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까지 갔다가 다시 봄으로 돌아왔습니다. 다행이지요. 너무 느려도 탈이고 너무 빨라도 탈입니다. 그저 순리에 맞게 가면 좋겠습니다. 어느 날 반팔을 입었다가 다시 점퍼를 입게 됩니다. 오락가락 몸이 적응하기 힘들면 마음도 들쭉날쭉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아무튼 흐리고 비 좀 내렸더니 제자리로 돌아온 듯합니다. 그 사이 창밖에 보이는 산의 색깔이 바뀌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됐지?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비바람으로 인하여 활짝 핀 벚꽃을 올해도 놓쳤습니다. 아 이런, 또 1년 기다려야 하나? 하기야 아직 멀었다 싶기는 합니다. 평균 수명까지는 한참 남았지요. ㅎㅎ
아직은 4월, 이제 겨우 중순입니다. 봄은 좀 더 여유가 있습니다. 코로나도 덜 위험하게 느껴지고 있으니 바깥출입들이 많아지겠지요. 이 달 지나 5월이면 아마도 많은 변화가 예상되기도 합니다. 2년 이상 갇힌 몸과 마음들이 지화자를 외치면서 뛰쳐나오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또 그러다 뭔 일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이런 좋은 시절을 얼마나 더 누릴 수 있을지, 그래서 지난 2년이 더욱 아깝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때의 모습을 다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더 나아져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람인데, 잘 되기를 빕니다. 아무튼 참으로 좋은 주말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빕니다. 바깥 구경 좀 나가볼까요? *)*
2022년 4월 16일 김종우 목사 드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에베소서 4 : 28)
<스텔라>
요즘은 승용차든 일하는 차든 한 가정 한 대의 자동차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반세기 전만 해도 자동차가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승용차를 가진 집은 그래도 꽤 잘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의 종류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자동차를 생산해내는 회사만도 몇 군데나 됩니다. 그리고 수출량도 어마어마하지요. 겨우 반세기만에 이런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승용차 한 대 갖는 것은 일반 시민으로서 벅찬 꿈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주 흔하게 보고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창이었던 30대 때와 그만큼을 더 지난 지금을 비교해보면 놀라운 변화를 바라봅니다.
남의 차로 월급쟁이 생활하다 자기 차로 개인택시를 운영하는 사람의 감회도 남다를 줄 압니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 느끼는 기분은 어떨까요? 특히 초등학교 정도의 어린이가 어느 날 아빠가 몰고 들어온 개인택시를 볼 때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아빠 차를 타고 아빠와 함께 외출할 때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나는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지금이야 평범한 일일 수 있지만 한 40년 전의 이야기라면 전혀 다를 것입니다. 하기야 현재 2, 30대 젊은이들은 상상하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기야 지금도 새 차를 인수할 때 그 기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의 고백을 들을 때만큼이나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간은 거의 매일 차에 광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차량담보업을 하는 ‘영배’가 대단한 슈퍼카를 떠맡습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 친구 ‘동식’이와 함께 사라집니다. 차를 맡긴 ‘서 사장’이 길길이 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영배가 치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책임은 있지요. 이제부터 쫓고 쫓기는 일이 진행됩니다. 영배는 동식을 찾아 나서고 서 사장은 영배를 쫓아다닙니다. 그 사이 영배는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고향 집으로 내려갑니다. 도망친 모양새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하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마음에 상처만 남겨준 아버지입니다. 그래도 천륜을 저버릴 수는 없는 일, 몰래 집에 내려왔지만 끈질기게 추적하는 서 사장의 무리를 따돌리기에는 어림없습니다. 거기까지 들이닥칩니다.
