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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6년 9월 15일 수요마음공부방 정전
제2교의편
제7장 사대강령-무아봉공
설교:박세훈교무
타이핑:송밀운
사대 강령은 곧 정각 정행(正覺正行)·지은 보은(知恩報恩)· 불법 활용(佛法活用)·무아 봉공(無我奉公)이니, 정각 정행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지은 보은은 우리가 천지와 부모와 동포와 법률에서 은혜 입은 내역을 깊이 느끼고 알아서 그 피은의 도를 체받아 보은행을 하는 동시에, 원망할 일이 있더라도 먼저 모든 은혜의 소종래를 발견하여 원망할 일을 감사함으로써 그 은혜를 보답하자는 것이며, 불법 활용은 재래와 같이 불제자로서 불법에 끌려 세상 일을 못할 것이 아니라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 일을 더 잘하자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에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그 불법을 활용함으로써 개인·가정·사회·국가에 도움을 주는 유용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며, 무아 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 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
마지막인 무아봉공(無我奉公)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시겠습니다. 무아봉공이라는 교리는 제 개인적으로는 제일 부담스러운 교리입니다. 사진에도 있듯이 동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는 거리로 간다. 전재동포 구호 사업을 했을 때 전쟁 이후에 내 한 몸 제대로 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무아(無我)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그래서 저는 무아봉공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또 실행하면서 이런 두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봉공 하는 것도 힘든데 무아까지 가능한가 한 가지도 힘든데 무아를 사는 것도 힘들고 봉공도 힘든데 무아로서 봉공을 하는 거 가능한가? 이런 마음이 들었고요. 우리가 무아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는데 무아라는 것이 사실은 깨달은 입장에서 알 수 있는 거기 때문에 무아라는 것에 대해서 늘 선진님들한테 듣고 학교에서 배우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고 진정한 무아가 무엇인가 제가 들을 때마다 잊어버리는 걸 보면 제가 깨쳐서 증득한 것이 아니라 들어서 아는 것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뭔가 이게 좀 2% 부족하지 않나 그래서 뭐 하러고 하면 항상 없다라는 것이 항상 메이고 허무라는 것으로 자꾸 빠지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첫 번째 의문은 대산종사님께서 해주신 본문 말씀으로 좀 어느 정도 해소가 됐습니다. 무아봉공 하면은 박청수 교무님이나 마더 테레사 정도는 돼야지 무아봉공 아닌가 하는 생각이 평소에 있어서 멀게 느껴졌는데 대산종사님께서는 처지와 형편을 따라 할 수 있다 가정에 당하면 가정에서 봉공을 하고 사회에 당하면 사회에서 봉공을 하고 세계에 당하면 세계의 봉공을 한다. 이 봉공이라는 말이 이게 많이 쓰는 말은 아니에요. 봉사라는 말을 많이 쓰죠. 공을 받든다 그러니까 한 명 이상이 모이면 제가 보기에는 공인 것 같아요. 엄밀히 보면 저 박세훈이라는 사람도 공(公)이죠. 사은의 공물이니까 대종사님의 참 위대하신 점은 그 모든 것을 다 은혜의 관계 공적인 관계로 봐주신 건데 우리가 이렇습니다.
