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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십억 제안에도 넘어가지 않은 한국인 농부의 뚝심
2022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총과 탱크, 전함과 전투기로 싸우는 실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지만 그 어떤 시기보다 치열한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배고픔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가장 치사해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겪는 전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 미국 정부 고위급 간부의 40억 제안에도, 세계 최고 기업이 천문학적인 수익을 보장하며 던진 달콤한 사탕발림에도 넘어가지 않은 한국인 농부가 한 명 있습니다. 어쩌면 그 덕분에 한국이 치사한 전쟁에서 살아남아 최후의 승자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연간 약 86조 원으로 추정되는 이 시장은 연간 70조 원의 반도체(낸드플래시) 시장보다 훨씬 거대합니다. 그리고 매년 5%씩 성장하는 블루오션이기 때문에 전 세계 모든 정부가 돈 싸 들고 참전 중이죠. 아마 여러분 중 그 누구도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전쟁터라는 말은 실감하지 못하실 것으로 보입니다만, 우리는 실제로 전쟁터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종자 전쟁터‘입니다. 제 구독자분 중에 ‘청양고추’를 좋아하시는 분이 많이 계실 텐데 여러분이 드시는 청양고추는 한국의 ‘청양’에서 재배되는 고추가 아니고, 청송군과 영양군에서 재배하기 위해 중앙종묘가 1983년에 개발한 종자입니다. 중앙종묘의 유일용 박사가 개발했죠.
그러나 1998년 IMF 당시에 중앙종묘가 미국의 세미니스(현재의 몬산토)로 매각되면서 소유권이 넘어갔고, 몬산토를 독일의 바이엘이 합병하면서 바이엘 소유가 됐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에서 개발된 이 청양고추를 재배하려면 매년 바이엘에 종자 구매 비용을 납부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주제 ‘종자 전쟁’입니다.
현재 우리가 마음 놓고 사 먹는 일부 토마토의 경우, 네덜란드 원예과학 개발센터에서 개발한 것이라 종자 1kg당 약 1억 1400만 원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금 1kg의 현재 시세가 약 8~9,000만 원에 형성되어 있는데, 토마토 씨앗 가격이 금 가격보다 높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만약 이 씨앗을 소유한 네덜란드에서 갑자기 씨앗을 판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비싼 값을 주어도 씨앗을 판매하지 않으면 영영 토마토를 먹지 못하는 상황에 빠집니다. 이것이 바로 ‘종자의 무기화’인 겁니다. 현재 전 세계 정부는 종자 확보 전쟁 중입니다. 전 세계 종자 연관 산업 규모는 연간 약 86조 원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반도체 중 낸드플래시 시장의 70조 원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입니다. 그중 특히 옥수수와 콩 등 농산물의 경우 매년 그 규모가 성장하고 있죠.
지난 2019년, 암스테르담 종자 재단은 전 세계 종자 기업 중 상위 13개 기업을 선정했는데 그중 독일, 네덜란드, 미국, 일본 등의 회사가 대거 포진했습니다. 특히 한국 영토의 절반도 되지 않는 네덜란드의 경우 종자 강국인 것이 놀라울 따름인데요.
종자 산업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바로 씨 없는 포도로 알려진 샤인머스캣입니다. 껍질째 씹어 먹을 수 있으며 가장 흔하게 먹는 캠벨 포도보다 5도가량 높은 18 브릭스의 당도를 자랑하기 때문에 일반 포도보다 4배가량 비싸 포도계의 명품이라고 불립니다. 이 샤인머스캣은 한 송이 당 1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임에도 중국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수준이라고 하죠.
소비자들은 얇은 껍질, 맛과 향, 중국산에서 느낄 수 없는 달콤함에 취해 한 송이에 기꺼이 10만 원 이상을 지불하죠. 오히려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상황인데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샤인머스캣을 개발한 국가가 일본이라는 점입니다. 1988년 일본에서 개발됐으나 이 인기를 예상하지 못하고 2006년까지 품종 등록을 마치지 못했죠.
