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영화 〈천일의 앤〉
영화 〈천일의 앤〉은 헨리 8세의 아내가 되었다가, 이후에 영국의 위대한 여왕이 되는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낳지만 끝내 비운의 죽음을 당한 앤 불린 왕비의 이야기를 그린 대형 역사물이다. 명작 사극들을 남긴 극작가 맥스웰 앤더슨의 1948년도 무대극을 영화화한 것이다. 찰스 재럿 감독의 치밀한 연출과 함께 리처드 버튼, 주느비에브 뷔졸드의 빛나는 명연기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되었다.
관록의 대배우 리처드 버튼의 상대역으로 나온 무명의 캐나다 출신 여배우 주느비에브 뷔졸드는 버튼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열연을 펼쳐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음악을 담당한 조르주 들르뤼의 주제곡 ‘Farewell My Love’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청하는 영화음악 중 하나이다. 이 영화 제목 〈천일의 앤〉은 앤 불린이 왕비로 있었던 기간을 가리킨다.
영화는 영국의 왕 헨리 8세(리처드 버튼 분)와 비운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쥬느비에브 뷔졸드 분)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춘다. 정확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역사 재현 드라마라기보다는 역사를 소재로 한 러브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한 손에는 헨리 8세를 쥐고, 또 다른 손으로는 영국을 움켜잡으려는 깜찍하게 영리하며 야심만만한 앤 불린과 왕위를 승계할 아들을 원하는 상남자이자 호색한 헨리 8세가 벌이는 궁중에서의 사랑과 암투를 아기자기하고 드라마틱하게 그린다. 한편 이 작품은 냉혹한 욕망과 야망을 쫓는 여러 인물들의 군상을 그리면서 궁중의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 등을 다양하고도 리얼하게 묘사한다. 당시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두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알코올중독으로 피폐해져 가면서 재기 불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리처드 버튼이 이 작품으로 화려하게 스타의 자리에 다시 복귀했다.
사진, 헨리 8세와 첫 왕비 캐서린
그러나 이 작품에서 단연 돋보이는 배우는 앤 불린 역을 맡은 주느비에브 뷔졸드였다. 그녀는 반항적이고 오만하지만, 현명함을 잃지 않는 당당한 여성의 모습을 멋지게 소화해 냈다. 그 밖에도 비운의 캐서린 왕비 역의 아이린 파파스, 추기경 울지 역의 앤서니 퀘일 등이 이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 퍼즐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앤 불린은 특유의 재기와 강단으로 헨리 8세의 마음을 얻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후계자인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그 당찬 성격이 오히려 파멸의 지렛대로 돌변한다. 앤은 외교관 아버지를 두었기에 일찍이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헨리 8세와 성서에 관한 담론을 나누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한편 왕비가 되는 날까지 절대 몸을 내주지 않으면서 확실한 미래를 약속받으려 했다.
사진, 앤 불린 역의 주느비에브 비졸드
앤의 야생화 같은 매력과 야망은 그녀가 단두대에서 흘린 피에 녹아들었다. 그래서 유럽의 변방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을 해상 강국으로 거듭나게 한 엘리자베스 1세 치세의 자양분이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 각색은 이루어졌지만, 역사적 사실의 흐름을 최대한 반영한 흔적이 역력한 명작으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 앤은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이렇게 독백한다. “내 딸 엘리자베스는 당신네 가문(튜더 왕가)의 어느 왕보다 더 위대한 왕이 될 거예요. 그 아이는 당신(헨리 8세)이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위대한 영국을 통치할 거예요. 나의 엘리자베스는 여왕이 될 거예요. 그래서 나의 피는 뜻 있게 쓰일 거예요.”
II. 웨일스의 영웅 리차드 버튼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명배우 리차드 버튼은 웨일스인들에게는 최고의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다. 영화라면 영화, 연극, 뮤지컬, 라디오 극 등 배우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 버튼은 출생지인 웨일스에서는 인간문화재로 꼽힐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이다.
중후하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와 말투, 화면과 무대 위에서의 무게감, 다양한 감정과 인물 캐릭터를 전달하는 출중한 능력 등에서 버튼은 세계 영화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또한 <햄릿>, <오셀로>, <리어왕> 등 셰익스피어 연극에서도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었다.
리차드는 1925년 웨일스의 탄광지대인 폰트리디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리차드 젠킨스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광부 집에서 13명의 자녀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14번째 아이를 출산하다 죽었다. 성격이 유쾌하긴 했지만 술과 도박에 빠져 살던 아버지여서 그랬는지 버튼은 두 살 때부터 큰누나네 집에서 키워졌다.