사실은 이제 곧 추석이 돌아오는데 추석에 돌아오면 여러 가지 감정들이 들어요. 맨날 추석 때 내가 음식을 다 하고 나만 맨날 이동을 하고 내가 힘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이번 추석 때 좀 내가 일을 덜 할 수 있을까 내가 좀 편할 수 있을까 거리두기 4단계가 되면서 안 갈 수 있는 또 건수가 생기기도 했는데 여러 가지가 마음에 들 수가 있어요. 이렇게 피로 맺어진 가족 사이에서도 일 조금 더 하고 못하고 간에 얼마나 첨예하게 예민하게 나오잖아요. 그렇다고 하면 참 이 공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생각이 됩니다. 사회의 장에서도 그래요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업무 분담을 철저하게 해서 조금이라도 내 업무가 아닌 것은 서로 안 하려고 하다가 전체적으로 공백이 생길 때가 있죠. 업무 분담이 아주 잘 된 거일수록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제가 마음을 놓치면 우리 교당 식구들 살면서 이거는 누가 해야 될 일인데 누가 해야 될 일인데 생각될 때가 있어요. 그러면서 제가 깜짝깜짝 놀라요 그런 것이 어디 있나 먼저 본 사람이 하는 거고 다 교당 일인데 어떻게 그것을 나누고 하느냐 그러니까 조금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뭔가 미루고 싶은 마음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들이 들죠. 직장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당에서 간사가 할 일이 따로 있고 엄밀히 봐서는 교무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데 그런 것들이 또 생기게 되고요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나라는 것에 매몰되다 보면은 세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죠 아프가니스탄의 일어나는 것은 나랑 관계없는 거고 미얀마 사태도 그렇고 이렇게 살아가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저를 보니까 어쨌든 간에 이번 추석에는 내가 먼저 가족을 위해서 가정에서부터 봉공을 해보면 어떨까?
무아봉공이라는 네 글자를 보면 제일 처음에 가로막는 단어가 무아(無我)죠 엄청 큰 단어고 알기도 어려운 단어인데 이 무아라는 것을 제가 공부하고 수행을 하면서 들었던 감상이 있습니다. 무라는 것에 상당히 내가 사로잡혀 있다. 지난 번 일원상 서원문 설교 때 경허의 세 달라고 해서 얘기를 들었죠. 위대한 스님이신 경허 스님의 세 명의 수제자 수월 혜월 만공스님이 있었죠. 다 달을 묘사한 건데 수월과 만공의 대화 중에서 이런 것이 나왔죠. 수월 스님이 만공 스님한테 “여보게 만공 이것을 숭늉 그릇이라고도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말고 한마디로 똑바로 일러보소.”라고 물었던 말이 있죠. 일반적인 사람은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퀴즈인데 만공 스님은 이제 숭늉 그릇 자체를 깨버리잖아요.
우리가 항상 어떤 이 언어라는 것은 사람의 사고를 가두고 그런 언어 속에서 살다 보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 언어에 갇히게 돼요. 특히 이 무아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무아라는 단어를 얘기하면은 없다라는 것이 갖춰서 그 없다라는 것이 익자에 반대되는 없다를 생각하게 돼요.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예요. 이것을 우리 부처님께서도 아주 걱정을 하셨던 부분인데 우리가 이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서는 이 무아라는 것을 또 이 언어로 풀어가기 시작하면은 절대 그 무아에 도달할 수가 없는 건데 그래서 우리 만공스님은 그릇을 깨버린 거죠. 그 질문 자체가 틀에 갇히려고 하지 않는 거잖아요. 숭늉 그릇이라는 틀에 이 무아에 대해서 공부를 하려면 그 틀을 벗어나야 돼요 내가 가지고 있는 그동안 배웠던 지식 무(無)라는 것에 대한 언어적으로 익혔던 것들 없다라는 것에 있다.
없다에 상대되는 무에서 제일 제 사리 우리 유마거사를 만나러 갔을 때 유마거사가 묻잖아요. 좌선은 잘하고 있는지 그래서 좌선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묻죠 유심(有心)으로 하는가 무심(無心)으로 하는 거 묻죠. 그러면서 이렇게 또 프레임에 가둬요 자네가 유심으로 선(禪)을 한다 그러면은 모든 일체 중생이 선을 하고 있는 거다. 다 모든 일체 중생의 마음을 쓰고 있으니까 무심으로 선을 한다 그러면은 돌맹이도 선을 하는 거고 이 설교 단상도 선을 하는 거다. 무심이니까 그럼 자네는 선을 할 때 유심으로 하는가 무심으로 하는가 묻죠. 이런 선사들의 만공 스님의 말씀이나 유마거사의 말씀은 니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관념의 틀을 깨라는 거죠.
