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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다려라
14: 1-14
Ⅰ.들어가는 말
1.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행진 방향을 바꾸게 하셨다.
2.애굽 군대가 추격하자, 백성은 겁먹고 모세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3.모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Ⅱ.본론
1.진로(進路) 수정과, ‘바로’의 군대 격퇴를 예고(豫告)
①하나님께서 진행 방향을 바꾸게 하시다.
ㄱ.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가던 길을 돌이켜 ‘믹돌’과 바다 사이에 있는 ‘비하히롯’ 앞으로 가게 하라(2)
ㄴ.‘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로 가서, 그곳에 진치게 하라(2)
ㄷ.그러면,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길이 막혀, 그 땅에서 헤매고 있는 줄로 생각할 것이다(3)
②하나님께서 ‘바로’의 군대를 물리치실 것임을 말씀하시다.
ㄱ.내가 ‘바로’ 마음을 꺾지 않으므로, 그가 너희를 뒤쫓아올 것인데, 그때 내가 ‘바로’와 그 군대를 물리칠 것이다(4)
ㄴ.그래서, 애굽인들이 내가 여호와인 줄 깨닫게 하리라(4)
2.바로의 후회와 이스라엘 추격
①바로와 그 신하들이 이스라엘 백성 내보낸 것을 후회하다.
ㄱ.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쳤다는 보고가 ‘바로’ 귀에 들어갔다(5) ㄴ.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마음이 변하여, 종으로 부려먹던 이 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것에 대하여 후회를 하게 되었다(5)
②바로가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좇아가다.
ㄱ.‘바로’는 병거(兵車)를 갖춘 후,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6)
ㄴ.애굽 모든 병거를 총동원하고, 바로의 부하들이 지휘했다(7)
ㄷ.주께서 ‘바로’를 고집스럽게 하시니, 이스라엘을 추격했다(9)
3.백성들의 항의와 모세의 위로
①이스라엘 백성이 겁을 내고서 주께 살려달라고 울부짖다.
ㄱ.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친 곳에 가까이 다가갔다(10)
ㄴ.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겁에 질 린 나머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10)
②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항의하다.
ㄱ.우리가 묻힐 곳이 없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11)
ㄴ.애굽인들에게 종노릇하는 게 속 편타고 하지 않았는가?(12)
ㄷ.지금 이곳에서 죽는 것보다, 애굽인을 섬기는 게 더 낫다(12) ③모세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임을 밝히다.
ㄱ.겁먹지 말고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하라(13)
ㄴ.여호와께서 오늘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보라(13)
ㄷ.너희 눈으로 보고 있는 애굽인들을 다시 볼 수 없으리라(13)
ㄹ.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몸소 싸우실 것이다(14)
Ⅲ.맺는 말
1.이스라엘 백성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인도하심을 충분히 믿고도 남을 일이었다.
2.그런데도, 그들은 조금 힘든 상황이 되자, 모세에게 항의하며 대 들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모세를 불신했기 때문이다.
3.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은, 한치 앞을 예견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홍해 사건 이전의 상황
①출애굽 진로 수정
ㄱ.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행 진 방향을 바꾸게 하셨다.
ㄴ.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붙도록 유인하 기 위한 작전이었다.
ㄷ.하나님께서는 바로 군대 를 홍해에 수장시켜서, 애 굽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②‘바로’의 추격
ㄱ.바로는 이스라엘 백성 내 보낸 걸 후회하고 있었다.
ㄴ.그래서,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갔다.
③백성들의 항의
ㄱ.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자, 이스라엘 백성은 겁을 먹 고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ㄴ.그리고, 모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거 세게 항의를 했다.
④모세의 위로
ㄱ.모세는 하나님의 구원하심 을 믿었다.
ㄴ.그래서, 백성들을 위로하 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지켜보자고 했다.
2.정리(교훈)
①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늘 함께 하시고 있었다.
ㄱ.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 의 사랑과 그 은혜, 그리고 구원 사건들을 잊어버렸다.
ㄴ.그들은 필요할 때에만 하 나님을 찾았던 것이다.
②사람은 순간적인 판단 잘못 으로 악행에 빠지기가 쉽다.
