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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33,7-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8 가령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9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 제2독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3,8-10>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
수감된 형제들, 그리고 소년원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절실히 다가오는 한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저렇게 정이 많고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는 느낌입니다.
'저렇게 순박하고 의리 있는 아이들이 과연 무슨 일로…' 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지요.
다들 어찌 그리 단순한지 모릅니다.
다들 어찌 그리 잘 생겼고 또 어찌 그리 마음 씀씀이가 관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욱'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담장 바깥에 있는 우리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성격적 결함 중 하나가
한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스스로를 잘 조절해 나가다가도 단 한번에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평소에 그리도 여유있어 보이고 유유자적하던 우리지만
단 한순간에 내적 상태가 돌변하는 체험을 하지요.
딱 1분만 참았어도 되는데 그 순간을 못 넘깁니다.
한 번 비위가 상하고 마음이 틀어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서 얼굴은 즉시 싸늘한 냉기를 띱니다.
머리 위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느낌입니다.
라면이라도 끓일 수 있을 정도로 열을 받습니다.
그런 상태는 분명히 비정상 상태이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지능지수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입 꼭 다물고 시간을 버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걸 또 우리는 못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내뱉게 됩니다.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따놓은 점수를 완전히 다 까먹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 인간들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계셨기에
'뚜껑이 왕창 열리는' 긴박한 상황 앞에서도 한 박자를 늦출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논리적, 단계적, 이성적으로 접근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내게 몹쓸 말을 하는 사람, 기본이 안 된 사람, 눈꼴사나운 사람, 덜 되먹은 사람,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단 목소리부터 가다듬어야겠지요.
심호흡을 몇번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면 좋습니다.
최대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하면 좋습니다.
그것도 조용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나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순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지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참으로 소중한 덕입니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약점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면하는 노력,
이보다 더 큰 형제애는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지닌 한계를(특히 스스로 바라보지 못하는 취약점)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지적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형제에게 충고하는 과정에서 미성숙한 대화 기법이나 대화 문화로,
많은 경우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성숙한 대화 문화,
바로 예수님의 대화 기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이면서도 단계적, 이성적 접근,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 생활에서 상처는 필연적이라고 보면 정답입니다.
괴로운 것이 상처지만
결국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동체에서 받는 상처는 상호 성장의 장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상처는 상호 성화를 실현하는 장입니다.
성령께서는 상처와 고통을 당신 활동 장소로 선택하십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당부를 이번 한 주간 묵상거리로 삼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 혀를 하느님께 봉헌했으니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다치게 하는 말, 형제 가슴에 비수를 던지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 혀는 이제 봉헌된 혀이니
매일 주님께 찬미 노래를 드립시다.
앞으로는 우리 혀로 거룩한 말씀만을 선포합시다.
격려와 위로의 말만을 사용합시다."
- 살레시오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어제도 새벽 묵상 글에 적었지만, 지금 간석4동 성당은 한창 공사 중입니다.
특히 요즘 며칠 동안 성모동산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무허가 건축물을 철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완전히 무허가 건축물이 철거되면서, 성당이 무척 시원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철거하는 과정에서 소음도 문제였지만, 먼지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철거하면서 물을 계속 뿌려주기 때문에 먼지가 별로 날리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또한 먼지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지요.
하지만 공사장 근처에 세워있던 제 차를 보면서 먼지가 얼마나 많은 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글쎄 까만색의 제 차가 나도 모르게 어느새 하얀색의 차로 변했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그러나 이 먼지들이 모여서 까만 차를 하얀 차로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죄 역시도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죄가 바로 악으로 기울어지게 합니다.
주님의 자녀인 나를 점점 변화시켜서 주님보다도 마귀와 손잡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죄라도 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이 되어 끊임없이 경고하라는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주님의 세상에서 악에 대한 경고를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경고의 방법이 복음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을 때,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이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굴욕감을 주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도 그 사람이 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시지요.
물론 힘을 과시하고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니지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네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면서
주님께로 되돌아올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때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판결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교회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구체적인 경고의 방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늘어나는 죄인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님 곁으로 다시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러기 위해 사랑의 파수꾼의 역할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가지고 끊임없는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평일 미사 강론시간에 신부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입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바다는 어디일까요?”
신자들이 머뭇거리자 신부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곳은 ‘사랑해’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항상 따뜻한 바다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길 원합니다.”
이 강론을 들은 자매님께서는 평소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 듣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그래서 집에 가서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요.
그리고 남편이 오자 온갖 애교를 부리면서 신부님처럼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보. 내가 문제를 낼게요. 한 번 맞춰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래요.
그럼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어디일까요?”
남편이 답을 하지 못하자, 자매님께서는 온갖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이럴 때 당신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잖아!”
이에 남편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바다.”
하긴 ‘열바다’도 바다긴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은 ‘사랑해’였지요.
