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오미(고산리)에 터를 잡았던 파평인 윤문(1547-1628)의 후손들이 18세기에 개척한 마을로 지형이 매화가지 처럼 생겼고 마을 앞 유등천에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목화재배도 성하여 화지라 칭함.
고산리
이곳 동신제문에 의하면 진주강씨가 이곳을 개척하였고 그 후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때 파평인 화음윤문(1547-1628)이 이곳에 내려와 살다가 마을 앞 들 가운데 외딴산을 독산 또는 오미봉이라고 하는데서 마을 이름도 독산 또는 오미라 칭함 1850년(철종1)에 고산으로 개칭.
성평리
고려 충선왕때 정승 예천부원군 권한공과 그의 아들 조선 태종때 영의정 예천백 권중화 등의 집이 이곳 후평에 있어서 삼정승 팔달관이 나왔으므로 삼덕팔달을 칭송하여 덕달이라 칭함. 그후 18세기 전반에도 순흥안씨가 들어왔다. 1840년경에 경주이씨가 고산동에서 성지버들로 옮겨와 살면서 성주동이라 하다가 덕달로 이거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평동과 고산동 일부를 병합하여 성주와 후평의 이름을 따서 성평이라 칭함.
광전리
임진왜란(1592)전 가평인 이춘백이 이곳에 피란와서 살때 넓은 평원이 손기리까지 뻗쳐 있었다 하여 넓은 밭이라는 뜻으로 너밭(광전)이라 함.
병자호란(1636)후 서울에서 피란을 온 참판공 송계당 남양 홍만적(1660-1733)이 다시 개척하여 광전이라함.
손기리
1462년(세조8)에 예안인 김자가 개척하여 뒷산에 향기로운 손초(난의 일종) 가 많아서 손골(손동)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손동과 장기를 병합하여 손기라 칭함.
수심리
원래 지만사가 있었던 곳으로 임진왜란(1592)을 전후하여 김해김씨가 지만사 근처 산위에 마을을 개척하였고 이곳은 화기가 있어 불이 자주 일어나므로 그 산아래 물이 깊게 괸것(수심)같은 지형을 찾아 음지쪽으로 마을을 옮겨서 음지마을이라고도 하고 물이 불을 이긴다는 오행설에 따라 무리피라(수심)함. 1730년(영조6)경에 무리피의 후손이 지만사 터에 새로 마을을 개척하여 지만이라고 함.
송전리
솔밭(송전)에서 가장 일찍 사람이 살았고 솔밭 또는 송전이라 함. 18세기초에 인동장씨들이 지심을 개척하였고 18세기 후반에 영일 정씨들이 명당곡을 개척하였음. 도한 18세기 말에 영일 정씨가 새마을을 개척함.
중평리
18세기 초 파평윤씨가 개척하여 넓은 들판 가운데 이루어진 마을이어서 중평이라 함.
죽안리
임진왜란(1592년) 청송으로 피란온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후 18세기 중엽에 경주 최씨가 청송에서 이웃한곳에 또 대나무 숲을 헤치고 개척하여 이랑이 긴밭을 이루고 장평이라 함.
그 후 평해 황씨가 죽안을 개척함. 대나무가 언덕에 많다하여 죽안이라 칭함.
마천리
18세기 전반기에 남원양씨와 청송인 심사도가 개척하여 삼(마)이 많고 마을 중앙에 내(천)가 흘러 마래(마천)아라 함 또한 국사봉 남쪽 아래에 있어 뫼아래라고도 하고 뒷골에는 여러 갈래의 내(천)가 삼단같이 흐르기에 마천이라고 불림.
화전리
임진왜란(1592)때 영월인 엄천 손이 가족을 데리고 피란와서 개척하여 목화가 잘되어 화지터(화전)아 하였으며 본래 예천군 지서면 화전동 지역으로 1914년 이후에 화전이라 칭함.
사곡리
동쪽 절골에는 사찰이 있었으며 그 후 최씨 최흥문과 함녕김씨가 기묘사화(1519)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사곡 또는 돌개라 불렀다. 그 후 抑佛의 영향으로 사곡이라 바꾸어 칭함.
고림리
신라시대 당동현 개척당시 수원백씨가 개척함. 개척당시 수목이 짙어 다래넝쿨을 헤치고 정착하였다 하며 높은 나무숲이 우거졌다하여 고림이라 전한다.
송지리
임란 후 지금의 마을입구에 정자를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으나 200여년전 정자가 소실되자 재건을 염원하던 것이 유래가 되어 망정이라 하였고 솔안은 송지의 안에 있다하여 지어진 자연부락임. 본래 당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송내, 지곡, 망정, 율현, 문경 흑송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내와 송지의 이름을 따서 송지라 칭함.
율현리
고려말에 조씨가 이곳에 마을을 개척하여 조동이라 불렀고 조선 세종때 장흥인 임귀지(1422-1508)가 다른 곳을 개척하면서 중국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율리를 따서 둔율리(遯栗里)라 하다가 세조때 율현으로 개칭
연천리
18세기 후반에 개성고씨가 개척하여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보인다 하여 연화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못이 1845(헌종11)년 매몰된 후부터는 모산이라 불렀다.1914년 한천동을 병합하여 연천이라 불렀다.
용암리
19세기 전반에 영월엄씨가 용암을 개척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장흥임씨가 종산을 개척하였음.
본래 당동면 용암동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유천에 편입되어 용암으로 불림.
초적리
충주 지씨가 처음 개척하였고 1581년(선조14)에 경주인 최득수가 산북면 원곡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개포면 우두원과 머글바 사이에 넓은 풀밭(초원)이 있었는데 그 풀밭위에서 신선들이 피리(적)를 불고 놀았고 그 피리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하여 "푸적골" 또는 초적이라 함.
매산리
17세기 후반 남양인 퇴곡 홍씨가 영월부사로 있다가 이곳에 와서 퇴치라 하였고 18세기 초에는 반남인 박선원이 화장에서 이곳에 와서 매산이라 함. 퇴치는 1974년 비행장부지로 들어갔음.
가 리
국사봉에서 산줄기가 이곳까지 뻗어왔는데 마치 소가 누워있는 형상(와우형)과 같고 소의 가리뼈에 해당되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해서 가리골이라 했으며 경치가 산고수려하여 가곡리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