선(禪)이라는 것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그죠 유무 초월의 생사물이잖아요. 언어 도단의 입장처로 들어가는 건데 우리가 실제적으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자꾸 관념적으로 떨어져서 분석을 하게 돼서 더 멀어지게 돼요. 무아도 마찬가지예요. 무아봉공도 가정에 당하면 가정에서 봉공을 하면서 사회에 당하면 사회에 봉공을 하면서 세계에 당하면 세계의 봉공을 하면서 얻어가야지 책을 한 자리에 본다거나 설교 한번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면 결국은 그것은 절대 무아의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 틀을 깨기가 어렵죠. 지금 이제 무아에 대해서 혹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유에 상대되는 있다에 상대되는 것으로서 내가 없다. 내가 없다를 무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거는 아닌데 첫 번째 우리가 무아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유무의 프레임에서 그 유무의 프레임은 언어죠 그 언어에 갇혀 있는 것을 벗어나야 됩니다.
니 스몰리라는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어떤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서서히 변하는 것과 빨리 변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주에는 물체와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빠른 과정과 느린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만물은 오온의 가감이다. 임시적으로 만났다가 인연 따라 흩어지는 것이다. 라고 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거죠. 그러니까 저라고 하는 박세훈이 변화하는 것과 제가 여기 아이스크림을 더운 날 들고 있으면 변화하는 것이 아이스크림은 빨리 높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이 눈에 확 보이지만은 저라는 사람은 변하는 속도가 잘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하지만 변하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도 변하고 있어요. 분명한 것은 그러니까 우주에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오온의 인연 따라서 모여졌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는 과정인데 무상인데 다만 서서히 변화하는 것과 빨리 변화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에요. 변화의 속도의 차이일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변화한다고 하고 내 눈이 감지하지 못하는 변화 내 눈이 감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내 눈이 감지하지 못하는 변화는 그것을 우리가 실제한다고 착각을 해요. 저는 실제 하는 게 아닌 데도 변화하고 있어요. 끊임없이 지금도 계속 세포가 죽고 살아나고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 그러면 실존한다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 무아라고 하는 것은 상견(常見)과 단견(短見)에서 출발했는데 상견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깨달으실 당시에 세상의 그런 이론적인 흐름이었어요. 상(常)이라는 것은 항상 상자 그래서 뭔가 영원불멸한 실제가 있다. 그것을 신이라고도 하고 그 당시 부처님이 계셨던 힌두교 시대 때는 아트만라고 했어요. 영혼 불멸을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을 거기에 합의를 해야 된다 그 영원 불만을 그 무엇을 찾아가는 것이 상견이고 단견이라는 것은 사람은 죽으면 끝난다 그러니까 상견을 가진 사람은 영원불멸한 영원에 합일을 하기 위해서 고행을 해요. 육체라는 것은 영혼불멸한 것이 아니라고 봤으니까 육체를 벗어나서 그 영혼불멸한 자리에 가기 위해서 육체를 최대한 학대하는 거죠. 그 단견이라는 것은 쾌락주의잖아요. 어차피 썩어서 이번 생이면 끝날 건데 부처님께서 상견도 아니고 단견도 아니다. 무아(無我)라고 주장한 거죠. 그런데 이제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이 이 무아를 실천적으로 수행을 통해서 가려고 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통해서 가니까 부처님께서 대답을 하시지 않죠.
또 관념적인 질문에 그것을 14 연기(緣起)라고 해요. 부처님께서 침묵을 지켰던 질문들이에요.
예를 들자면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겁니까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은 겁니까 이런 질문들이에요. 자아와 육체는 동일한 겁니까 이런 질문을 할 때 부처님께서 독화살의 비유을 드시죠 어떤 이가 화살을 몸에 맞았는데 그 화살이 몇 미터에서 날아왔고 누가 쌓고 각도가 어떻게 되고 그거 분석하다가 정작 화살을 빼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 수행정진해서 가기도 부족한 시간에 그런 형이상학적인 수행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냐라고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의 무아에 대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무아에 대해서 박사 하기를 받아도 내가 무아가 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거죠. 이 무아라는 것은 연기에서 왔어요. 연기라는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는 거예요. 상호 의존적인 거예요. 모든 것이 고립되어서 단독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없는 거예요.
