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복음
성경 말씀: 시편 118:14-29; 로마서 1:16-17
요약
예수님으로 구원은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생명으로 오심으로, 생명의 구원이 말해지게 됩니다. 여기 예수님이 복음서에 생명으로 서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구원은 개인들은 그들의 태어난 생명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태어난 생명으로부터 예수님의 생명으로 구원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세상의 좋음
세상에 사는 사람은 위기에 처할 때 구출되기를 원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해주세요!”는 구출되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나쁜 상태로부터 좋은 상태로 이끄는 것은 구출로 말해집니다. 구약에 출애굽은 구출의 여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구출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시고 그를 축복하셔서 구출의 삶을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맺은 언약의 삶은 세상 삶 가운데 구출된 삶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적자가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신 것과 그들의 삶을 위해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길 약속하신 것은 세상 삶으로부터 구출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로부터 이어지는 그의 후손이 유랑하는 삶을 살지 않게 하셨습니다.
옛 언약으로 전개되는 삶은 조건적임으로, 옛 언약의 삶은 하나님의 힘에 의한 구출의 내용을 포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건적인 삶에, 조건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따라서 옛 언약은 하나님의 힘에 의해 이끌어집니다. 조건적인 삶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힘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그분의 사역을 개시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함께의 좋은 소식을 알리십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함께에 근거합니다. 사역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함께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함께에 근거하니,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의 함께로 이루어질 새로운 삶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근거한 조건적 삶의 변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조건의 임함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새로운 조건의 임함을 선포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함께에 근거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조건으로 명시되는 세상 나라와 다릅니다. 세상의 조건과 무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조건적 나음이나 구출로 말해지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세상의 조건에 처한 세상 나라의 삶과 무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은 세상 조건의 나아짐이나 구출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이 달라지거나 변했다고 말해지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셨다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다렸던 메시아로 오심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는 그들을 독립된 나라에 살도록 구출할 분입니다.
하나님 함께의 좋은 소식은 세상의 나은 소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좋은 소식은 좋은 조건으로 말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부터 좋은 소식은 하나님 함께의 소식입니다. 하나님 함께의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소식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구원의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구원의 알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구원의 삶을 위해 그분 사역을 하십니다. 즉 세상의 구원자로 일하십니다. 복음, 곧 예수님의 이야기는 구원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말해지거나 구원이 하나님 나라로 말해질 때, 구원은 구출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출자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를 구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출은 세상 상황에서 말해집니다. 그러나 구원은 세상에 임합니다.
구원은 세상의 나아짐으로 표현되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이들은 단지 세상의 나아짐을 바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으로 구원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출자일 것을 바랐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직면한 상황에서 바라기 때문에, 언제나 구출자를 기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지 구출자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이는 구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것은 구출일 수 없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처형됨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출자로 보아질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구원을 뜻합니다. 구출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나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함께는 세상의 변화 요인으로 설정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함께를 온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세상의 사태에 설정되게 되지 않는 새로움입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구원의 서사로 전개됩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함께는 명시적 새로움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함께는 세상 일이 아닌 예수님의 이야기로 말해집니다.
여기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함께를 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가 세상 사태와 연계되면, 세상의 나음에 결부되게 됩니다. 구약에 그렇게 보입니다. 세상에 사는 이들은 단지 나음만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새로움, 곧 구원을 부각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일로 서사되지 않고 하나님의 함께로 서사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 세상의 나은 삶이 아닌 구원이 말해집니다. 즉 예수님의 이야기로 구원의 새로움이 보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예수님의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서사됨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또한 구원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같이 세상 조건에 종속된 분으로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손은 세상 조건에 종속되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 조건에 종속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의 이야기는 그들이 직면한 조건으로 전개됩니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가 직면한 조건을 개선하는 성취로 부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보이는 것은 세상의 성취가 아닌 세상의 구원입니다.
영적 구원
예수님은 세상 조건에 종속된 분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한 생명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구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서사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 생명입니다. 여기 요한복음이 성육신을 말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구원은 나은 조건이 아닌 새로운 생명을 위함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3:16에서 잘 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은 예수님으로 말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옛 언약에서 기대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옛 언약으로, 단지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의 나은 삶이 기대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은 예수님으로 이야기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말입니다. 그런 새로운 말로 맺어지는 언약은 새 언약입니다. 그것은 옛 언약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새 언약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언약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예시적으로 보입니다.
새 언약은 조건적 구출이 아닌 생명의 구원으로 서사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름이나 믿음은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즉 개인으로 구원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개인의 구원은 그의 상황으로 말해지니, 구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이나 믿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은 영적입니다. 하나님과 함께는 영성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성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는 영성을 떠나 말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구원은 영적입니다. 구원은 육적으로 사는 개인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면, 종교에 몰입되게 됩니다. 종교는 어떻든 개인성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개인성을 누리는 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개인으로,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교회로 말해집니다. 이것은, 개인이 교회 다니면 구원될 것이라고,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삶은 교회로 이루어집니다. 혹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교회로 이루어집니다. 영원한 생명은 교회로 보입니다. 개인들로 보이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삶은 교회로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경우 교회는 세상 조건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성령님의 열매를 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성령님의 열매로 맺어집니다.
구원은 교회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교회로 이루어집니다. 교회로 삶은 영원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물론 교회는 사람에 의해 기관으로 굳혀지지 않습니다. 기관으로 교회는 개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살지만 좋아짐으로 살지 않고 구원으로 살게 하옵소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앎으로 말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으로 예수님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세상에서 구원을 말하게 하옵소서.
넘치는 세상의 앎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들려지게 하옵소서.
복음으로 들려지게 하옵소서.
구원으로 들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