ㄱ.그러니, 늘 기도하며 믿음 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ㄴ.순간적으로 악령에 사로잡 히면, 영원히 후회한다.
ㄷ.바로를 보라! 순간적인 잘 못 판단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는가?
③모세처럼, 하나님을 굳건히 의지하고 그 역사 하심을 믿 는 믿음이 필요하다.
출처: 천성을 향하여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군대
원망하는 이스라엘
출 14: 1-14
이스라엘이 천하의 애굽왕 바로를 굴복시키고 그들이 주는 은금패물을 잔뜩 받아가지고 열과 오를 맞추어 당당하게 나올 때, 그 모습은 전쟁에 승리한 군대와 같았습니다. 그 모습은 장차 어린양의 피공로로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사기는 하늘에 닿았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모습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나, 지금 애굽을 탈출할 때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싸움 잘하는 불레셋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그들을 길도 없는 광야로 인도하여 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너무나 실망스런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한쪽에는 산이 가로막히고 한쪽에는 바다가 가로놓여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는 막다른 골목이었는데, 그것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인도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보실까요?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지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3-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셨고, 하나님이 일부러 애굽 왕의 마음을 충동시켜 그들을 쫓아오게 만드셨다. 왜 그러셨는가 하면, 그 애굽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아득하다’ 는 표현은 ‘절망적이다’ 라는 말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손을 써볼 방법이 없게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빠져나갈 길이 안 보이는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것을 안 바로는 모든 군사력을 모아 추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7절에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로 엄청난 군사력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애굽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고 하셨습니다.
바로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줄을 맞추어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데, 그 엄청난 군대를 가진 자기가 막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선수들이 프랑스와 싸우는데, 우리가 열 골을 넣을 동안 프랑스 수비수가 전혀 손을 쓰지 못했고 그대로 당해서 10:0으로 패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상황입니다. 바로가 생각하기에 그동안은 개미새끼 한 마리도 자기 나라에서 마음대로 걸어 나간 적이 없었는데, 수백만 노예가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것을 눈 번히 뜨고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당당하게 걸어 나간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가자마자 길을 잃어버리고 광야에 갇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오합지졸에게 세계최강의 애굽의 왕이 당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명예를 회복하자는 생각으로 추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셨고, 왜 애굽 군대를 출동하게 하셨을까요? 두 가지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애굽 왕에게, 이스라엘을 다시 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아직도 이스라엘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저렇게 오합지졸인 이스라엘에게 내가 그토록 허망하게 당했단 말인가? 하고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그 애굽 왕에게 이스라엘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노예가 아닙니다. 전에는 자기들의 노예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인도하여 내시고 하나님이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옛날 사람은 아닙니다. 독수리의 날개에 흙이 묻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참새가 된 것은 아닙니다. 흙을 털어버리고 하늘을 향해 치고 올라가면 그 무엇도 따를 수 없습니다. 성도가 약점이 있고 세상에서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할 수도 있지만, 세상이 그를 간섭하고 공격을 하는 것은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큰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애굽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십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누군가를 다시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은금패물을 가지고 당당하게 나올 때는 보무당당했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옛날 노예로 살 때나 지금이나 본질이 똑같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디로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 앞에 얼마나 어려운 환경이 가로 막고 있으며, 닥쳐올 어려움들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어떤 위치에 있고, 왜 지금 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11-12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않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참 한심한 말입니다. 과연 이 말이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백성들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믿기 어렵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로 끌고 와서 죽게 하느냐,”
모세더러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로 끌고 왔다는 원망입니다. 이것이 열 가지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이라고 믿어집니까? 우리가 애굽에서 종으로 바로를 섬기려고 했는데, 왜 여기로 끌고 왔느냐, 종살이가 더 좋았는데 왜 억지로 우리를 해방시켜서 이 고생을 시키고 결국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욕했습니다. 믿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들입니다. 이 게 하나님의 기적을 열 번이나 경험하고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의 말입니다. 너무하지요? 그 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모르는 말이고,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하는 말들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어떤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바로 이런 후회에 빠집니다.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보다 행동에 제약이 많게 되었을 때도 후회를 합니다. “아 내가 예수 안 믿었으면 이런 갈등은 안 해도 될 텐데, 왜 내가 예수 믿기 시작해서 이런 어려움을 겪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 방식으로 살았으면 이런 고민이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우리는 영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욕할 사람을 찾아가서 함께 죄를 보탭니다. 이런 원망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섭섭하게 만들까요?
