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방송 심의팀으로부터 자막이 틀렸다는 지적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장면’을 ‘짜장면’으로 넣었다가는 심의팀의 칼날이 바로 떨어지고, ‘빠가사리’도 ‘배가사리’라고 써야 맞습니다. (‘배가사리 매운탕’ 하면 누가 알아들을지 의문입니다만.) 또 하나, 저를 심의팀의 제물로 만들었던 단어는 돈가스입니다. 입버릇대로 자막에 올렸던 ‘돈까스’가 표준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실에 있는 ‘할아버지 돈가스’라는 이름의 돈가스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 주인은 할아버지 되려면 족히 20년은 걸릴 듯한, 나이 마흔 가량의 젊은(?) 분입니다. 사연인즉슨 이 가게의 원 주인이 백발의 할아버지셨고 그래서 할아버지 돈가스라 불리운다지요. 그러고보니 가게의 벽에는 하얀 옷과 모자를 두른 노인장의 사진이 실린 신문 기사들이 몇 개 걸려 있더군요.
“아버님인가요?”
“아닙니다. 제게 이 일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대충 섭외하고 촬영 시간을 정하는데 이 아저씨가 고집을 부립니다. 소스 만드는 걸 찍으려면 새벽 4시에 이곳으로 오라는 겁니다. 저는 사람 좋은 웃음을 그리면서 방송이라는 게 꼭 원래 그대로만 찍는게 아니며 한 열 시쯤 와서 소스 끓이는 폼만 찍으면 된다고 타일렀는데 이 아저씨 단호합니다. “그럼 소스 끓이는 거 못 찍는 거지."
다음날 꼭두새벽, 아무도 나오지 않은 지하상가의 한켠에서 불을 밝힌 채 브라운 소스를 휘젓고 있는 주인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고집도 어지간하시다고 불평반 푸념반 했더니 주인 왈 “할아버지가 고집이 셌거든요.”
할아버지와 똑같아지는 것이 주인의 지상목표였습니다. 밀가루를 입히는 양, 기름을 갈아 주는 횟수, 소스의 농도, 고기 튀기는 시간은 물론, 가게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고기를 다지는 모양새까지 할아버지를 흉내낸 거라고 했지요. 음식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돈가스 안주에 맥주 한 잔’을 찾는 손님들의 요구마저 단호히 거절하고 있었지요. 술을 팔지 않는 것이 할아버지의 영업방침이었다는 겁니다.
하이얀 밀가루 옷을 입은 나비 모양의 등심살이 노릇노릇 튀겨지면, 새벽 내내 끓여낸 소스가 탐스럽게 얹혀서 손님들의 테이블에 오릅니다. 그런데 코흘리개 어린아이부터 포크를 삼지창이라 부를성싶은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손님들의 절대다수는 이 집 주인이 할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더군요.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 머릿 속을 스치는 게 있었습니다. 이 주인이 할아버지의 유명세를 빌려 장삿속을 차리려는 심사가 아닐까,
'할아버지의 이름으로’를 모토를 삼고 작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죠. 빙빙 에둘러서 제 속내를 주인에게 드러내 보았더니 그는 성큼성큼 가게 구석으로 가서 뭔가를 들고 왔습니다. 그건 눈에 띄게 낡은, 의자 하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딱 이 자리에 이 의자 놓고 앉아서 눈 부릅뜨고 일 가르쳤죠. 하루는 새벽부터 아침까지 겨우 만든 소스 열 통을 버리라는 거예요. 하도 기가 막혀서 왜 버려요 팔면 되잖아요 하고 반항을 했어요. 그랬더니 소리를 지르데요. 내가 처먹기 싫은 걸 손님이 처먹냐? 내가 먹기 싫은 음식을 손님들한테 왜 줘? 이렇게 할 거면 ‘치아라’ 때려 ‘치아라’ ”
주인은 마치 할아버지가 된 듯 의자에 앉아 그 호령을 재연했습니다. 어색한 경상도 사투리를 써 가면서 (할아버지의 말투가 그랬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된 듯 눈까지 치뜨고 말입니다.
잠시 후 주변 스케치를 하고 돌아와보니 주인이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리하는 방법에 삶의 방식을 더하여 전수해 준 스승님 강예수씨의 사진이었습니다.
혼자 장사하면서 힘들고 귀찮고, 때로는 욕심이 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가 내지른 ‘치아라(치워라) 치아라’가 귓가에 잉잉거렸다지요. 돈가스 할아버지 강예수씨는 당신이 앉았던 낡은 의자로 당신의 호령을 기억하는, 그래서 의자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제자를 자신의 터전에 남기고 어딘가로 떠났고 그 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 없는 ‘할아버지 돈가스’는 한 올의 변화 없이 찾아드는 손님과 세월을 맞고 있었습니다.
'돈가스 할아버지’ 강예수씨의 이야기가 방송된 후 사무실에는 수많은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새벽부터 끓여낸 소스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무조건 수챗구멍에 버려 버렸다는 깐깐한 스승, 웬만하면 그냥 팔자는 제자에게 "나 먹기 싫은 걸 손님이 먹냐?"고 날벼락을 내렸던 스승, 그와 헤어진 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호통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제자의 사연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나 봅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저기요. 어제 방송 나간 돈가스 할아버지 말인데요."
"아.. 그 분은 저희도 연락처를 모르거든요."
"제가 그 연락처 아는데요?"
