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가 2: 십자가는 강생의 절정입니다
이사 35,1-10; 루카 5,17-26 / 대림 제2주간 월요일; 2023.12.11
주님의 빛인 신앙 진리의 공리와 명제를 그날의 독서와 복음 말씀에 따라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번째 신앙 진리인 강생 부활의 두번째 주제로서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십자가는 강생의 결론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이사야가 마주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한 현실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이었습니다. 사지가 마비되고 말도 어눌해질 정도로 사고력이 위축된 중풍병자의 처참한 처지는 비단 이 중풍병자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등 총체적인 상황이 하느님과 소통하지 못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그래서 축소판 이스라엘이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겨내는 기발한 생각을 해 낸 이웃 사람들의 도움으로 당신 앞에 찾아온 이 중풍병자의 처지를 깊이 헤아리시고 단번에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ㄴ). 그리고 나서 말씀 한 마디로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루카 5,24). 그런데 중풍을 치유하는 이 기적의 현장에서 그분을 지켜보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엉뚱한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이후 이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고 끝내 십자가 형이 언도되기 이전, 유다 최고의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재판에서 ‘신성모독’ 혐의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중풍병자가 기적적으로 일어나 걸어간 일에 대해서 아무런 공감 능력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백성이 처해 있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연민도 느끼지 못하던, 말하자면 괴물 같은 존재들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던 겁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여러 고을들과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치유와 구마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일으키신 이 중풍병자 치유 기적은, 그분의 비극적인 운명까지도 예고하게 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 병자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자비, 즉 사죄 선언으로 말미암아 신성모독 혐의를 받게 되셨고 십자가 죽임의 빌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죄악에 물들어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대책으로서 오신 하느님의 자비,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라는 가장 명백한 증거는 모든 인류를 위해 그분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으셨다는 점입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마태 26,28)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정치범 처형 방식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는데, 이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음모에 따라서 로마 총독 빌라도가 여론에 떠밀려 십자가 형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당신의 이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에게 ‘십자가’란 사랑의 희생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유언으로 남기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이는 부활과 함께 예고되었는데,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된 유훈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도 이 십자가의 진리에 관해서는 유난히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 45)고 하셨는가 하면,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 11)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 죽음으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십자가의 진리는 그 의미와 지평이 더욱 명백하게 밝혀졌는데, 특히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부르심을 받은 처지가 아니라 부활 후에 사도가 된 인물인데, 특히 그가 십자가의 영성과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선명한 깨달음으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 18).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1코린 1, 21).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 24). 요컨대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십자가는 세상의 악과 맞서고 그 악으로 인해 죄에 물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강생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몰트만)이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의미하는 현실은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바를 전해주는 오늘 독서에서, 십자가로 세상의 악에 맞서실 메시아께서 펼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서정적으로 내다본 바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이사, 35-1-2).
비참하고 처절했던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되리라고 자신있게 내다보는 이사야의 과감한 예언은 다음 대목에서 더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이사 35,6ㄴ-10ㄱ).
메시아께서 열어젖히실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서는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이사 35,9ㄴ-10)고 매우 인상적으로 낙관적 전망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러니 메시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비를 다시 입게 될 백성은 이 자비에 대해서 기쁨으로 받아들이라고 이사야는 촉구했습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3.5-6).
이러한 이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스스로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간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예언이었음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복음 이래 달라진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증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사적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주님의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스러질 터인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이 오면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013. 대림 제2주일 제2독서).
그러니 교우 여러분!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비단 그 중풍병자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죄에 물든 온 인류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펼쳐지는 새 시대를 여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신성모독의 혐의를 뒤집어 쓰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 했던 십자가의 길은 강생의 신비를 완성하는 절정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메시아로 세상에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이 길을 여셨고, 이 길을 통하여 생명의 현실을 믿는 이들에게 무상으로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내일에는, 이 기적의 의미와 함께 강생 부활의 세번째 주제인 부활의 신비에 대해 묵상한 바를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