그 때에는 전도한 사람도 원망스럽습니다. 왜 당신이 나를 교회로 인도해서 이런 갈등을 하게 만들었느냐, 예수 모르고도 잘 지냈는데, 왜 나를 예수를 알게 했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들도 이런 어리석은 죄에 자주 빠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불신자 시절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려고 그들의 본성이 다 드러나게는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 군대를 보고 이스라엘이 분노하고 원망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계획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모세를 따라서 애굽을 떠나가긴 하지만, 애굽을 떠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여차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애굽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양다리작전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으로 간다고 하니까 따라가 보자. 하지만 그게 그리 쉽겠어? 아마 어려울거야, 만약 어렵게 되면 그때는 되돌아오면 그만이지 뭐. 밑져봐야 본전이니까 가보자.” 이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전혀 모르는 길, 되돌아올 수 없는 길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홍해 바닷가에 데려다 놓아서 길이 막히게 하시고, 분노해서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날 애굽 군대가 몰고 오는 특별병거는 아마 앞에 창날 같은 것들이 죽 꽂혀있는 무차별 살상용이었을 것입니다. 그 병거를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로 몰고 지나가기만하면 한꺼번에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돌아갈 길은 막혀버렸고, 눈앞에 죽음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화가 치밀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가서 하나님 믿으면 좋다고 하니까 한번 가보지 뭐, 하지만 믿는 일이 별로 유익이 없으면 그때는 돌아가면 되겠지 뭐, 하는 양다리 걸치기입니다.
이번에 정부의 인구센서스 조사에서 기독교인 인구가 감소했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통계청이 25일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5년 11월1일을 기준으로 기독교 인구는 876만6000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14만4000명 줄었다고 합니다. 불교는 1072만6000명으로 3.9% 늘었고, 천주교는 514만6000명으로 10년 전 295만1000명보다 219만 명이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기독교 인구가 실제로 줄었을 수도 있지만, 교회의 대외적 이미지와 선호도가 낮아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고, 기독교 이단들의 반사회적 행동이나 큰 교회의 당회장직 세습이나 교계의 자랑스럽지 못한 일들을 매스컴이 연이어 보도하면서 우리사회에 반 기독교적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인이요 하고 밝히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회출석자들이 양다리 걸치기 합니다. 믿다가 교회 다니는 것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진리를 절대시 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는 없는데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할 때는 분노를 느끼고 주님과 교회와 전도자를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아직도 두 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되돌아올 수 없는 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이제 우리는 절대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뒤를 막아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앞에 새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이 인도하시는 앞만 바라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합세하여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분노를 쏟아내고 있을 때, 모세는 어떤 자세를 보였는지 아십니까?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서 있을지니라.”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합니다.