엎치락뒤치락 상가에서 요란을 떨다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 영배는 잘 보관된(?) 아버지의 옛날 차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스텔라’ 야, 이게 여태 여기 있다니! 놀랍니다. 그러나 기회다 싶어 차에 오릅니다. 마침 시동도 걸리네요. 그대로 타고 집을 나섭니다. 문제는 마음대로 속력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줄은 몰랐지만 또 그것을 알았다 한들 그냥 놔두었겠습니까?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해서 나름 잃은 슈퍼카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목숨까지 걸린 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찌어찌 동식의 행방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쫓아갑니다. 그리고 이어 서 사장 무리도 따라붙습니다. 이렇게 계속 쫓고 쫓기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소위 ‘세단 차’라고 불린 첫 번째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 등장하던 때 그 품위가 대단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누볐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중형 승용차로 아마 당시 택시로도 일반 택시와 승차요금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쩌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이기보다는 바로 이 차입니다. 그런데 당시 주행속도를 그렇게 맞추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최대속도가 겨우 50km입니다. 그만큼 늙어서 그런가요? 아무튼 아무리 지방도이지만 이 속도로 달리다가는 자칫 운전자들에게 몰매(?) 맞기 십상입니다. 지나가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짜증나겠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면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급하지요, 차는 마음대로 달리지 못하지요, 영배의 속이 까매집니다. 그리고 쫓아오는 무리는 ‘벤츠’입니다. 한 마디로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런데 상대가 되도록 만들어야 이야기가 됩니다. 코미디니까요. 트럭과 스텔라와 벤츠의 대결이 전개됩니다. 어쩌면 이야기의 주요 장면이고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잘 구성하였습니다. 만약 세 자동차가 서로 추돌한다면 누가 손해입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거꾸로 벤츠가 도망을 해야 합니다. 상황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미칠 일이지요. 슈퍼카를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당장 벤츠를 망가뜨릴 수도 없습니다. 분노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엉성한 폭력배들과의 싸움 장면들을 이것으로 대체해줄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도 슈퍼카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는지 결국은 알게 됩니다. 손쉽게 그리고 빠르게 거액을 손에 넣으려는 욕망으로 범죄자들이 손을 댑니다. 자기들은 돈을 버는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삶과 인생이 망가집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차단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 곧 백성이 망가지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일입니다. 그냥 코미디로 진행하여 그렇게 마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괜스레 신파 같은 가족애를 삽입해서 눈물 짜내려 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영화 ‘스텔라’(Stellar)를 보았습니다.
- 복 있는 사람 -
김종우 목사
세상에 사는 누구나 복 받기를 바라고 또한 복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복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잣집에 태어나서 아무 고생 없이 호의호식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행운이고 천운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뜻한 바도 아니고 그냥 주어진 운명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누구나 그런 경우를 바라겠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운명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고 자신의 인생을 만드는데 주력합니다. 다만 우리는 세상의 일반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연히 세상에 떨어진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생명을 주신 분이 있고 세상을 만드신 분이 있고 크게는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신 분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믿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시고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보고 계십니다. 보잘 것 없지만 ‘나’ 한 사람의 인생도 관여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어디서 우연히 굴러 떨어지는 복이 아니라 바로 우리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복을 받기 원합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또한 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복을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복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흔히 전도하며 ‘예수 믿으세요. 복 받습니다,’ 하는 말을 하고 듣습니다. 아니면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하면서 전도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때의 복은 세상의 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복과 좀 다릅니다. 신앙인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신앙인도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복을 받고 싶어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라고 세상 복을 마다하겠습니까?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훨씬 낫지요.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는 좀 여유 있게 사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가난하게 살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우리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도 당신 백성이 잘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문제는 복을 주려 해도 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밥 달라고 요강을 가져오면 주겠습니까, 말겠습니까? 얘야, 가서 그릇을 다른 것으로 바꿔 오너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최소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달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제 젖이나 먹는 아이들처럼 구하지 말자 그 말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해야 아버지께서 기뻐하셔서 복을 주지 않을 수 없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밥그릇인지 요강인지도 구분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 신앙을 버리고 제대로 신앙하자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주고자 하시는 복을 기쁘게 주실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무작정 주시옵소서, 하지 말고 기꺼이 주실 수 있도록 신앙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면서 의식주 문제는 기본입니다. 그 가운데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내 집 마련’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동산 문제는 우리에게 바로 집 문제입니다. 내가 살 집, 평생 봉급을 모아도 마련하기 힘들다는 내 집, 그냥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누구나 갖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꿈이면서 우리네 행복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집을 짓는 순서고 좀 다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영혼이 먼저 잘 되어야 범사가 잘 된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삼 1 :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신약성경 유 1 : 20을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먼저 ‘거룩한 믿음 위에 나를 건축하는’ 것입니다. 하기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라 하셨습니다. 고후 6 : 16 “---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하나님의 성전을 뒷전에 두고 자기네 집짓기에 바빴던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신 내용이 구약성경 ‘학개’의 교훈입니다. 그 결과를 알진대 먼저 하나님의 집을 짓고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집은 곧 우리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큰 복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전이라 하셨으니 우리 자신을 잘 건축해서 하나님 거하실 만한 성전으로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거하시며 기쁘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자, 이제 구약시대로부터 하나님의 성전이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오늘 우리는 어떻게 지어서 하나님이 거하게 하실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약시대 하나님의 집
