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덕수궁과 남산 전망
청계천이 끝나는 동아일보사 부근에서 세종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두 블록 내려오면 대한성공회의 건물이 있고 덕수궁돌담길이 영국대사관 사이의 좁은 길로 이어진다. 옛날 가수 진송남이 부른 ‘덕수궁 돌담길’노래를 기억한다. “비 내리는 덕수궁 돌담장 길을 우산없이 혼자서 거니는 사람~ 무슨 사연 있길래 혼자 거닐까....”
대중 가수들이 노래를 불러 유명해진 곳 중의 하나가 덕수궁 돌담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세식 대한성공회 건물과 오래된 은행나무가 은근히 정취를 자아낸다.
대한성공회 건물 앞에 왠 첨성대 모형이 조성되어 있었다. 작가의 작품인데 ‘천년의 빛으로 희망을 비추다'라고 작품을 소개하고 있고 그것은 곧 이 작가의 작품 주제가 되는데 옆면에 작품 소개하는 글이 기재되어 있었다.
여기는 대한성공회 위치에서 영국대사관까지의 거리에 있는 덕수궁 돌담입니다. 저기 길 끝에 서 있는 경비원이 아마 대사관 쪽으로 출입을 제한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이 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가 봤다.
아마 느티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적 제124호인 조선시대의 궁궐. 1611년에 경운궁, 1618에는 서궁으로 불렸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의 건립이 이뤄졌다. 1897년, 1900년, 1902년, 1904년에 걸쳐 궁궐의 건립과 중건이 진행되었고 1907년 고종이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꿨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풍취를 이루고 분위기가 고즈녁하다.
다시 문을 통해 궁 밖으로 나와 돌담길을 걸었다. 시간이 없어서 전각 하나하나를 통해 견문을 넓히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길 끝에는 미국대사관저와 고종의 길이라는 유적이 있다.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후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 사용한 길이라고 한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쫓겨 간 대원군을 위로하는지 아니면 명성황후의 최후를 위로하는지 예쁜 꽃이 담장을 넘는다. 다시 광화문 쪽으로 왔다.
근처에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라는 비석과 함께 전각도 있다.
쇄국정책으로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였고, 그로 인해 열강의 침략에 빌미를 제공한 대원군이나 고종이 뭘 잘했다고 이런 전각을 세우는지 알 수가 없다.
덕수궁은 여기까지 마무리 하고 우리는 다시 청계천으로 돌아가서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다음 행선지는 남산 전망대이다. 남산 주차장은 만차였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길가에 빼곡하게 세워둔 차들 사이에 두 번 왕복하다 겨우 자리를 잡고 주차를 한 다음 남산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매표소에 줄을 섰다. 줄이 장난이 아니게 길다. 겨우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자물쇠로 사랑을 채울 만큼 죽고 못 사는 사랑도 저 자물쇠를 채운 이들 중에 아직까지 몇 명이나 유지하고 있을까 의심스럽다. 바꿔 말하면 자물쇠로 채울 만큼 사랑의 믿음이 약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남산은 용산구에 있고 전망대는 남산 타워에서 북쪽 방향을 보고 있다. 남산의 바로 앞에는 명동이고 좀 위에 을지로이고 그 다음 광화문 쪽이다. 전망대 안내도 중에 중간에서 약간 좌측으로 북악산이 보이고 북악산 바로 밑에 청와대가 살짝 지붕만 보인다.
사진 찍을 때는 어느 방향인지 모른다 그냥 경치가 좋으면 찍고 본다. 카메라 렌즈 배율을 파인더에 적당한 규격으로 이리저리 구도를 잡아서 담는다.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소개하면서 지도를 찾아 그 때의 상황을 복기하여 방향을 찾고 지역의 위치도 확인한다. 그것이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한다.
남산타워에 올라갈려면 여기서 표를 사야 한다. 우리는 타워에 오르지 않기로 했다. 타워 밑의 전망대에서 보아도 잘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나라 제일 높은 곳인 롯데 타워도 갔었기 때문이다.
서울 살면 이런 둘레길도 도보로 걸어 봤으면 좋겠다.
날이 어두워지며 아직 하늘 색깔은 남아 있다. 케이블카와 남산타워가 올려다 보여서 이미지를 남긴다. 전깃불의 반사로 사진 상태가 좋지 않다.
여기서 4편을 마무리 합니다.
첫댓글 덕수궁 미술관에서 전시회 보고‥돌담길을 같이 걷던 친구가 보고싶네요‥ㅎㅎ
아~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