함께 원망할 사람을 찾아가 당을 짓습니다. 그리고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무모한 행동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고생하던 애굽을 동경하며 그리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벽돌 굽기에 진액이 다 빠지던 애굽, 아들을 낳으면 강에 던져야했던 저 비정한 애굽을 찾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모세를 배척하는 무모한 행동까지 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도 침착합니다. 주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께서 이번 문제도 틀림없이 도와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근거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고생하던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나안까지 인도하시려고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홍해 가에서 죽게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 하시는 것을 바라보기나 하라" 고 당당히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없으면 어려움을 당할 때 흔들리고 쓰러집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외치기를 "내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 과거에 받은 은혜를 기억합니다. 모세는 절망적인 홍해앞에서 지난 유월절 밤을 기억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장자가 다 죽어 통곡이 진동하던 그 밤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씀만 믿고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르고 그것을 구워먹다가 신기한 해방을 맞았었습니다. 그날 밤의 장면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나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의 도우심을 생각하니까, 눈앞을 가로막은 홍해나 애굽 군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용기 있게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니 그것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자고 믿음을 고백하고 격려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극히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큰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바로의 완강한 거부로 해방이 불가능했을 때 그 완강한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킨 분이 누구십니까? 말라 죽고 굶어죽을 메마른 광야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먹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광야로 가면 그런 기적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었습니까? 그러나 절망적일 때마다, 하나님은 생각지 않은 방법으로 그들을 보호하셨고 인도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런 하나님을 기억했고 그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시작하신 일에 대하여 책임지는 분입니다. 아무리 길이 없어도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이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하나님이 성공적으로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안정된 길을 원합니다. 아무 탈 없이 안정되게 평생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안정된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탄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없고 믿음을 다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도 고난이 있는 것은 그 길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지도력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고 우리를 연단하려고 하는 확고한 뜻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고난스러운 길을 만날 때는 하나님이 바싹 붙어서 동행하시면서 도와주셔서, 우리를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시고, 구원은 받았으면서도 아직도 변화가 없는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의 못난 모습을 체험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지혜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승리하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다가 그 결과가 너무나 나빠서 절망상태에 빠졌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 것인가를 기대해 봅시다.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원망하는 사람과 어울려 무리를 짓지 말고, 모세와 같은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만약 모세가 사람을 바라보았더라면 그는 절망했을 것이고 백성들은 모두 홍해에 빠져죽거나 애굽 군대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맞닥뜨렸던 상황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큰소리 칠 만한 상황이었습니까? 모든 가능성은 다 막히고 백성들은 분노에 차서 뒤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살상용 마차 600대를 몰고 달려오는 뽀얀 흙먼지가 보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바라보며 겁에 질려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수많은 백성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철 병거 육백 승에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장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다면 내가 이해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선하신 뜻이 있다. 하나님만 바라보자.”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세상을 동경하고, 여차하면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인들을 잡아두는 비결은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애매모호 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동성애를 악이라고 말씀하는데 영국 성공회는 동성애를 인정했고, 장로교회의 뿌리인 스콧틀랜드 장로교회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니까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가는 자세입니다. 만약 ‘동성애는 죄다.’ 라고 교회가 분명하게 말하면, 젊은이들이 교회에 대하여 엄청난 분노를 토하고 떠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애매모호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오늘의 사회학과 과학과 정치가 뭐라고 말을 할지라도,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들은 사람과 시대를 해롭게 할 뿐입니다. 오늘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것들이 휴지조각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를 버리고 주님만 따르는 길에 구원이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방법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모세가 말 한대로 상상 못한 곳에 그들을 구원할 길을 감추어 두고 계셨습니다. 그 길은 아무도 상상 못한 바다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의 목전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바다 속으로 난 새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추격해온 애굽 군대는 바다 물을 합류시킴으로 그 물에 수장시켜 영영 이스라엘에게서 멀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신 것은 도리어 그들을 훈련시켜 믿음의 사람을 만들려는 것이었고, 적으로부터 완전하게 격리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앞에 어떠한 난관이 닥쳐온다 해도 당당히 주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믿으십시다. 그리고 당황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이 새 길로 인도하실 것이니 두고 보라고 믿음의 장담을 하십시다.
그리고 자신을 성결케 하며 기도하면서 기다리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신기한 승리의 체험을 하게 되고 주님은 영광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믿음을 발휘할 기회
출 14: 1-14
생각지 않았던 어려움이 닥쳐오면 믿음의 사람과 불신앙의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반응합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은 불평과 원망부터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라고 묻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느냐?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냐?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라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왜?’ 라고 묻습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가 왜 이런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되면 더 이상 그 문제로 인해 더 이상 고민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좀 늦게 해결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하다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가장 좋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질병이 낫지 않아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고, 하박국 선지자는 나라가 바벨론에 망할 것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문제 앞에서 믿음을 발휘하여 결국에는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 가운데 맨날 “큰일났다”라고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별로 큰일도 아닌데 믿음이 없으니까 큰 일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아시지요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베드로는 염려와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갑자기 풍랑이 몰아쳤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던지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하면서 난리를 쳤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의 체험을 하고 난 이후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변했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12장에 보면 같은 동료 야고보는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 자신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내일이면 베드로는 끌려가서 순교를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날 밤에 베드로는 깊이 잠들었습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천사가 와서 쳐서 깨웠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너무 당당합니다. 저는 베드로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성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경제적인 위기가 닥쳐오고 사업에 문제가 올 수 있습니다. 이 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완전한 축복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삶에 어려움이 닥쳐오거나 실패가 엄습해 와도 그것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축복의 문을 여실 것입니다.