제가 태어난 것도 부모님이 있어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부모님의 부모님이 있어서 태어났잖아요. 모든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는 거예요. 상호 의존적인 거예요. 모든 것이 고립되어서 단독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없는 거예요. 제가 태어난 것도 부모님이 있어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부모님의 부모님이 있어서 태어났잖아요. 모든 것은 단독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의존해서 일어나요. 그리고 그것은 조건이 바뀌면 또 바뀌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아라고 한다 그러면은 “내가 없다.”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무아라는 것은 나라고 그동안 내가 학습되어 왔던 있다. 없다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없다.”라는 거예요.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없다. 나라는 것은 조건이 변하면 계속 바뀌는 거예요. 모든 것이 그것을 조건이 바뀌는 것을 우리는 변화라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변화라는 것이 단독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따라서 변하는 거예요. 대상에 따라서 내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으로 변화가 되는 것이죠. 그것이 연기(緣起)이고 그것이 무아(無我)이고 그것이 무상(無想)이고 그것이 공(空)이에요. 이름이 다를 뿐이지 같은 의미 이것을 이제 알아야 되는데 이것을 깨쳐야 되는데 이것을 깨치기 위해서는 관념적으로 들어가서는 깨칠 수가 없다.
실천적 무아를 가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든 것이 일체개고(一切皆苦) 부처님께서 관념적으로 질문에 대답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 하신 말씀이 인생은 고라고 하신 거잖아요. 그 고라는 것은 뭐냐면은 듀카라는 말인데 산스크리트로 듀카라는 것은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거예요. 인생은 무상하기 때문에 본 거예요. 한계 상황이 분명히 있어요. 아무리 튼튼한 사람도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언젠가는 인간이라면 한계 상황이 있잖아요. 죽어요. 육체가 있는 한 예 그거 다 변해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 상황과 모든 것은 변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이 고통 그 변함에 대해서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고통을 통해서 무아를 깨닫게 하신 거예요. 그가 괴로우니까 무아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실천적인 무아예요. 수행을 통해 예 호기심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괴로워 그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무아가 돼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물리학에서는 어떻게 이 무아를 바라보느냐 그전에는 우리가 고전 물리학에서는 실체가 있는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현대 물리학 양자 물리학에서 존재라는 것이 입자이면서 파동이잖아요. 어느 하나 고정돼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 입자이면서 파동인 것이 관찰자에 따라서 바뀌어요. 관찰자가 볼 때는 입자로 있다가 관찰자가 안 볼 때는 파동으로 바뀌기도 하고 관찰자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느냐에 따라서 바뀌는 거예요. 존재가 연기라는 거죠. 연기가 상호 의존적이잖아요.
그래서 이 니 스몰린이라는 학자가 앞에서 얘기했지만 이 세상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이것이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그 사건은 인과관계로 열려 있죠 나라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건들이에요. 다만 빠른 변화 느린 변화가 있겠죠. 하루살이는 하루 만에 죽는 거고 우리 인간이 인간의 수명대로 죽는 거예요. 빠른 변화 느린 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죠. 사건의 흐름이 어떤 특성을 갖고 일정한 시간 동안 지속하면은 우리가 어떤 조건이 형성돼서 그 조건에 따라서 오온이 만났어요. 그것이 사건이에요. 이 사건의 흐름을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이 사건의 흐름에는 어떤 동일성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 말이 어려우니까 쉽게 얘기하면은 나라고 하는 박세훈은 어떠한 조건이 만족돼서 이 자리에 서 있어요. 모든 것이 그런데 10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나인가 같은 나가 아니잖아요. 세포가 몇 년 되면 다 바뀌어버리는데 몇 개월 만에 그때 나하고 나와 지금 나는 다른 것이 아니잖아요. 근데 세포의 변화를 봤을 때는 같은 나가 아닌데 내가 바뀌었나 나라고 하는 것은 동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없지만 연속성이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인과 인과 인과로 해서 계속 연속이 되는 거예요. 사건의 흐름에는 동일성은 없지만 이 과학자가 한 말이에요. 사건의 흐름에는 연속성이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이 한 번 세포가 싹 바뀌어서 다른 사람인 것 같지만은 그 안에서 인과 인과 인과로 와서 연결된 것이 있다. 동일성이라는 것은 없지만은 연속성이 있다. 이것이 연기예요. 고정 불멸의 실체는 없지만은 상호 의존되어 있는 거니까 원불교에서 무아는 무엇인가 원불교에서 신앙의 결론은 처처 불상 사사 불공이죠. 원불교에서 수행의 결론은 무시선 무처선이에요. 원불교 신앙과 수행의 결론을 집약시켜놓은 것이 무아봉공입니다. 교리의 결론 같은 거죠. 그런데 우리가 이제 앞에서 한번 정리를 해보는 거예요.
