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원 향교를 나와 깨끗하게 다듬어진 1021번 지방도로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작은 고개를 넘으면 파릇파릇한 보리 싹들이 겨울을 보내고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민 작은 들판이 보인다. 들판 건너편 작은 마을, 칠원면 용정리에 문화재자료67호 덕연서원(德淵書院)이 있다. 도로에서 안내판을 보고 들어서면 용정리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이정표가 없으나 중앙에 있는 길을 따라 가면 근래 산뜻하게 단장된 서원 주차장이 있다.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명현(明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교육기관이다.
덕연서원은 주세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주세붕(1495∼1554)은 조선 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주로 홍문관과 성균관 등 학문기관의 관직을 지냈으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다.
덕연서원은 선조 24년(1591)에 동림서원으로 세워졌고, 숙종 2년(1676) 4월에 덕연(德淵)이란 이름을 나라로부터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뒤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가, 1964년에 다시 세웠다.
서원 안에 있는 건물로는 강당, 뒤쪽 높은 곳에 존덕사(尊德祠)가 있고, 덕연별사(德淵別祠)는 별채이다. 교육 공간인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존덕사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나 원래 주춧돌이 남아있는 규모보다 작은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안쪽에는 주세붕의 위패가 있고, 존덕사 왼쪽에 위치한 덕연별사에는 제자 다섯 사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인근에 사는 박태묵(69)씨가 서원과 관련이 없는데도 관리인 역할을 하고 있어 서원은 잘 보존되고 있다.
덕연서원을 나와 1021번 지방도로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광려천을 건너면 유원리이다. 유원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10여 개의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마을 안 야촌교 부근 양지바른 곳에는 노인들이 모여 담소를 하고 있었다. 칠원산성의 위치를 물어보자 개발위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황순성(67)씨는 당국이 칠원산성을 파괴했다고 성토부터 했다.
마을 주민들이 유원초등학교에 모여 칠원산성 파괴 결사반대 궐기대회를 하고 산성까지 행진을 했는데도, 지금도 대산면 쪽에 있는 한 레미콘 공장 채석(採石)장에서 산성까지 산을 훼손을 하고 있다고 했다.
노인들을 뒤로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농부는 봄 농사를 위하여 퇴비를 말리고 있고, 목련은 수줍은 듯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순성씨와 유원마을을 벗어나 장암방향으로 100m쯤 가니 대곡교 옆에 문화재자료 202호 칠원산성(漆原山城)을 알리는 안내판이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내판을 따라가면 임진왜란 때 사용되었다는 산성을 찾기는 어렵다. 100m쯤 더 가면 유원- 장암 도로 확장포장공사 현장 사무실이 있다. 현장 사무실 앞에서 하천을 건너 계곡 옆으로 비스듬히 난 길을 따라 올라 가야한다. 산성이 있는 해발 250m의 산 8부 능선에 올라서니 산아래 대산면 쪽 레미콘 공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산등성이를 따라 가니 녹색 철조망이 키 높이로 정상부근까지 뻗어 있었다. 마을 노인들이 분노하면서 말한 것처럼 철조망에는 「칠원산성 절대보존」이란 빛 바랜 리본들이 무너져 가고있는 산성을 속절없이 바라보며 봄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산성은 총 길이가 450m이고, 동서의 길이가 180m, 남북 길이가 57m인 돌로 쌓은 타원형이라 하지만, 잡목더미에서 성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산성을 쌓을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돌덩이들이 흩어져 있는 정상부근까지 산은 무참하게 수직으로 잘려져 나가고, 절벽 아래 공장에서는 계속해서 중장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문화재자료가 이처럼 무참하게 훼손될 수가 있단 말인가! 마을 주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이해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관계당국은 차라리 사라져 가는 산성을 보존할 수 없다면 지정 문화재에서 해제하라.
심재근(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