한 어촌 마을에 고기잡이 나간 배가 있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질 않습니다.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한 집, 두 집 걱정하니까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걱정합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 아이가 촛불을 넘어뜨려 한 집에 불이 났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불끄랴 돌아오지 않은 배를 걱정하랴 너무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풍랑으로 돌아오지 않지요. 가재도구는 다 불탔지요 얼마나 가혹한 시련입니까?
그러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아침이 되어서야 그렇게 고대했던 배가 돌아왔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젯밤 풍랑 속에서 이 배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육지에서 큰 불길이 올라와 그 불길을 보고 항로를 바로 잡았습니다.” 보십시오 이 집에 난 불이 재앙이었습니까? 구원의 등불이었습니까? 집에 불이 나지 않으면 가장을 잃었을 겁니다. 우리는 사건을 잘 보아야 합니다. 한쪽 면만 보고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하나님이 나를 버린 증거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변 길로 인도하지 않고 홍해 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여기에 보면 “돌쳐서”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말은 가던 길을 되돌아가게 한 것을 말합니다. 애굽을 떠났으면 재빨리 해변대로든 광야길이든 가야하는데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것처럼 되돌아 왔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양쪽에는 두 산이 있고, 반대쪽에는 바다가 가로놓여 있는 그런 곳으로 인도하고는 그곳에 장막을 치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친 곳은 홍해와 믹돌 사이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믹돌이라는 지역은 애굽 동쪽 끝 마지막 국경선 부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경선을 표시하는 높은 망대에서 앞에 홍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양쪽에는 비하히롯과 바알스본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쪽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바다, 그리고 뒤는 애굽 군대가 있습니다. 그 곳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애굽왕 바로가 볼 때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아득하여”라는 말은 좀 이상하게 번역된 것입니다. 이 말을 본래적인 의미는 ‘혼란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혼란에 빠졌다는 말입니다. 바로가 판단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가도 한참 잘못간 것입니다. 스스로 무덤을 판 것입니다
특히 2절에 보면 의미심장한 두개의 지역이름이 나옵니다. 하나는 비하히롯이고 다른 하나는 바알스본이라는 곳입니다. 비하히롯이라는 말은 “구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알스본은 “바알이 내려다 본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출을 받든지 아니면 바알 우상 앞에 항복을 해버리든지 그런 절대적인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주지 않으면 다시 옛날 우상을 섬기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위기 상황에 이스라엘이 갇혀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코너에 몰리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가자니 홍해입니다. 양쪽은 산이고, 뒤는 애굽입니다. 그렇다고 애굽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코너에 몰린 사람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코너에 몰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만이 감당해야할 비밀스러운 사건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
먼저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사면초과의 자리에 서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연히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오게 된 것은 아닙니다. 2절에 나오는 “돌쳐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진행방향을 바꾸어 홍해 바다가로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3-5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번엔 바로 왕을 찾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 나일의 계곡, 홍해 앞에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신하로부터 보고를 받을 때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합니다. 8절에 보면 똑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했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이 강퍅해진 바로는 이스라엘을 뒤쫓아 가기로 결정합니다. 안그래도 바로 왕과 그 신하들은 이스라엘을 내 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은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로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냈었는고..” 라고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혼돈 속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자 특별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다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추격하기로 한 것입니다. 특별 병거 600승이라는 것은 일종의 바로의 친위대입니다. 최고의 무공을 자랑하는 군인들을 총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바로는 “이제 너희는 끝났다‘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쳐서 홍해 앞에 갇히게 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해서 이스라엘을 뒤쫓게 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자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홍해 사건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꾸미신 일입니다. 줄거리를 쓰고 연출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반역했던 애굽 땅과 바로 왕에 대한 마지막 심판입니다.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은 홍해로 애굽의 최고의 군대와 무기들을 총집합시켜 놓고 흔적도 없이 물속으로 사라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기 위한 계획입니다. 4절에 보면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영광을 얻어”라는 말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는 것은 중요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면초과와 같은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고는 오히려 최선의 상황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어려운 일로 인해 코너에 몰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큰 은혜, 더 큰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 홍해 앞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갔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
두 번째로 우리가 봐야할 것이 홍해 앞에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믿음의 사람 모세와 믿음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서로 달랐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다. 10절을 보면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과 원망의 부르짖음입니다.