술과 도박으로 날을 새우던 아버지 밑에서 안되겠다 싶어서 누이가 입양 비슷하게 데려다 키운 것이다. 형들은 모두 광부였고 이 중 19살 위의 제일 큰 형 이보로부터 특히 보살핌을 받았다. 큰형은 리차드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훗날 리차드가 대배우로 성공했을 때 리차드는 형들을 모두 광부의 신세를 면하게 해주었다.
리차드는 집안에서 최초로 중등학교에 진학한 케이스였다. 그는 시, 노래, 스포츠 등 다방면에 소질을 나타냈다. 이때 학교 교사 필립 버튼과 평생의 인연을 맺는다. 리차드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필립은 리차드가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할 정도로 그의 뒤를 돌봐 주었다. 필립은 리차드에게 문학과 연기를 가르쳤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항공훈련부대에 입대했을 때 리차드의 상관으로 부임하면서 BBC 라디오 방송의 군 관련 다큐멘터리 나레이션과 라디오 연극까지 맡기는 등 물심양명으로 그를 도와주었다. 원래 필립은 리차드를 입양하려 하기도 했었다.
필립의 후원으로 유서 깊은 옥스퍼드 액시터 칼리지에 입학해서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액시터에 입학 할 때 필립 버튼이 법적인 피후견인이 되면서 리차드 젠킨스는 리처드 버튼이 되었다. 액시터에서 잠시 교육을 받은 리차드는 1944년 정식으로 입대하여 1947년까지 조종사로 근무했다. 제대하고 1949년 <돌윈의 마지막 나날>이라는 영화에 첫 데뷔하였다. 이 영화에서 버튼은 매력 있는 목소리와 존재감을 나타냈다는 평을 받았다. 이때 함께 출연했던 시빌 윌리엄스와 결혼했다.
사진, <클레오파트라>에서 버튼과 테일러
이후 여러 영화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존재감을 각인시키다가 1952년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이곳에서 찍은 <나의 사촌 레이첼>에서 골든 글로브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정상급 배우로 떠올랐다. 그는 일곱 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에 실패하면서 같은 영국계인 피터 오툴에 이어 가장 많이 탈락의 고배를 마신 기록을 세웠다.
그의 대표작은 <나의 사촌 레이첼>, <성의>,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독수리 요새>, <천일의 앤>, <에쿠스>, <지옥의 특전대>, <바그너> 등을 꼽고 있다. 버튼은 할리우드에서 왕성한 활약을 하는 한편 연극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종종 영국으로 돌아가 준수한 연극배우로도 활약하면서 여러 상을 수상하면서 셰익스피어 연극의 대배우 로렌스 올리비에의 후계자로도 손꼽히기도 했다.
1963년 버튼은 대작 영화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불같은 사랑에 빠지면서 두 사람 모두 배우자가 있었지만 이혼을 단행하면서 부부가 되었다. 테일러는 처음에는 버튼이 자아도취적이라 생각해서 떨떨한 시각을 갖고 있었지만 버튼의 끈질긴 공세에 손을 들고 말았다. 애초부터 버튼은 테일러의 미모뿐만 아니라 그녀의 뛰어난 연기, 활달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성격, 삶에 대한 철학, 유머스러움 등 모든 면에 홀딱 반했다. 두 사람은 결혼 이후에도 <예기치 못한 일>,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라> 등을 비롯해서 여러 편에서 공연했다.이렇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뜨겁게 사랑을 지속했던 두 사람은 결국 10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을 했다.
사진, <독수리 요새>에서 클린트이스트우드와...
그러나 1년 4개월 후에 이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했다. 테일러는 이후로는 다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버튼을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두 번째 결혼은 1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버튼의 고질적인 폭음이 다시 심각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두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면서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올랐다.
두 번씩이나 헤어지기를 반복했지만 테일러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리차드 버튼의 고향에 뿌려지길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버튼을 사랑했다. 또한 "리처드가 일곱 번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노미네이트 됐지만 단 한 차례도 트로피를 타지 못한 게 가슴이 쓰리다"고 그의 여러 번 거듭된 아카데미상 탈락에 대해 안타까운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와 이혼 후 버튼은 영화 <바그너>를 찍을 때 분장사 보조인 샐리 해이와 4번째 결혼을 했는데 이때 버튼은 57세, 해이는 34세였다. 그러나 버튼은 해이와의 결혼생활 중에도 테일러에 대한 집착을 못했고,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해이도 무척 괴로워했다. 해이는 버튼 사후에도 괴로움은 지속되었는데 그녀는 상당히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야 버튼이 죽기 직전의 삶에서 버튼의 중심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 두 번째 결혼식 장면
버튼은 12살 때 술을 마신 이후 평생 알코올에 의존해 살았는데 배우 리 마빈은 버튼이 한 자리에서 마티니를 연속으로 17잔 들이키는 걸 보고 질려버리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역시 술 좋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여배우 에바 가드너와 <이구아나의 밤> 촬영장에서 두 사람이 하루 종일 취해 있었다는 스태프들의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루에 담배를 5갑 피위 대는 골초이기도 했다. 결국 1984년 스위스 셀리니의 저택에서 <지옥의 특전대2>를 준비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별세했다. 향년 58세였다. 딜런 토머스의 시와 함께 묻혔다.