이 무아라는 것이 연기에서 왔고 연기가 무아예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 교리로 보면은 사은이에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사은이 그렇잖아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예요. 동포를 받더라도 저 동포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저 동포가 없으면 내가 없어요. 있을 수가 없어요. 부모님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가 없어요. 이것이 사실은 연기론이에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건데 대종사님의 그 관계를 연기의 관계를 은이라는 사상으로 감싸 않으신 거죠. 그래서 아까 제가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나라고 하는 것이 공적인 것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있지만 나라는 것이 사은의 공물이에요. 천지와 부모와 동포와 법률의 집합으로서 관계로서 만들어진 거예요. 나라고 하는 것이 그중에 하나만 없어도 만들어질 수가 없어요. 원불교에서 뭐하는 사안의 공물이고 유무 초월의 생사문이에요. 아까 제가 유아 무의 틀을 벗어나야 된다고 했잖아요. 나라고 하는 것을 있다라고 하는 것에도 사로잡히면 안 되고 없다라고 하는 건 사로잡히면 안 돼요 유무 초월의 생사문인 무아예요. 그러니까 일원상 법어에서 나왔죠 우주 만물의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은 알며 이것은 연기를 깨달아야지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연기 무아가 연기인데 무아라는 것을 원불교에서는 대아라고 했단 말이에요. 대아가 되려면 연기가 돼야 돼요 연기 이치를 깨달아야 돼요
천도법문에서는 유도 아니오 무도 아닌 그것이나 유라는 것도 아니고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중에 그 있는 것이 무의와 자동적으로 생겨나 이런 것들이 내 안에서 밝게 깨우쳐질 때 무아를 아는 것이지 무아는 억지로 너 왜 무아가 돼야 되는데 왜 나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면서 막 누르는 게 무아가 아니에요. 왜 생겨 없어야지 없어야지 이 무아가 우리 원불교의 역사에 그대로 드러나요. 원불교가 첫 번째 법계 인증을 받은 사무 여한도 결국에는 무아주의거든요. 나를 놓으니까 큰 나가 드러난 거죠. 큰 나가 사은이 한 몸이라는 거예요.
한 몸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정산종사님은 유일한 행동이 결국은 무아봉공이라고 하셨고 대산 상사님께서는 그것을 대세계주의라고 한 거예요. 내가 종교인이라서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치고 보니까 내가 뭐하고 뭐하라는 것이 다 사은의 은혜로서 서로 은혜 아님이 없는 것이고 나라고 하는 것이 이름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은 아는 것이고 한 몸인 거고 이것이 삼동윤리로 나온 거기 때문에 원불교의 시작도 무아고 끝도 무아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제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 했을 때 정산종사님께서는 세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진실(眞實) 모아 수세(隨勢) 무아 맹종(盲從) 무아 진실을 무아라는 것은 내가 사가 없을 때 오롯한 것이 진실 무아고요 수세 무아라는 것은 내가 없는 건데 권력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이쪽이 권력가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에 권력 있으면 저쪽에 있어 붙어서 판세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거 맹종무아라는 것은 무지를 말해요. 내가 주변도 없고 무지 무지해가지고 내가 없는 거예요. 뭘 드러내지 못하는 거예요. 진실 무아는 우리가 갖춰가야 될 것이고 수세 무아하고 맹종 무아는 우리가 없애야 될 것이죠.