또 11-12절을 보면 그들은 모세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보십시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먼저 비난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또 지도자인 모세를 비난합니다. 사실 유월절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만 해도 이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8절) 그러나 막상 현실의 문제 앞에 서자 믿음이 없는 그들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처럼 생각되어집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은 순간 절망과 좌절에 빠졌습니까? 남에게 화를 낼 수 없을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심한 말을 쏟아놓았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라리 구원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마치 생각 없는 짐승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두려움과 원망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10절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두려워하고 원망에 빠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은 보이지 않고 그들을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만 보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삶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안볼 수야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과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을 뛰어넘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가운데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 나라 왕이 북 이스라엘을 치려고 계획을 세우고 군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람나라 군대가 가면 그곳에는 이미 이스라엘 군인이 그곳을 방비해서 아람나라 군대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람 나라 왕이 고민하면서 그 신하들을 불러 누가 이스라엘과 내통하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신하 중에 한 사람이 ‘우리 중에 적의 첩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다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고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람나라 왕이 그렇다면 엘리사 선지자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잡아오라 명령을 내립니다. 마침 엘리사는 도단이라는 성에 있었는데 아람나라 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대를 보내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선지자를 섬기는 종이 아람나라 군대를 보고는 혼비백산해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때 엘리사 선지는 그 종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더 많으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 순간 하나님은 이 종의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눈이 열린 종이 보니까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 선지자를 둘러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속에 있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해 졌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계속되어서 결국에는 아람나라 군대의 눈을 멀게 하고 다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바로 이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종의 눈이 열려서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에는 애굽 군대만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도 안보이고 하나님의 능력도 생각이 안 납니다. 애굽 군인, 즉 삶의 문제만 보이기 때문에 두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다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시선을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홍해 앞에 서서 그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모세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다든지 애굽 군인이 추격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고 그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13절을 보면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모세는 지금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애굽 군대가 보였고, 홍해를 보았지만 모세는 그런 문제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을 따라 역사했습니다. 믿음을 발휘하는 현장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믿음을 활용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돌아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모든 질병이 치료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또 보십시오. 한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예수님은 이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온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을 드러낼 기회입니다. 어느 신용카드 회사의 광고에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라는 카피가 있습니다. 저는 똑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제가 생기거든 홍해 앞에 선 것과 같은 어려움이 닥쳐왔다면 이제 당신의 믿음을 보여 주세요” 그 때가 바로 당신의 믿음을 보일 때입니다. 믿음은 교회 안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문제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에겐 기적이 없습니까? 믿음을 활용 안해서 그렇습니다. 언제 우리가 망해도 좋다 한번 순종해보자 라고 결단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예 손해 볼 것을 각오하고 하나님께 드려 보자라고 결단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제대로 한번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해 보지도 않고는 늘 우리는 “하나님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혹시 당신은 믿음을 활용할 기회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어려운 때에 우리가 믿음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언제 활용하겠습니까?
어떤 대학생이 학기말에 경제학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기간인지라 어쩌다 시험공부를 못했습니다. 시험지를 받고 보니 전혀 알 수 없는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은 시험 답안지에 이렇게 똑똑히 썼습니다. “이 문제들의 해답은 하나님 만에 아실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며칠 후 시험 답안지를 돌려받은 학생이 보니 교수는 다음과 같이 거기에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점을 받고 학생은 빵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해피 뉴 이어”
가만히 있어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홍해 앞, 저 어려운 문제 앞에서 당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홍해 앞에서 너희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뻔합니다.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자.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자, 아니면 항복하자 등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으로는 앞에 있는 홍해와 뒤에서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한계를 너무 잘아십니다. 그러니까 설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야만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예 홍해를 갈라버렸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예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바닷길을 걸어 홍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내 방법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청년이 이번 여름에 자신이 수영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영을 배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에서 뜨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자꾸 몸이 물속으로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물에 안빠지려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면 세울수록 점점 몸을 가라앉고... 그래서 아예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고는 물속에 고개를 쳐 박았더니 그랬더니 몸이 물에서 뜨더라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힘을 빼고 몸을 물에다 맡기라’고 하길래 그렇게 했더니 수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답입니다.