III. 헨리 8세와 그의 여인들
사진, 헨리 8세
헨리 8세는 영국에서 귀족과 왕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었던 장미 전쟁이 끝나고 6년이 지난 1485년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부왕 헨리 7세나 형인 아서 왕자를 따라다녔다. 이에 따라 외교적 동맹 관계가 국가를 운영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는 점을 유년기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겨우 10살에 형수를 맞이하러 형을 대신해 에스파냐에 다녀왔으나 형 아서 왕자는 결혼 후 6개월 만에 덜커덕 죽고 말았다. 부왕인 헨리 7세는 살아남은 차남을 철저히 보호하기 시작했다. 헨리 왕자에게 통치에 관한 모든 것을 직접 전수하고자 했다. 헨리 7세는 눈을 감으면서 헨리에게 왕위를 평화적으로 양위했다.
헨리는 형인 아서 왕자가 스페인의 캐서린과 결혼할 당시 10살 소년이었다. 당시 헨리 7세는 강력히 부상하던 스페인 왕국과 국교를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장남인 아서 왕자를 스페인 왕녀 캐서린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결혼한 이듬해에 아서 왕자는 몇 달 만에 사망했다. 캐서린은 양쪽 부왕의 뜻에 따라 이전 혼인을 무효화하고 다시 미성년인 헨리 왕자와 약혼했다. 헨리 7세의 사망 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즉시 캐서린과 결혼했다. 결혼 후 몇 년간 이들 부부는 좋은 금술을 유지하며 다양한 연회를 함 께 즐기는 등 서로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 당시 18살의 헨리 8세는 스포츠, 문학, 음악, 시 등 다양한 인문적 취향이 있었다. 그는 『유토피아』를 쓴 대학자 토머스 모어를 가까이해 그의 얘기를 즐겨 들었고, 나중에는 그를 대법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인문학자로 소문났던 에라스무스를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초빙해 그의 강연을 듣기도 했다. 헨리 8세는 활쏘기 부문에서는 전문가를 뺨칠 수준이었으며 말타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한 문학적인 소양까지 갖추고 있어 직접 책을 쓰기도 했고, 각종 악기를 수십 개씩 소유할 정도로 음악과 춤을 좋아했던, 못하는 것이 없었던 참으로 다재다능한 군주였다. 또한 특유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이용해 백성들의 호의를 이끌어냈다.
또한 캐서린과의 이혼, 그리고 앤과의 결혼 과정을 통해 로마교황에게서 과감하게 독립하면서 영국 국교를 창시했다. 파괴된 수도원의 폐허 위에 새로운 국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부패를 뿌리 뽑으면서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왕비와 세 사람의 총신을 죽이는 등 수틀리면 도끼로 목을 치는 헨리 8세의 치세는 항상 공포감이 어른거리고 있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런던탑의 단두대와 스미스필드의 화형장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항상 쉴 틈이 없었다. 한편에서는 그를 변호하기 위해 이러한 소름 끼치는 처벌이 제한된 소수에게만 내려졌다고 하지만 그의 권력에 대든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런 잔인함을 필요로 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헨리 8세의 여성 편력은 그의 정력만큼이나 참으로 대단했다. 1536년 한 해 동안에만 헨리 8세의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이 사망했고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은 참수되었으며, 제인 시모어가 세 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1537년 제인 시모어가 유일하게 아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헨리 8세의 상심은 상당히 컸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3년간은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540년 총신 토머스 크롬웰의 적극적인 권유로 또다시 독일 클레베의 왕녀인 앤을 맞아들였지만 바로 그해에 앤이 박색인 데다가 촌닭 같다고 이혼하고는 역시 같은 해에 다섯 번째로 당시 19살의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2년 뒤인 1542년에 캐서린 하워드도 간통죄로 목이 잘렸고, 이듬해인 1543년 헨리 8세는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와 결혼해 비교적 안정을 찾았다. 이처럼 다양한 그의 여성 편력의 배경에는 사실 아들을 낳아 튜더왕가를 굳건하게 이어가고자 하는 강한 의중이 실려 있었다.