다름이 아니라 문제의 할아버지 강예수씨가 지하철 8호선 수진역 지하상가에서 지금도 돈가스를 만들어 팔고 있는데 멀쩡히 장사하는 사람을 행방이 묘연한 것처럼 방송을 하냐는 항의였습니다. 그 고마운 항의 덕분에 저는 사진으로만 봐도 그 깐깐함이 피부에 와 박혔던 돈가스 할아버지를 실제로 만날 수 있었지요.
“마누라가 갑자기 죽어 버렸어. 모든 게 귀찮더라고. 그래서 가게도 넘기고 고향 가서 살라 캤지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곧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돈가스며 샐러드를 곱게 얹은 위에 모락모락 김이 솟는 소스를 그득히 내리부을 때의 손맛과, 탐스럽게들 먹어 대던 단골들의 영상이 그를 사로잡았던 게지요. 그런데 그는 20년 넘게 터를 잡고 장사했던 자신의 옛 터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일흔을 훌쩍 넘겨서 생소한 곳,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새출발을 한 것입니다. "둥지를 떠난 새가 옛 둥지를 찾을 일이 없지예”라면서요.
‘내가 잘하면 사람들은 온다’는 신념으로, 그는 그예 해 왔던 대로 돈가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념은 이미 명품을 만들어내는 늙은 장인의 긍지로 격상되어 있었습니다. "1926년생 국내 최고령 주방장"
돈가스 할아버지는 옛 제자의 눈에 비쳤던 그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며느리조차 맛 떨어진다고 음식에 손을 대지 못했지요. 일절 술을 팔지 않는 방침도, 먹성 좋은 청소년들한테 유달리 후한 인심(학생용 돈가스는 500원이 쌌지요. 양도 많고)도 그대로였습니다.
“와 학생들을 좋아하냐고예? 내가 애써 만든 음식 남기는 일이 없거덩. 참 잘 묵어예. ”
음식에는 깐깐했지만 사람에게는 절대로 깐깐하지 않은 할아버지의 가게엔 다양한 교복의 학생들이 언제나 진을 쳤고, 그들은 마치 친할아버지 가게에 온 양, 응석을 부리며 허물없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할아버지 나 기말고사 망쳤거든. 돈까스 2인분같은 1인분 줘요.” “얘 미팅에서 딱지 맞았대요.” “미팅이나 시험이나 다음에 잘하면 되지. 아나 더 묵어라.”
흐뭇한 촬영을 끝내고 카메라를 주섬주섬 챙겨 넣을 무렵, 할아버지가 분주한 손길을 멈추지 않으며 제게 물어 왔습니다. “내가 이 일을 와 한다고 생각하능교?”
“뭐 긍지 아니십니까? 대한민국에 나보다 나이 많은 주방장 있나 하는.....”
“그것도 맞지만, 요즘은 좀 미안한 맘이 더 커요. 지난 번 IMF 때도 그렇고, 요즘 일하고 싶어도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데. 나는 우쨌든 이 나이 되도록 하고 싶은 일 하니 행복하지만 또 미안한 거라. 미안하니까 음식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혹 그런 사람이 우리 집에 오면 나를 보고 힘을 냈으면 싶은 마음인기라”
갑자기 꺾어진 칠십에 몸이 전같지 않다느니, 세월 정말 빠르다느니 애늙은이 행세를 간혹 했던 조각조각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여직 저 또래의 누구보다 더 젊은 할아버지의 백발을 제대로 쳐다보기조차 어려워지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젊은 할아버지 강예수씨는 부끄러이 인사하며 나가는 제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PD양반, 내가 새 메뉴를 개발하고 있거덩. 한 한 달 뒤에 와 보소. 맛있을 끼라.“
두 곳의 '할아버지 돈가스' 집의 추억을 한 모금 마시면서 저는 조금 깔깔한 교훈들의 뼈다귀가 제 목구멍에서 걸리는 걸 느꼈습니다.
잠실의 할아버지 돈가스집에서, 제자에게 내려친 할아버지의 호통은 그야말로 유치원에서 다 배웠으며 국민윤리 교과서에도 '역지사지'로 나오며 성경 말씀에도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맥락이었을 겁니다. 내가 먹기 싫은 걸 어떻게 남한테 내밀 수가 있느냐. 그리고 이 질문은 역으로 이렇게 돌아오겠지요. 남한테 먹일 음식을 어떻게 내가 하찮게 만들 수 있느냐....... 그 평범한 이치를 저는 잘 알면서도, 아니 아주 잘 아는 체하면서도 때로는 게으름 때문에, 혹은 돈 때문에, 눈 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또는 쥐꼬리만한 우월감 때문에, 별 것도 아닌 호승심(好勝心) 때문에 자주 까먹습니다.
성남 수진역의 할아버지 돈가스 집에서 마주친, 한 노인이 고집스레 쌓아올린 긍지의 탑도 감동적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긍지의 이유가 오로지 깐깐한 노인의 "국내 최고령 주방장" 슬로건 뿐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일하는데 요새 젊은 것들 하는 꼬라지...."등등의 훈계였다면 감동의 크기는 반으로 줄었을 겁니다. 할아버지가 제게 선사한 반절의 감동의 요체는, 내가 이러하다, 저러하다는 긍지, 나는 이러한 '급'의 사람이다는 프라이드란 그 급수 아래의 사람들을 깔아볼 제가 아니라, 자신의 체급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을 돌아볼 때 더욱 빛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 여든이 다 되도록 주방을 떠나지 않고 고기를 튀기고 소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