그렇지만 애쓰고 몸부림치던 내 손의 수고를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뭔가 노력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경계해야할 속담이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혹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이런 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내가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감동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듭니다.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자신의 답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되요.” 아니면 “하나님,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아마 하나님이 “혼자 다 해 먹으라”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예레미야 애가3:26을 보십시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전에 내가 하던 노력을 멈추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입니다.
혹시 앞에는 홍해요 양쪽은 산이요. 그리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 닥쳐왔습니까? 그렇다면 그 순간이 바로 당신의 믿음을 발휘할 기회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 - 14절
가나안의 축복
1. 전 개
주홍글씨 여자 주인공 이은주 양(당시 25세)이 2005년 2월 22일 자살
가수 유니 (26세 본명 허윤 ) 2007년 1월 21일 자살 두 사람 자살 원인 우울증
우울증의 원인은 크게 3가지로
1. 유전적인 요인
가족 중에 우울질이 많으면 우울을 다른 가계에 속한 사람보다 쉽게 우울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생물학적 요인
호르몬, 신경전달물질 이상 등으로 인해 발생
3. 사회심리학적 원인
우울한 감정에 자주 빠지게 하는 것이 가정이나 학교, 사회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을 경우 그에 대 한 반응으로 발생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 “선진국병” 이라고 불리우는데
만사에 의욕을 상실하고 고립감, 허무감, 죄책감, 자살충동, 등에 사로잡히는 일종의 정신질환을 의미합니다.
유니의 우울증을 성경으로 판단하면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심적 부담감으로
곧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미래를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은 미래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을 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은 미래를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를 합니다.
우리에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2.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 두 번째
지난주에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 하나를 찾아보았습니다.
*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축복의 땅 가나안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고
*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사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축복의 땅 새 예루살렘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실패가 없었습니다.
금년에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가나안을 보지 못하면 실패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의 축복을 얻지 못한 두 번째의 원인을 찾고 그 대책을 찾아 은혜를 나누고져 합니다.
1. 축복을 받을 그릇이 부족한 이스라엘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고센 땅이나 바로왕이 있는 라암셋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는 큰 산이나, 강이나, 바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출애굽한 직후 바로 모세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명하실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바로가 다스리는 애굽 땅 홍해 서편으로 인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숙영한 바알스본 맞은편 바다가 거리라면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절반의 거리입니다.
왜 하나님은 가까운 거리를 두시고 다시 애굽으로 돌이키게 하셨을까요?
1) 애굽으로 돌이키신 이유
출애굽기 13장
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 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은주나 유니처럼 축복이 앞에 있지만 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오늘 우리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 수십 만 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들어와 일을 합니다.
반대로 우리나라에 아예 일을 포기한 사람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왜 외국인들은 일을 하는데 우리 젊은이 들은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까?
고통을 이기는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전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들을 싸움터에 보내면 당장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전쟁을 하지 않아도 언뜻하면 애굽 타령을 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복을 담을 그릇을 만들려고 하신 것입니다.
* 오늘 우리 교인들 문제입니다.
큰 교회가 편히 앉아서. 상가대의 찬양을 듣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과 설교만 듣고 성도님, 성도님, 손님대접만 받고 겨우 시간나면 구역예배 참석하고, 성경 몇 장 읽는 것을 영성훈련이라 알고 사는 교인들 신앙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아니합니다.
그런 교인들에게 개척교회 섬기라하면, 누가 갑니까?
전도하고, 헌신하라고 하면 합니까?
남을 자신보다 귀하게 섬기라고 하면 섬깁니까?
이들에게 주님위해 생명 받치라고 하면 받치겠습니까?