아래에서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둘째 왕비 앤 불린에 관하여 상세히 알아본다.
첫 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
캐서린은 스페인 왕가의 고귀한 딸로 태어나 이미 왕비의 삶이 예상되었으나 아들을 생산 못 해 내쳐졌다. 뼛속 깊이 뿌리박은 가톨릭주의자로, 매사에 헌신적이었으나 원칙주의자이자 고래 심줄 같은 황소고집의 소유자였다.
스페인의 왕 페르디난도 2세와 여왕 이사벨 1세의 딸이었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첫 왕비이자 후일의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 1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캐서린이 15살의 아서 왕자(헨리 7세의 장남)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16살이었고 캐서린을 호위하는 행렬에 끼어 있던 헨리 왕자(후일 헨리 8세)는 10살이었다. 당시 그녀는 스페인 왕실에서 자라면서 몸에 밴 경건하고 우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 병약한 체질이던 아서 왕자는 캐서린과 결혼한 지 몇 달 뒤에 죽었다. 그리고 나중에 헨리는 캐서린이 이때 제대로 신방을 치르지 못했다고 이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했다. 그녀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헨리의 아버지 헨리 7세는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선 캐서린과 아서의 동생인 헨리 왕자를 약혼시켰다. 당시 헨리는 미성년이라 아직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에 스페인과의 동맹 관계가 별 볼 일 없게 되자 헨리 7세는 이 결혼에 명분이 없음을 아들에게 알리고, 헨리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헨리 7세 사망 후 즉위한 헨리 8세는 즉각 캐서린과 결혼식을 치르고, 이후 몇 년간 두 사람은 다정한 사이로 지냈다. 캐서린은 첫아들을 낳았으나 몇 주 만에 죽었다. 이후 캐서린은 다섯 번의 임신과 유산을 거듭하지만 결국 생존한 유일한 혈육은 딸 메리뿐이었다. 캐서린에게 왕자 출산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헨리 8세의 마음은 돌아섰다. 헨리는 때마침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눈독을 들였다. 먼저 그는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다. 캐서린은 이혼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왕궁에서 쫓겨났다.
1532년에는 딸 메리와도 떨어져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결국 1536년 암으로 사망했다. 죽을 때까지도 캐서린은 자신만이 영국의 정통성 있는 왕비라는 생각을 끝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는 유일한 혈육 메리에게 스페인의 유명한 교육자들을 데려와 양질의 교육을 시켰고 가톨릭 신앙을 지키도록 했다. 메리는 후일 메리 1세로 즉위한 뒤 영국에서 로마 가톨릭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피의 메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어머니를 폐비시킨 신교 세력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앤 불린은 캐서린처럼 왕실 출신은 아니었으나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토머스 불린과 명문가인 하워드가문 출신 어머니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앤은 12살부터 프랑스의 궁정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나중에 스코틀랜드 여왕이 되는 프랑스의 왕비 메리 스튜어트의 시녀로 발탁되었으며, 왕비의 통역도 도맡아 했다.
용모는 눈에 확 띌 정도는 아니었으나 재기 발랄하고 활달한 성격에 매혹적인 검은 눈의 앤은 1522년 영국으로 돌아와 왕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캐서린 왕비의 시중을 들다가 허리가 잘록하고 교태가 철철 흐르는 그녀의 모습을 본 헨리 8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앤은 헨리의 마음을 얻게 되자, 맹랑하게도 왕비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절대로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태도는 헨리 8세의 애간장을 더욱 태웠다. 왕은 대신들과 의회를 달달 볶으면서 마침내 캐서린과 이혼에 성공했다. 이혼하기 직전인 1532년 12월에 앤은 결국 임신했으며 1533년 1월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해에 태어난 아이는 공주인 엘리자베스였으며 이는 헨리를 무척 실망시켰다. 이후 앤은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으나 아들을 낳는 데 실패했다. 앤은 캐서린 왕비처럼 든든한 친정의 인맥도 없었다. 더구나 앤은 고분고분한 성격도 아니었고 자존심 강하고 야심만만했다.
그러나 너무 나대다가 인심도 잃고 점차 왕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뭐니 뭐니 해도 아들 출산의 실패가 결정타였다. 헨리의 사주를 받아 그녀를 제거하려던 세력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녀와 친오빠를 비롯해 여러 남자들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버렸다. 헨리 8세는 냉정하게 앤을 내쳐버렸다. 결국 앤은 런던탑에 갇혔고 법정에서 자신의 죄목을 차분하게 하나하나 부인했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그녀는 1536년 목이 잘렸다. 결국 헨리와 앤 불린의 관계는 폭발적인 열정으로 시작해 앤의 잔혹한 죽음으로 끝났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