혹시 지금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말과 행동이 아닌,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주님을 계속 열받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그 사랑의 삶 안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늘나라 공동체>
"주님의 모든 업적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영원히 주님을 찬송하고 찬미들 하라."
오늘 주일 아침 공동성무일도 시편 기도는 온통 ‘주님을 찬미하라’였습니다.
아침 일찍 배 밭 곳곳에서 피어난 야생화들,
연노랑 달맞이꽃들, 남보라 달개비 꽃들,
모두가 침묵 중에 주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하느님 찬미로 표현되고,
우리 마음은 하느님께로 업그레이드되어 꽃처럼 활짝 피어납니다.
사막 같은 수도원에 사막의 꽃 같은 공동시편기도시간입니다.
어디 수도원만 사막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 함께 해도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사막입니다.
이래서 공동 기도입니다.
세상 사막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공동 미사 시간입니다.
수도 영성이 보편화되는 시대에,
사막 같은 공동체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공동 기도가
공동체를,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사막을 서서히 낙원으로 바꿉니다.
하늘나라 낙원 공동체,
바로 지금 사막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함께 기도할 때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싫든 좋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공동 기도가 제일입니다.
기분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항구한 의지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역시 함께 기도를 강력히 권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일치에 함께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더욱 좋고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도 꾸준히 함께 기도하다 보면
마음도 하나로 모아지기 마련입니다.
서로 간 땅에서 맺혔던 마음도 풀어져 하늘에서도 풀리게 되고,
어지러웠던 마음도 정리 정화되고 마음의 상처도 치유됩니다.
함께 계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여기 수도원에서 다 다른 수도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순전히 공동기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할 때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기도 다음에 사랑입니다.
기도는 사랑의 샘입니다.
기도할 때 사랑의 샘 하느님께 연결됩니다.
기도할 때 샘솟는 사랑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도 메마릅니다.
하여 하느님은 사랑이라 정의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우리의 존재 이유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병은 사랑 결핍에서 기인하기에 만병통치약은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할 때 충만한 존재, 넘치는 생명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저절로 사랑이 아닙니다.
기도는 물론이고 노력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저절로 좋아지는 사랑이 아니라 노력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농사 이치와 똑 같습니다.
심어 놓고 방치하면 채소 농사는 폐농입니다.
꾸준히 정성을 다해 가꾸고 돌볼 때 탐스러운 사랑덩어리 채소이듯,
끊임없이 돌보고 가꾸는, 노력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 사랑 공부의 노력은 끝이 없습니다.
누구나의 마음속에 하느님 심어주신 사랑입니다.
사랑 받고 사랑 하고 싶은 누구나의 본능이요,
이 사랑이 꽃처럼 피어나야 비로소 자아실현이요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위하는 것이 결국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 역시 나를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위하면 이웃 역시 나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하는 이런 견고한 공동체 아무도 다칠 수 없습니다.
그대로 하늘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이런 하늘나라 공동체의 사랑을 목말라 하는 사막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서로 충고할 때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상호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라 합니다,
칭찬하기는 쉬워도 충고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상처 받기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사감이 개입된 충고,
머리로 이해해도 심정적으로 거부하기에 아무리 옳다 하여도 효과는 기대하기 힘듭니다.
사랑에서 나온 충고가 제일이며,
이런 충고에는 누구나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니 충고 이전에 사랑의 내공을 쌓아 놓은 게 지혜입니다.
사실 충고도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상호 교정이 없는 사랑, 참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형제들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잘못에 대한 충고 예언자의 중요한 책임입니다.
주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부여하신 직무도 바로 이런 교정의 직무였습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운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 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이 나라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주님을 대신하여 경고해야 할 교회가 침묵하고 있다면
나라나 교회에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동체에도 이런 선의의 예언자가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 역시 상호 교정의 의무를 우리 모두에게 부여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는 것이다.”
공동체에 떠벌이지 말고
조용히 단 둘이 만나 해결을 보라는 주님의 지혜로운 조언입니다.
점차 어른들이 사라져가는 권위 부재의 시대일수록
진정한 충고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상호 교정이 잘 이루어지는 겸손한 공동체,
그대로 이 땅에서 실현되는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수도공동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형과 같습니다.
그 무슨 형태는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이요,
이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내 가장 가까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충고하십시오,
기도할 때 샘솟는 사랑이요,
사랑할 때 비로소 효과적인 충고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충고하는 공동체가 바로 하늘나라 공동체요,
우리 수도공동체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이상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이런 기도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충고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원장
* 배광하 신부님의 묵상글 *
<원한과 증오의 사슬을 푸는 법>
옥중에서 회개와 속죄의 삶을 살다 46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 베드로’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수였던 그에게 냉대가 아닌 끝없는 사랑과 격려, 충고로 함께 하셨던 ‘조 안나’ 할머니 덕분에
그는 회개와 속죄의 삶을 살게 되며 끝내 빛을 향하여 걷게 됩니다.
