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 마틴 로이드 존스 -
제 1 장 구원 가장 큰 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히2:1-4)
1.이 네 구절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다가오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성경 전체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바, 매우 심각하고도 엄숙하며 긴박한 어조를 띠고 있는 것이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3:7, 눅3:7).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막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5, 막4:9). 이것은 다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시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2:40).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17:30-31).
1) 그리스도의 복음과 히브리서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들은 것에 유념하길 촉구하고 있다. 유념하라는 것은 전적으로 집중하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행16:14,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유념하게) 하신지라” 루디아는 바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잘 살펴보고 생각해 보았다. 앉아 듣다가 일어나면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루디아는 복음 메시지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깨닫고 그 메시지에 유념했다.
2)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에 사용한 또 다른 표현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배가 목적지인 항구가 빤히 보이는데도 항구에 이르지 못한 채 조류에 떠밀려 자신도 모르게 떠내려가는 것은 아주 안타깝고도 심각한 일이다. 복음을 접하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어쩡쩡하게 있다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내려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나오는 복음의 경고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동일한 경고를 하셨다. 복음을 듣지만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새가 채 가서 그대로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3) 세 번째 표현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이다. 다른 일에 정신을 파느라 구원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등한히 여기”다가 떠내려가는 것이다. 복음에 관심과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진리를 등한시하는 것이다.
성경은 도처에서 이 세 가지 위험을 피할 것을 권면하며,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유념할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세상은 반대로 하고 있다. 생각 없는 자들은 물론이지만, 생각 있는 자들도 그러하다.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세상의 현 상태를 놓고 절박하고 심각하게 염려하나, 복음에는 들을 만한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망해 가는 세상에 살면서도 이 간곡한 권면을 듣지 않는다.
2. 우리는 왜 복음을 들어야 하는가? 현대 세계에서 오직 우리만 인간 문제의 유일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독특한 주장을 인류 앞에 내세워도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음 세 가지 이유는 곧 히브리서의 세 가지 주제이기도 하다. 이 네 구절 자체가 히브리서 전체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복음의 원천 내지 권위에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복음을 믿지 않고 유념치 않는 자들의 위험하고 우려스러운 상태와 위치에 있다. 세 번째 이유는 복음의 본질 내지 특징에 있다.
1) 이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기 전에 지금 다루는 복음의 내용에 동의하는지, 복음의 내용 자체를 알고 있는지부터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① 사람들은 인생에서 실패하거나 어려움에 빠질 경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및 교회 쪽으로 생각이 기울 수 있다. 그런 생각은 바른 복음에 근거한 것이 아님에도 마귀는 마치 바른 복음에 근거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잘못된 종교적 관심을 갖도록 부추긴다.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고 위기에 처한 사람이 늘 빠지기 쉬운 위험이 이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은 믿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들은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많다. 이것은 영혼이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위험 중 하나이다.
② 또 자신에게 특별히 와 닿는 일부 측면을 진리의 전부로 여기며 붙잡는 자들도 있다. 세상에는 행복을 찾는 이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한 가지 목표나 소원에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들으며,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 같은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아내어 그 구절들에서 행복을 느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착각한다. 세상에는 행복을 약속하는 사교나 단체들이 많다. 심리학이나 철학의 한 이론을 고수하면서도 성경 구절을 몇 가지 사용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체험이야말로 진정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되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자기 가르침을 제시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걱정에서 벗어나 더 행복해졌다 해도 여전히 비그리스도인의 자리에 머물 수 있다.
③ 인도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자들도 많다. 모든 사람이 당면한 문제는 “무엇을 할까? 둘 중 어느 길로 갈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펼쳐 인도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 원하는 것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들은 십자가의 희생제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삶의 인도를 받는 한 가지 방편에 불과하다.
④ 육신의 치료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자들도 있다. 건강을 향한 갈망은 보편적인 삶의 특징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위험이 따른다. 복음을 한낱 치료의 방편으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오로지 건강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한 치료의 방편이 되어 버린다.
⑤ “초월자와 조화를 이루고 싶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우주의 중심과 일체감을 느끼길 원하고, 그런 암시가 있다는 이유로 성경을 찾으며 오직 그 부분만 뽑아낸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비주의를 신봉하며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서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기본요소는 무시해 버린다.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이자 종교 사상계의 선구자로 가끔 예수를 언급하는 것이 고작이다.
⑥ 선한 삶을 인생의 중대 관심사로 삼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로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만, 영원한 영혼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도덕에 관한 내용만 취하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린다.
이제껏 논한 위험들에 빠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그 자체로 잘못된 접근법이 되는가? 이 모든 것에 선행하는 일이 있다. 복음의 중심 메시지를 먼저 믿어야 복음의 축복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따라온다.
2)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들은 것”, 이미 들은 특정한 사실들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할 나위없이 명확한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가장 먼저 전하시고 사도들이 이어 전한 메시지이다. 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메시지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전체를 다 전해야 한다. 일부만 취하고 나머지를 무시할 권리가 없다. 복음을 전체를 전하지 않으려면 아예 전하지 말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 단순한 치유나 윤리나 위로가 아닌 메시지 전체, 신약성경이 말하는 특정 메시지의 핵심을 가리킨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사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주님께 받은 것이요 성경의 메시지요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메시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구원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3.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질문은 “이생과 영원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것이며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쟁으로 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분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러분에게 불멸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 여러분은 죽어야 하고 죽은 후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선고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다. 마귀는 부차적 문제를 일차적 문제와 맞바꿈으로써 결국 일차적 문제를 다루지 못하게 만든다.
슬픔을 통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인 토머스 차이즈는 대단한 사역을 하던 중 병에 걸려 거의 일 년 동안 병실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으로 설교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참으로 믿은 적 또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와병을 감사드렸고, 이후 새로운 능력으로 복음을 설교하며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다. 부차적인 문제를 일차적인 문제와 맞바꾸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은 없다.
여러분이 이런 위험에 빠진 것인지 알아보는 시금석은 이것이다.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복음 아닌 무언가를 고수하는 것은 아닌지 알아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첫째, 자신이 아무 소망도 없고 힘도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 길을 잃은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비범한 체험을 했더라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임임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둘째, 여러분의 삶의 체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중심과 핵심을 차지하고 계시는가? 예수와 무관하게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에서 그가 중심에 계신지 묻는 것이다. 신자들이 “들은 것”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중심을 차지하시는 분이다.
셋째, 더 구체적인 것으로 여러분에게는 십자가 죽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건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다(고전2:2). “들은 것”, 즉 진리 안에 들어가려 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중심적이고 긴요하며 절대적인 사건이 된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보라. 그가 전한 진리와 바울이 전한 진리, 신약 모든 서신서의 주장이 이것이 아닌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피가 아닌가?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것은 이와 무관한 복음은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 죽음에 관심이 있는가?
- 다시 엄숙하게 말한다.
자기 행복을 생각하기 전에, 걱정에서 벗어나길 바라기 전에, 마음의 위로를 갈망하기 전에, 인도를 구하기 전에, 몸의 치료를 구하기 전에, 초월자와 조화를 이루길 바라기 전에 자신의 영적 상태부터 직시하라. 우리는 다 덧없고 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여러분은 살아 있는 영으로서 마지막 날을 향해 피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구원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가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가 되어 주신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종말을 준비하라. 자신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하나님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세상에 오셔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시고 날 의롭다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 이 영혼의 필요를 채우지 않은 채, 작은 필요들을 일시적으로 채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