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등시절
박후기
가슴에 불 하나 품고
풍등이 날아간다
날개 없는 자유 등에 지고
겨우 날아오르는
오십대는
흔들리는 풍등시절이다
아직 바닥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돛이요
허공에 떠 있다는
자각은 닻이다
축제의 풍등처럼 우리는
함께 날아올라
각자 떨어진다
닿았다 싶으면
멀어지는 돈과 행복,
탄탈로스의 고통 속에서
생의 절반을 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가슴 속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려 애쓴다
청춘의 협곡을 지나
절벽과 절벽 사이
잔교棧橋에 내려앉았을 때,
어쩌면 뛰어내리는 게
날아오르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출렁거릴 때마다
날아오르는 풍등보다
뛰어내리는 새가 되고 싶었다
발 디딜 수만 있다면
절벽 위 잔교면 어떤가
지금은 좇아갈 때가 아니라
기다려야 할 때라고,
해 저무는 난간 위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풍등風登이란 중국에서 최초로 만든 의식과 축제의 놀이기구이자 최초의 열기구라고 할 수가 있다. 중국에서는 공명등孔明燈이라고 부르고, 대만에서는 천등天燈이라고 부른다. 풍등이란 종이풍선과도 같으며, 심지에 불을 붙여 하늘로 띄워보내는 놀이기구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인간들의 성공과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박후기 시인의 [풍등시절]은 “탄탈로스의 고통 속에서/ 생의 절반을 보낸” 오십대의 노래이며, 이 세상에서 모든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자의 자기 탄식의 노래라고 할 수가 있다. “가슴에 불 하나 품고” 날아보지만, “날개 없는 자유를 등에 지고/ 겨우 날아오르는/ 오십대는/ 흔들리는 풍등시절”에 지나지 않는다. ‘오십이지천명’이라는 공자의 말이 있듯이, 오십대는 천명을 알고 그것을 실천한 전인류의 스승의 경지에 도달해 있을 나이이지만, 그러나 그는 “탄탈로스의 고통 속에서/ 생의 절반을 보낸” 자에 지나지 않는다. 탈탈로스는 신들이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이었지만, 그의 외아들인 펠로프스를 신들에게 삶아 먹이고, 그 결과, 천형의 형벌을 받은 신성모독자였던 것이다. 물이 있어도 마실 수가 없었고, 수많은 과일이 열려 있어도 따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박후기 시인의 고통이 왜, 탄탈로스의 그것과 비교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청춘의 협곡을 지나/ 절벽과 절벽 사이/ 잔교棧橋에 내려앉았을 때”라는 시구를 통해서 그의 고통을 유추해 볼 수가 있었다.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던 군사독재시절과 김영삼과 김대중과 노무현과 이명박 등으로 이어지던 형식적인 민주주의 시절도 지옥 속의 그것과도 같았을 것이고, 그 천형의 형벌과도 같은 삶은 산업화 시대의 절대빈곤과 IT 산업시대의 풍요 속의 빈곤한 삶으로 이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절벽과 절벽 사이/ 잔교棧橋에 내려앉았을 때/ 어쩌면 뛰어내리는 게/ 날아오르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고, “아직 바닥은 아니라는/ 안도감이 돛이” 되고, “허공에 떠 있다는/ 자각은 닻이” 되는 현재의 심정은 겨우 수명을 연장해 가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날이면 날마다 축제의 풍등처럼 성공과 행복을 위해 날아오르지만, 이 땅에 떨어지면 모두들 다같이 점점 더 “멀어지는 돈과 행복”----.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이 절벽과 절벽 사이의 삶이 박후기 시인의 [풍등시절]이고, 그는 “마음이 출렁거릴 때마다/ 날아오르는 풍등보다/ 뛰어내리는 새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과 서울대 학생들은 범죄인 집단에 지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지구상의 최악의 범죄인 표절 앞에서 모조리 침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3-40년 동안의 학문연구의 성과인 박사 학위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표절논문이라면 이 짝퉁 학위는 독서와 무관한 일제식 암기교육의 폐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교육제도는 이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범죄인 양성교육제도이며, 그 결과는 우리 정치인들과 우리 재벌들이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 우리 대통령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형무소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고, 다른 한편, 이건희, 이재용, 최태원, 정몽구, 김승연, 신동빈 등, 우리 재벌들 역시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형무소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양심을 가졌다는 것이고, 양심을 가졌다는 것은 언제, 어느 때나 근면함과 성실함을 토대로 하여 자기 자신의 꿈과 희망을 쫓아 ‘풍등’을 날려왔다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풍등을 날리는 것이고, 풍등을 날리는 것은 자기 자신의 꿈과 희망을 연주하는 것이다. 권력에 아첨하지 않으니 권력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돈을 쫓지 않으니 돈이 쌓일 리가 없고, 명예를 쫓지 않으니, 그의 제자들과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길 리가 없다.
범죄인과 범죄인들만이 소위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하는 세상에서 시를 쓰고 풍등을 날린다는 것은 풍등으로 소위 ‘자본의 스텔스 전투기’와 맞서 싸우겠다는 것과도 같다. 풍등은 전투기들의 위용과 그 무모함을 야유하고 비판하는 도구이며, 따라서 이 풍등을 모조리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것이 우리 학자들과 우리 정치인들과 우리 재벌들의 암묵적인 통치 이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절벽과 절벽 사이의 잔교棧橋가 그 안식처이고 영원한 무덤인 박후기 시인의 [풍등시절]----. 박후기 시인의 [풍등시절]은 비참하기 때문에 아름다고, 아름답기 때문에 절벽과 절벽 사이의 ‘잔교 위의 삶’이 더욱더 그 빛을 발한다.
밤하늘의 풍등이 더욱더 아름답고 그 빛을 발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