빛의 세계로 이끈 조 안나 할머니에게 그가 보낸 편지는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어 놓습니다.
“급강하한 기온은 보잘것없는 저 같은 인간에게까지 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에게 전해주신 참으로 귀한 묵주,
어머님과 함께 기도를 바치는 기분이어서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답니다.
묵주 덕분에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아 큰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총일 테죠?
하느님의 뜻에 감사드립니다.”
“올해에도 이승에서 사순절을 맞으며
부족한 저의 죄 값에 대한 보속을 조금이나마 더 키워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제겐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재의 수요일 아침 묵상을 하는 동안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워 못다한 지난 날의 삶을 되살려 보자는 묵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사랑의 참된 충고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 18, 15)
한 발 더 나아가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에제 33, 8)
그럼에도 우리는 이웃을 쉽게 단죄하며 마음으로, 입으로 죽이기만 하였지,
그가 다시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영영 그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말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참다운 충고에는 반드시 기다림의 인내와 사랑의 관용이 필요합니다.
늘 그의 처지에서 모든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뒤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였던 이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들도 하느님 눈에는 더 없이 귀중한 자녀이고,
그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읍’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평화로웠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을 다녀온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스라엘이나 아랍 세계나 한결같이 보수 정통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종교인’일수록
무력 전쟁만이 평화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화가 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피는 반드시 피를 불렀고, 원한은 더 큰 원한을 쌓아 갔습니다.
그것이 증오의 인간 역사였습니다.
이같은 원한과 증오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용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온 몸을 내어던져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자손인 인류는 끊임없는 전쟁을 저질렀고,
그 추악한 전쟁 중 끔찍한 전쟁은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는 모든 종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와 생각이, 사상이, 이념이, 신앙이 다르다고 단죄했던 증오의 사슬을 이제는 풀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증오의 사슬을 묶었던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사랑이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분명 사랑이 승리했던 역사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프로이센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 2세’(1712~1786)는
왕의 자리 등극 후 많은 청원서와 진정서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가톨릭 교회와 관련된 청원서를 진정 화해와 관용과 용서로 풀었다고 합니다.
가톨릭을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 신봉 대신들은
프로이센에서 로마 가톨릭 학교를 폐쇄시키자고 청원합니다.
프로이센은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젊은 왕은 청원문의 여백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종교는 모두에게 허용되어야 하고,
감독관은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에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원한과 증오의 사슬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신약의 율법 사랑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 13, 10).
- 춘천교구 '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
* 이기양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입니다>
이런 말 들어보셨는지요?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
한 마디로 참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특히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누가 악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나쳐서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경고하지 않은 사람에게 죗값을 묻겠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마태 18,15)하고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타일러도 말을 잘 듣지 않고
선생님이 학생을 야단치기라도 하면 봉변당하기 쉬운 시대가 요즈음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잘못된 길을 가는 이에게 바른 길을 가도록 충고해야 할 의무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지혜롭게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을까요?
신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는 동안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2년을 지내면서 앞날이 혼미하던 그 시절,
답답한 마음에 어떤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1년 반을 지냈는데
어느 날 새벽 4시쯤 집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담을 넘어 들어가니 어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왜 담을 넘어오느냐?
벨을 누르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줄 터이니 다시는 담 넘어 다니지 말거라."
어머니께서는 이 말씀만 하시고는 두말도 없이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말씀이셨지요.
그 다음부터는 밤늦게 다니지 않았습니다.
충고라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되는 것이지요.
오늘 제2독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로마 13,8)라며
사랑이 충고의 정신임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 이야기를 아시지요?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습니다.
그리고 이 빵 한 조각 때문에 수감과 탈옥을 반복한 끝에 19년간 중노동을 선고받고 출소하지만
전과자란 낙인 때문에 어디도 몸을 두지 못하고 미움과 적개심만을 키우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의 안내로 밀리에르 신부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을 성당에서 묵게 됩니다.
신부는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합니다.
장발장은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접에 감격하게 되고 양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나 신부가 잠든 사이 장발장은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은 접시를 집어 들고 도망칩니다.
경찰에 붙잡힌 장발장은 성당으로 끌려오지요.
"신부님, 혹시 은 접시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이 성당에서 훔친 것 같아 검문하다가 잡아왔습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장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신부님이 대답하지요.
"아닙니다.
그 접시는 내가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은촛대까지 그에게 가져가라고 쥐어줍니다.
그 날 이후 장발장은 딴 사람이 됐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열심히 일해 백만장자가 되고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지요.
충고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충고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가르침이지요.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 서울대교구 10지구장 겸 공동사목 오금동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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