지금 북한이 처 들어와 총 대놓고 예수님 믿지 말고 교회 다니지 말라고 하면
아마 99.9%는 그대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져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그릇이 적기 때문에 이들의 훈련이 필요하여 가나안땅을 바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사람마다 큰 꿈과 비젼이 있지만 그 꿈과 비젼이 이루어질 때 그릇이 깨져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고, 특히 우리나라 장관들 보면 3일. 7일. 한 달 만에 깨져버리는 그릇이 있습니다.
차라리 적게 담았으면 오래도록 깨지지 않을 것인데, 너무 많이 담아 감당하지 못하고 깨져버린 것입니다.
우리교인들 꿈과 욕심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큼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고, 그의 백성들이 그릇에 담기 원하십니다.
창세기 16장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창세기 24장
35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그러나 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릇을 크게 키우는 것을 훈련이라 하고, 우리는 이것을 영성 훈련이라 합니다.
2) 현 상태 테스트
본문의 문장은 애굽 바로 ( 곧 세상 )에 하나님 자신을 타나내는 것이지만
또 하나 숨겨진 내용은 이스라엘백성들의 현재의 신앙상태를 테스트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테스트 하는데 가장 좋은 도구가 애굽 군대였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다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 찌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왜? 예수님 사십 일 금식 하신 후 마귀가 찾아 왔습니까?
마태복음 4장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큰 사역을 하시려고 30년 동안 준비케 하셨는데 예수님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마귀만안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마귀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말에 가화만사성 이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가화만사성은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해석하면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테스트하기 위해 애굽 왕 바로를 격동시킵니다.
바로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만 바로를 격동시키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현재의 신앙상태를 테스트하고 그들이 과연 가나안의 축복을 받을 그릇이 되는가를 점검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3) 테스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홍해바다가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 뒤에는 바로 왕이 직접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와 장관들이 그리고 큰 군대를 몰고 옵니다.
출애굽기 14장
6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 새
7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여기까지 올 때의 모습을 보면
출애굽기 14장
7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꼭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상황이 없으면 기세등등합니다. 입술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이겨냅니다.
*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의 반응
출애굽기 14장
10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 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 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사업이 부도직전입니다.
말기 암에 걸려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 생계의 위험이 닥아 왔습니다. 등, 등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문제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성도들에게 이런 상황이 닥쳐왔다면 어떤 행동이 나타나겠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 상황이 없을 때는 철웅 성 같던 성도들에게 이런 상황이 닥아 올 때 모세와 같이 흔들리지 않을 교인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런 큰 일이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일만 만나도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와르르 무너져버립니다.
성도들의 근심, 걱정 하는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흔들리면 430년 동안 지은 그 집은 모래성 같이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지 못해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이정도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 1차 이스라엘백성들의 신앙 테스트 점수 = 낙 제
* 이 모습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1)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이르러 흉년이 들었다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2) 롯은 소돔을 보니 애굽 같아 그곳으로 내려갔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4) 이 모습이 오늘 내 모습입니다.
잠시는 무엇인가 자신의 뜻대로 되어 가는 것 같지만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 아브라함이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 롯은 아내와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주님과 함께 고난과 고통을 함께 지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나도 거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3. 결 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축복을 받지 못한 두 번째 이유는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현재 신앙 테스트결과 낙제 점수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런 상태에 있다면 나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테스트한 목적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현 상태를 파악하고 가나안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드시려고
2.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꿈과 비젼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출애굽기 14장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모세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1.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시니 낙심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2. 너희가 보고 있는, 너희가 염려하는, 그런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3. 가나안의 축복은 반드시 너희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려고 예비하신 가나안의 축복이 보여 지고 믿어진다면,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면 나는 절대 죽지 아니합니다.
나는 절대, 실패자가 되지 아니합니다.
* 이와 비슷한 상황이 신약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 잡혀 죽으신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은 두려움과 근심에 쌓이게 됩니다.
* 저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6장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복음 송 “세상 이기신 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고 내게 새 힘 늘 주시리”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면 은주나. 유니 처럼 인생을 포기하고 맙니다.
주님은 금년에도 나에게 복을 주시려고 생명주셨습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이 닦아 와도 포기하거나 좌절하기 말고 피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심을 믿고 꼭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출처: 성경박사원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