사람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서 떠나가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이곳에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의 지으신 당신의 작품입니다. 이 아름다운 지구촌도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담았던 사람도 당신의 작품입니다. 아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 후 하나님은 때마다 당신의 종을 세워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려는 역사를 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만들고 그들 안에 함께 하려 하셨습니다. 말씀하십니다. 출 25 : 8 - 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예, 당신의 거할 처소를 지으라 명하십니다. 그런데 보여준 대로 지어라 하십니다. 즉 너희 좋을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백성이 성전을 짓는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 말씀대로 건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성막(광야에서 지은 성전)을 짓습니다. 출 39 : 42 - 4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그렇게 말씀대로 지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단순하게 생각했던 신앙에 대하여 재고해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냥 ‘믿으면 복’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해야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입으로만 사랑을 외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계명 곧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말씀을 지켜야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성막을 지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출 40 : 33 - 34 “그가 또 성막과 단 사면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의 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필하였더라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그렇게 성막을 지었더니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회막)에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신 것이지요. 38절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잘 아는 대로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성막에 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때마다 하늘에서 양식을 받았고 옷은 해어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모든 해충으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적들의 침노를 막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집을 지었더니 하나님 백성은 모든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 어렵고 힘든 광야 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던 것입니다.
2. 신약시대 하나님의 집
신약시대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눈에 보이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2 : 19 -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가리켜 ‘성전’이라 하셨습니다. 고후 6 : 16절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말씀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행 7 :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 구약시대 곧 신앙의 초보 시절에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육적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따라오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성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성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오셨고, 다시 말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성전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구약시대의 사건을 통하여 보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을 말씀대로 지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성전 곧 우리 자신을 하나님 말씀대로 잘 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길에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우리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하지요. 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하나님이 오시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마음의 집을 어떻게 하나님의 집으로 지을 수 있을까요? 잠 24 : 3 - 4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여기 건축 재료들이 나옵니다. 지혜, 명철, 지식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마음의 성전을 지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 생각이 하나님 생각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고 결국 우리네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태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 생각으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복을 한량없이 내려주실 것입니다. 전에 아람 나라 ‘나아만 ’장군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군대장관입니다. 권세도 재물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단 하나 약점은 문둥병자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산다 해도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있게 마련입니다. 어찌 하겠습니까? 인생을 만드신 자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남의 나라 사마리아 땅에 갈 생각을 했겠습니까? 군대장관의 대단한 행렬이 갔는데 기껏 요단강 물에 들어갔다 나오라고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그는 결국 자기 생각을 버립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합니다. 결국 복을 받지요.
우리네 상식과 지식으로 또 경험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라도 그런 우리의 생각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맞추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바르게 건축해야 합니다. 고전 3 : 16 - 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마땅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거룩해야 합니다. 어떻게 거룩하게 깨끗하게 만듭니까? 벧전 1 :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 그렇습니다.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깨끗하고 거룩해집니다. 그러니 먼저 진리,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배워서 알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번제는 제사 중 기본이고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예배보다 일단 하나님을 알고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 유대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열심이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탄식하셨습니다. 마 23 :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곳에서는 날마다 제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탄식하셨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쫓아내고 자기 식으로 제사만 열심히 드렸습니다. 이제 예수님까지도 쫓아내었습니다. 알고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롬 10 : 2 -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열심만 가지고 신앙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의만 세우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 곧 말씀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해야 합니다. 요 14 :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말씀을 지킬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도 사랑해주시고 또한 함께 하여 주신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라고 누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전 곧 우리 자신을 건축하면 하나님이 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 복을 한량없이 내려주십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