좌산 종법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부당 망아와 정당 방아가 있다. 망아도 이제 무아하고 연결되는 부분인데 부당망아라는 것은 경몰(境沒)망아 공상(空想)망아 무기망아 그러니까 공상 망아고 무기 망아라는 것은 내가 적적 성성한 상품 자리에 들어간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것이 무기(無記)일 때가 있죠. 적적한 가운데 무기 죽은 마음 이것이 무기망아예요. 아무 그냥 마음이 죽어버리는 거 이것은 부당 망하니까 제거해야 되고 정당 망아는 것은 대아 망아예요. 대야 망아는 것은 뭐냐면 서원이 있는 거예요. 무시선이 되겠죠. 입적망아라는 것은 우리가 자선을 할 때 무아의 더 극치로 들어가는 것이 입적(入定)망아입니다. 그래서 부당 망아는 제거하고 정당 망아를 우리가 하는 건데 우리가 당장 깨치기 어려우면은 서원을 크게 가져서 대아를 만드는 것도 이 무아로 가기 위한 한 단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무아라는 것이 단계가 좀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그냥 갑자기 너보고 우리 보고 무아 봉공 하라 그러면 힘들잖아요. 첫 번째는 관념적 무아에서 벗어나야 돼요 그냥 책 읽어가지고 무아네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 무아 있다. 없다. 이런 언어 성인 무아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제가 비아(非我)라고 해요. 이것이 “내가 아니구나.” 그다음에 가는 것이 탈아(脫我)예요. 그동안 내가 나라고 알았던 것이 내가 아니네 그러면 그동안 내가 나라고 알았던 거 벗어나는 것 그것이 탈아가 되겠죠. 관념적 무아에서 비아로 가고 비아에서 탈아로 가고 탈아에서 내가 법타원님이나 정산 종사님께서도 진정한 무아봉공은 견성(見性)을 해야지 성리 자리를 보아야지 할 수가 있다고 했어요. 근데 당장 내가 그것을 못 봤다. 그러면은 대아를 하는 거예요. 서원을 크게 세우는 거예요. 서원을 크게 세우면은 마음이 커지게 되죠. 그걸 가지고 실천적 무아를 해야 돼요 관념적 무아가 아니라 실천적 무아라는 건 뭐냐 하면은 부처님께서도 니가 괴로우냐 괴롭다는 것은 니가 무아가 안 됐기 때문인 거예요. 집착하는 거예요. 집착 내가 아닌 것에 집착을 하고 있어요. 거짓말에 집착을 하고 있어 그것이 나로 알고 그러니까 실천적 무아는 내가 괴로웠을 때 그 괴로움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결국은 나라고 할 만한 그것이 없구나 그것을 보는 것이 실천적 무아가 되겠죠. 그것을 불교에서는 무아 열반이라고 했는데 깨달음까지 했었는데 우리 대종사님께서는 그것을 무아 봉공까지 더 승화시킨 거죠. 수행 차원의 열반에서 대종사님은 그것이 우리 사은이라는 것이 결국은 한 몸이기 때문에 공을 위하는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하는 거라 나는 단계까지 간 거예요.
제2부 법어(法語) 제9 무본편(務本編) 33 말씀하시기를 [불보살은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되고, 상 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되며,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를 나타내고, 공을 위하는 데서 도리어 자기를 이루시나니라] 하시고, [有爲爲無爲 無相相固全 忘我眞我現 爲公反自成]이라 써 주시니라. |
마지막으로 우리 정산 종사님의 이 시를 가지고 우리 무아의 그 자리를 한번 실천적인 무아의 자리를 가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함 있음은 함 없음으로써 되고 상 없는 모습이 진실로 온전한 것 나를 놓으면 참나 드러나고 세상을 위함이 도리어 나를 이루는 것이라네 함이 있으면 함 없음으로써 되고 상 없는 모습이 진실로 온전한 것 나를 놓으면 참나 드러나고 세상을 위함이 도리어 나를 이루는 것이라네 무아에 대해서 관념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이 오도시를 가지고 가정에 당하면 가정에서 직장에 당하면 직장에서 세계에 당하면 세계에서 실천적 무아를 한번 정말로 조금이라도 체험해 보시는 생활 되시길 바라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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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은혜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