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 단상 2/사투리]풍신난 놈이 풍신난 짓 허고 자빠졌네
아버지는 요즘말로 하면 독설가毒舌家이자 ‘막말의 대가大家’이었던 듯하다. 당신이 워낙 총명한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식들의 하는 일(공부, 농사 등)마다 못마땅했을 것이다. 특히, 일곱 자식 중 나는 더 눈에 덜 찼을 것이다. 소나 돼지 먹이려 꼴(깔)을 베라고 하면 어떻게 된 일인지 풀을 베는 게 아니라 손가락을 베어와 요란을 떨고, 벼를 벤다며 낫질을 하다 발가락을 베어, 눈코뜰 새 없이 바쁜 가을 수확철에 인근 읍소재지 병원으로 달려가 꼬매는 등, 뭐 하나 시키는 것을 제대로 똑부러지게 하는 게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 보탬이 안되는 나를 ‘재살이꾼(말썽꾼)’ 또는 ‘유월버섯’이라 불렀다. 6월 산속의 버섯처럼 예쁘장하게 잘 생겼는데, 먹을 수도 없는 독버섯으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버섯.
자식을 야단치고 혼내는 것은 좋은데, 그때마다 후렴구처럼 따라붙는 말이 별명 이외에도 ‘풍신난 놈’ ‘풍신이 풍신짓허네’ ‘아이고, 저 풍신’ 등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사사건건 이런 말만 들으니 기분은 늘 두엄자리였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아 참, 나는 못하지’ 자격지심自激之心이 절로 들어 움츠러들던 기억이 부지기수. 내 생각에도 혼날 일만 하니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어느 때에는 내가 못해도 칭찬 한번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원語源은 모르겠으나 ‘풍신’이라는 단어이다. 일설에 의하면, 풍신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풍신수길(豐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을 가리킨다고 한다. 1592년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외치며 조선을 침략한 원숭이 체모의 풍신수길이 7년전쟁에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난 것을 빗대, 조롱하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제법 일리가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제 아버지로부터 이 말을 듣지 않은 지 30년도 훌쩍 넘었다. 머리 속에서도 완전히 잊혀진 사어死語가 됐다. 아버지는 '얼벵아리(얼병아리.비실비실 결국 닭노릇도 못할 병아리)' ‘원허니 그럴 것이다’ ‘굼벵이도 둥글재주하네’ ‘쎄(혀)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으려 한다’는 말도 자주 하셨는데, 모두 거의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말인즉슨, 칭찬의 말이 전무全無했다는 것이다. ‘원허니 그럴 것이다’는 네가 원하는대로 그렇게 안될 것이라는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말이고, ‘굼벵이도 둥글재주한다’는 칭찬 같기는 한데 굼벵이의 둥글재주는 당연한 것이므로 그저 그렇다는 뜻이며, ‘쎄는 짧아도 침은 길게 뱉으려 한다’는 못난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는 뜻으로 능력 등을 무시하는 뜻일 듯하다. 사실 아버지로부터만 칭찬을 받지 못한 건 아니다. 세 형님들로부터도 아버지와 비슷한 말들을 들으면 들었지, 어떤 일이든 칭찬 한번 해주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못남 때문이었을 터이지만, 어느 때에는 속상했다. 대신에 세 명의 여동생에게는 자상한 오라버니처럼 행세를 한 때문인지 칭찬 내지 격려를 많이 받은 것같다. 한 동생은 핸드폰에 '꼬까(알록달록 예쁜) 오빠'라는 별명을 입력해 놓아 나를 감동시켰다. 흐흐.
그런데, 아내와 친한 친구들로부터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언행이나 사소한 작업 등)에 이런저런 ‘애정과 우정의 지적질’을 당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화를 내 주변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칭찬 한번 없이 오직 혼만 나던, 그 어릴 적 트라우마(정신적 외상外傷)가 작용한 때문일 듯하다. 화를 내기에 앞서 ‘그래, 알겠는데, 그렇게 말하지 말고 에둘러 칭찬 비슷하게 말해 주면 안될까?’라고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참으로 고약스러운 일이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도 어지간하면 아이들을 혼내거나 때리지 않으려 애쓴 까닭도 잠재의식적으로 이런 이유에서였던 듯하다. 요즘은 나의 잠재심리를 의식해서인지 웬만한 재살이를 해도 아내가 칭찬을 먼저 하는 바람에 되레 쑥스럽기도 하다.
이 이야기가 그렇다고 내 아버지의 막말이나 독설을 비난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때 그 시절, 부모, 특히 아버지들은 대개 비슷했을 것이다. 엄부자모嚴父慈母 시대, 부자父子간에 따뜻한 대화가 거의 오가지 않던 시절, 자식들을 센찬하게(약하게) 키우지 않으려는 당신의 의지가 칭찬이 아닌 혼냄 일변도의 교육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백수가 내일모레인 아버지께 그때 왜 칭찬 좀 해주시지 그랬느냐고 따지듯 물어본들 무엇하리. 어르신 마음만 아프게. 흐흐.
하여간, 귀향하여 사귄 친구의 말 중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희한하게도 ‘풍신나다’였다. 십 수년 동안 들은 적이 없는 사어를 이제 와 자주 들으니 어찌 쓴웃음이 나지 않겠는가. 하여 “어원을 아느냐?”고 물어보니 “몰라. 못난 놈이란 뜻 아니야?”라고 반문한다. 어원이 무슨 상관인가. 맞다. 못난 놈. 못나도 지독하게 못난 놈. 흐흐. 나는 이제 풍신난 놈은 벗어나 최소한 풍신난 짓허고 자빠지지는 않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첫댓글 유월 버섯이 아버지 모시고 사느라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