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민, 낙엽과 함께 가다-제행무상
'떠나는 이 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
1970년대초 TV도 없고 보거나 놀거리가 없던 시절
유일하게 라듸오가 있었으니 그 때 자주 들리던
노래가 홍민노래다. 학교생활이 재미 있었는지,가정
생활이 아기자기 했었는지 우리 모두 꿈이 아득할 때
홍민의 감성어린 노래는 까까머리와 학생복의 사춘기
감성만점의 대중가요였다.입도 고프고, 눈도 고픈
시절에 우리의 귀를 넉넉히 해 줬으니 그가 홍민이었다
그 후 사춘기 지나 두세번 만났다.
그가 노후에 이혼하고 힘들게 있다는 말을 듣고
가끔 만리포에 있는 이용복까페에서 노래를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홍민의 친구인 변?아무개도 대장암으로
일찍 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서울 생활의 물과 공기,음식
의 건강성이 어떤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연예인 가수이면서도 예인티없이 성실하고,자기
하는 노래에 긍지와 자부심을 지닌 채 결코 대중 영합
이 아닌 '즐기며 유유자적한 철학자의 가수'인냥 평범
하게 혹은 때로 침묵의 모습으로 한 세월을 엮어 나왔
다.결코 남의 귀를 현혹케 하는 예능적 언어 유희도 모
르고 명동,충무로등 젊음의 거리를 통키타 하나로 때로
무심하게 때로 우울한 상념으로 자기가요 45년을 장엄
했으니 결코 쉽지 않은 대중가요의 중요한 역사였다.
요즘 나오는 젊은 가수들은 잘 모른다
그들의 노래 감성도,감흥도 잘 모르겠다
그들 나름,작금의 변화된 가요의 시대적 변화를 인정할
뿐이다.이미 오랜시절 혹은 젊은 시절 귀에 익은 옛노래가 심층의식에 박힌지라 아무래도 꼰대의 옛노래
듣기에 인이 배긴 것은 사실이니,본인 역시 좋아하는
옛가수 서너 사람중 한 사람이 홍민인지라 그의 유명을
달리함에 깊은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
'눈물을 닦아요,그리고 날 봐요'
암울했던 1970년 전후, 사실 남의 눈물을 닦아줄 경황
이란 없었다. 오히려 내 눈물,그 인간 본질인 '고독과 욕
망'이란 뜻모를 화두에 빠져 있었으니 1950,60년대를
거친 사회적 궁핍과 혼돈 그리고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자기 스스로 희망과 외로움을 다독여야 했던 시기에
크게 어필하고 달래 주었던 사람이 홍민이고 그의 노래
였다.그의 소리와 음률은 다소곳하고 부드러웠지만
그의 호소는 깊고도 은은하게 울림이 컸다.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수는 없지만 ....'
우리의 소망이 암울하던 때, 그래도 마음만은 맑고
곱게 간직하며 내일의 꿈을 간직했던 그 시절,달이
뜨거나 비가 오거나,바람이 불거나 저녘이 되거나
그의 석별과 고별은 가히 학생과 청년들의 우상이
되었으니,그는 예인이며 또한 평범한 일상을 지닌
'고요하고 담백한 중저음의 매력 만점 가수'였다.무상
하다.그의 나이 76세 세월과 병고을 거역할 수 없으니,
가을 바람으로 사라진 그의 왕생극락을 빈다.
부처님께서 제법무아,제행무상,일체개고,열반적정을
말씀하셨다. 본질에 있어 특정되고 영원한 나란 없다
(작용ㆍ현상은 있으나 실체는 없다),그리고 일체가
찰라에 변하고 사라지니 그 근원을 꿰뚫어 보라는 말씀
그리고 일체가 고통이니 작은 순간의 기쁨과 즐거움에
취하지 말고 근본이 고통이라 말씀하신 뜻을 되새기고
자기 일념을 모아 삼매를 얻어 생사를 초월하고,생사의
고통속에 헐떡이는 일이 아닌 '고요하고 충만한 영원한
충만의 세계'를 증득할 것을 부촉하셨다.
낙엽이 산길을 온통 뒤덮었다. 바람에 뒹구는 낙엽을
보며 부처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자기반추,자기
일념의 시간을 갖는다.
불기 2567.11.3 저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