그런데 이 포도의 가능성을 본 한국 농부들이 이를 도입해 한국에 심어버렸습니다. 일본법 상 품종 등록 후 6년이 지날 때까지 재산권 등록을 마치지 않으면 로열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일본에 로열티를 내지 않고 샤인머스캣을 재배해 왔으며 2021년 4월, 일본에서 해외 반출을 막기 위해 종묘 법을 개정했으나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종묘와 묘목은 한 번 유출되면 추적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전 세계 정부가 어마어마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종자 분야에서 한국인 농부의 고집스러움이 미국 정부와 세계 1위 종자 기업을 애타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의식주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식(食) 아닐까 하는데요.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없으면 안 되는 쌀, 옥수수, 콩, 감자 등 필수 농산물의 중요성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전남대학교 농대에는 평생을 산과 들, 밭에서 보낸 교수님 한 분이 계십니다. 정규화 교수님인데요. 이분은 한평생으로 오로지 콩을 위해 바쳤습니다.
편하게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70이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산과 들, 밭에서 콩을 채취하고 재배합니다. 오죽하면 그에게 ‘교수가 취미인 농부‘라는 별명이 붙었죠.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을 한 그는 약 30년 동안 무려 7,000점이 넘는 콩 종자를 모아 왔는데요.
그렇다면 콩은 인류에게 왜 중요할까요? 인류학자들은 하나같이 인류사의 가장 큰 혁명은 ‘농경 생활’이라고 봅니다만, 이런 농경 생활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육류입니다. 불이 발견된 후 인류는 고기를 익혀 먹기 시작했는데요. 육류로 인해 인류의 단백질 섭취량이 늘면서 뇌의 활동량도 증가했고, 뇌 활동량의 증가는 지능의 발달과 함께 도구의 발명을 불러왔습니다. 땅을 파고 먹을 것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죠.
농경 생활은 인간이 매일 목숨을 내건 사냥을 나가야 하는 불안함을 털어내고, 직접 먹을 것을 키움으로써 안전한 주거 생활을 가능하게 했는데요. 수렵 생활이 좋았던 이들은 정착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 유목민이 되었고, 정착 생활에 만족스러웠던 이들은 평야에 터를 잡고 농경 생활을 시작합니다. 인류의 번영이 시작된 것이죠. 그러나 문제는 수렵 생활이 적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육류 섭취가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육류의 대안으로 등장한 식재료가 바로 콩이었습니다. 단백질과 지방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인데, 콩에는 무려 40%의 단백질과 30%의 지방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육류 대신에 먹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단백질과 지방 공급원입니다.
오죽하면 콩을 두고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콩은 우리 한반도 조상들이 위험을 무릅쓴 수렵 생활이 아닌 농경 생활로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농작물입니다. 콩의 원산지는 한국입니다.1929년 미국 농무부는 콩 유전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북아시아로 ‘동양 식물 탐험 원정대’를 파견했는데, 당시 총 4,471점의 야생 콩 중 3,379점을 조선에서 채집했죠. 작물의 원산지를 추정할 때 그 변이종의 다양성으로 판단하는데 한반도에서 80% 이상의 야생 콩이 발견됐다는 것은 한반도가 그 원산지임을 추정하게 합니다.
그런데 정규화 교수만큼 콩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인물이 한반도에는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합니다. 평생을 산과 들에서 야생 콩을 채집하며 고단하게 보내던 그가 2005년 우연히 미국 국립대두연구센터에 방문 교수로 초청받아 떠나게 됐는데요. 당시 연구센터의 종자 관리 책임자이자 미국 농무부 고위 관리였던 랜달 넬슨은 정 박사가 25년간 채집한 한국의 야생 콩을 미국에 가져와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연간 3억 3,500만 톤의 콩이 생산되는데, 미국은 그중 1억 2,000만 톤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콩 생산국입니다.
1980년대까지 강원, 경기, 충청, 경상, 전라 할 것 없이 한국의 모든 지역에서 토종 콩 종자가 유출됐습니다. 그리고 그 유출된 콩 종자의 대부분은 현재 미국에 있는데, 현재 미국에서 재배되는 대두콩의 90%는 35의 조상 품종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품종 6개가 한국에서 온 것이라고 하죠.
이렇게 한국 콩을 가져가려는 미국 정부의 고위급 관리가 지속해서 정규화 교수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했으나, 정 교수는 전부 거절했는데 이에 대해 담당자는 의외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관리가 그에게 보여준 서류에는 저명한 한국인 콩학자들이 미국에 야생 콩을 넘긴 기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죠.
