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00 까지 사가정역 4번출구에서 나와 사가정공원에서 각 동아리장 및 지도교사와 만나 출석을
확인하고 각 동아리별로 등반 시작
- 항상 놀토때는 10시나 11시에 일어났었는데 모꼬지 활동이 있는 날이어서 7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8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에 전날에 조봉암 선생과 한용운 선생에 관한 출력물을 읽으면서 갔더니 금새 사가정역에
도착하였다. 사가정공원에 가보니 벌써 온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 '꿈말 사람들' 동아리 아이들이 먼저 다와서 우리가 먼저
출발했다.........힘든 용마산과 아차산을 향하여.....
` 10:20 에 죽산 조봉암 선생 묘소 앞에서 헌화 및 참배
- 이것이 내가 죽산 조보암 선생에 대해 조사해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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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창녕(昌寧). 호 죽산(竹山). 인천 강화(江華)출생.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졸업,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
上海]를 거쳐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
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여 문화부책(
文化部責)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遠東部)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8 ·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
民戰議長)에 취임하였다. 1946년
박헌영(
朴憲永)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되었다. 그 해
진보당(
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59년에 처형되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 10:40 에 만해 한용운 선생 묘소 앞에서 헌화 및 참배
- 한용운 선생에 대한 조사 내용이다
=>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출처] 한용운 [韓龍雲 ] | 네이버 백과사전
-일제에서 독립할려는 노력을 감사하며 우리는 참배를 하였다.
` 11:00 에 각 동아리별로 하산 시작
- 아마도 이번 활동 중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던 같다. 왜냐하면 선생님을 따라가는데 길을 헷갈리시고...
너무 뒤에 있는 아이들이 안챙기면서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길도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
내년에 모꼬지 활동을 하는 후배들을 위해서는 경로를 다 알고 뒤쳐지는 애들도 봐주면서 하산했으면 한다.
` 13:00 에 점심식사(호박가든:어린이대공원 후문 주차장, T.455-7000~1)
- 하산하는게 정말 힘들었는지 부대찌개가 아주 꿀맛이었다. 두 공기 먹을라고 했지만....아직 많이 어색해인지 참고 슈퍼에서
과자를 사먹은 기억이 난다. 나중에는 배고프면 배부를때까지 먹어야겠다. 나름 아쉬었다....
` 14:00 에 체육대회 시작(2인3각 릴레이, 신발 날리기 대회, 피구, 등 5종목)
- 우리 동아리에 남자애들이 별로 없어서인지 우리 동아리가 많이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우승하지 못한 가장 큰 문제점
은 우리끼리 서로 친해지지 않아서 인 것 같다. 어색해서 서로 나서기가 그랬다. 그래도 조금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긴되었
다고 생각한다.
` 16:00 에 시상식과 마무리
` 16:30 에 해산
- 아마도 우승팀은.....기억이 안난다. 우리 동아리 우승하지 못해서 아쉽긴하지만 나중에 또 이런 활동이 있다면 꼭 우승할 것이
다. 집에 가는데 너무 피곤해서 지하철에서 잘뻔했다. 아마도 등산때 체력 소모를 크게 한 모양이다.
나중에도 이러한 모꼬지 활동을 또 했으면 좋겠고 내후년에도 전통처럼 항상 했으면 좋겠다.
첫댓글 모꼬지 활동은 또 있단다. 어색해 하지말고 밥 두공기먹지ㅠㅠ
형승이가 적극적으로 해준다면 다음에는 우리 동아리가 꼭 우승할듯... 고생많았다^^
저 동북고등학교 2학년 4반 32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