변희봉’ 팬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명품 조연 변희봉의 대표작이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다. ‘살인의...’에서 형사 변희봉은 엉뚱한 이를 범인이라며 잡고 한껏 들뜬 표정으로 기념사진까지 찍는다. ‘실수를 반복하며 사는 게 인생’이란 메시지를 그 표정에 담았다. 많은 이가 그 연기에 위로받았다고 했다. ‘괴물’에선 괴물에게 최후의 일격을 당하기 직전, 가족을 향해 “어여 가!”라며 손을 흔드는 연기로 객석을 울렸다. 훗날 그를 만난 더스틴 호프먼이 반색하며 눈앞에서 재연해 보였다던 명연기다.
▶변희봉은 일흔다섯을 넘긴 2017년 봉준호 영화 ‘옥자’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 섰다.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70도로 기운 고목에 꽃이 핀 기분”이라며 감격에 겨워했다. “죽는 날까지 연기할 준비가 돼 있다”던 그가 영면에 들었다. 소셜미디어엔 아쉬운 작별 인사가 줄을 잇는다. 소설 속 변희봉은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둘밖에 없었지만, 현실의 변희봉은 수많은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연기자는 그렇게 불멸을 얻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내나라는내가지킨다
2023.09.19 21:00:10
변희봉 선생님 연기는 언제나 진심이 느껴진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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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2023.09.19 22:16:25
주옥같은 명품 배우님들이 한 분, 두분... 이 세상과 작별을 하시네요. 저 세상에서 평안히 영면하시옵길... 명품 연기를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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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좀도
2023.09.20 04:41:39
주연만 기억되는 세상에서 조연도 역할이 만만치 않다. 조연 덕분에 주연이 빛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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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고존
2023.09.20 07:49:15
범죄자 등 악역 연기를 할 때 '눈을 희번득이며 히죽 웃는' 그의 연기를 더이상 볼 수 없다니? 오늘의 k-drama가 세계를 석권(?)하는데 큰 역할을 한 명품 배우가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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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rking
2023.09.20 07:41:43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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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
2023.09.20 07:10:48
꼭 좋은곳으로 가셔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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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man
2023.09.20 00:08:05
또 한분 가시는군요. 좋은 연기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