학회에서 만나면 ‘반드시 한국의 야생 콩 종자를 지켜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하던 학자들이 미국에 갖다 바치듯 야생 콩을 유출한 겁니다. 정 교수가 1년간의 연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넬슨의 끈질긴 집착은 끝이 없었고, 결국 미국 정부를 움직여 한국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콩이라는 종자는 굉장히 중요한 작물이지만 관리가 허술해지면 다시 싹을 피울 수 없는 종자이기도 합니다. 종자 상태로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5년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밭에 심어 증식해야 합니다. 비료나 농약을 썼다가는 종자에 이상이 생길 수 있어 직접 심고, 잡초 제거하고, 물 주고 수확하는 작업에 하나하나 정 교수의 손길이 묻어야 하죠.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유혹이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몬산토에 이은 세계 2위 종자 기업인 파이오니어에서 그가 보유한 7,000종의 야생 콩 중 병충해 저항성이 강한 종자를 선택해 품종 개량하자는 제안이었죠. 미국은 세계 최대 콩 생산국이지만 곰팡이병 때문에 생산량이 급속히 감소하던 시기였는데요. 파이오니어는 그에게 곰팡이병에 강한 종자를 함께 개발하자면서, 매년 판매되는 로열티 중 1%를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돈으로 환산했을 경우 수십억 원이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는 제안이었죠. 그러나 그는 자신과 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부를 위해 씨를 팔지 않겠다’는 약속이죠. 그 약속은 콩을 채취하러 다니던 순간부터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종자를 판매하면 당연히 수십억의 돈이 손에 쥐어질 테지만 우리 농민들은 돈을 내고 그 콩을 구매해야 하므로 그는 약속을 한 번도 깨지 않았죠.
195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1983년부터 콩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주로 재배 콩 위주였는데 그때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현재 재배되는 콩의 대부분은 야생 콩에서 시작해 여러 세대에 걸쳐 수확량이 많은 쪽으로 개량되어 왔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유전적인 특성은 약해지거나 없어졌다는 점이죠.
이에 그는 원시 유전자원을 풍부한 지닌 야생 콩 또는 돌콩에 주목했는데요. 원시 유전자원이 높을수록 더욱 다양한 신품종을 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모은 콩 종자가 7,000점으로, 미국과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모은 6천여 종보다 많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야생 콩 종자를 오로지 개인의 발품으로 모은 겁니다. 이제 정규화 교수님이 은퇴하게 되면 이 많은 종자를 다시 키우고, 수집하고, 지켜낼 역할을 누가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한편 전 세계가 치열하게 종자 전쟁을 벌이고 있고, 일부 종자 기업은 농민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주무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KBS 스페셜로 방송됐던 ‘종자, 세계를 지배하다’라는 프로그램을 보시면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는 우량종자를 확보하고 개량하고 보급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국제식물신품종보호연맹 조약은 종자 재배를 위해서 지식 재산권을 소유한 국가 또는 기업에 사용료(로열티)를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몬산토와 같은 일부 종자 기업은 농부가 재 파종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위 조약에 가입하면서 한국이 개발한 종자 또는 품종에 대해서는 합법적으로 로열티를 받고 있는데요. 원래 한국은 IMF 이전 상당한 종자 강국이었습니다. 1998년까지 한국에는 청원종묘, 서울종묘, 흥농종묘, 중앙종묘 등 굴지의 종자 회사가 존재했으나, IMF를 이겨 내지 못하고 전부 외국 기업에 매각됐습니다.
은행 빚을 갚아 주는 대신, 모든 종자에 대한 재산권을 넘겨준 것이죠. 일본의 시가타가 청원종묘를, 스위스의 노바티스가 서울종묘를, 미국의 세미니스(몬산토→바이엘)가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를 인수했죠.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현재 한국은 한국이 개발한 무, 배추 등의 토종 채소 중 절반 / 양파, 당근, 토마토 등의 채소 중 80%에 대해 외국에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종자 분야에 있어 수출보다 수입이 4배나 많은 구조가 됐다고 하죠.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의 종자 산업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이 등록한 식물 자원 수는 26만 3,960개로 미국, 인도,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5위권으로 성장했는데요. 이제 다시는 이 자리를 빼앗기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 국민의 배고픔을 담보로 외국 기업에 휘둘려서는 안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