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그래프(Chronograoh) (외 2편)
강 순
밤은 그러니까 동사다
깨다 일어나다 가다 보다 앉다 서다 눕다 울다 들이
뭉치고 엉키는 자리에
꿈틀대다 치대다 우물거리다 씹다 내뱉다 걷다 삼키다 들이
해변 위 파도처럼 넘나든다
운명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시간 장치 속에 들어가 있으면
밤은 죽은 듯 활개 치는 동사다
초침보다 더 빨리 어제 한 말을 후회하고
오늘 못다 한 말을 반성할 때
동사들이 쓸려오고 쓸려간다
가만히 있어도 밤이 우리를 움직인다
동사는 과거와 현재의 우리를 합한 말
숨을 내쉬면 네가 썰물처럼 쓸려가고
숨을 들이쉬면 내가 너를 해변에 심어 놓는다
우리는 밀려갔다 밀려왔다 밀었다 당겼다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지구의 달처럼
우리 인력과 원심력을 밤에 슬피 쓰고 있다
쓴다, 라는 말은 내가 가장 아끼는 동사
너의 발자국과 나의 속눈썹도 모두 쓴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지
우리는 파도의 심장을 달고
시간 속에서 서로를 철썩이다가
우리를 다 쓰기도 전에
파고를 서둘러 떠나는 심해 잠수정 같아
우리를 떠나 더 깊고 캄캄한 우리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밤의 동사들 그것이 우리인 거지
오월의 레퀴엠
오월 속에서 죽은 사람들이 쏟아져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묻힌 휘장 속에서, 전단을 뿌리듯 손을 내밀어요
저 손들을 덥석 잡고 싶어요 무슨 사연인지 받아들고 싶어요 아이스크림 같은 잠일지 몰라요 계절 지난 꽃잎을 일기장 갈피에서 꺼내듯 메마르게 바스러지는 목숨들 우크라이나에서 미얀마에서 예멘에서 광주에서 제주에서 사월에서 오월에서 아무렇게나 쏟아져요
어떤 장면은 TV 뉴스에서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으로 쓰러지며 말을 잃고 어떤 장면은 영화 속 사람들이 신음을 흘리다 눈을 감아요 또 다른 장면, 바닥에 버려지는 사람들의 연속, 그들은 폭풍 같은 악몽 속에서 몸부림치다 서서히 잠잠해져요
나는 저 손들을 보관할 병이 없는데 오월은 한 겹 두 겹 계속 쌓여가요 어떤 화해도 없이 태양의 흑점처럼 검어지는 계절, 죽은 자들이 퇴장 없이 계속 반복되는 무대, 신들은 이미 버려졌고 죽은 사람들도 계속 버려지는 무대
언제 얼굴을 들어야 할지 몰라 젖은 벌레처럼 구석에 웅크리다 나는 물어요 언제 깨어날까요 당신들은 새인가요 날아갈 곳이 없어 내게 국경을 묻는 건가요 박쥐의 동굴은 사나흘 더 가야 찾을 수 있는 아주 깊은 곳
오월이 나를 가두고 있는지 내가 오월을 가두고 있는지 욕조는 아이스크림 같아요 검은 잠이 계속 쏟아져요
그때 버린 신(神)
불면과 기도, 질문과 대답에 무관심한 신은
스물셋, 그때 이미 버림받았어
방에는 불온한 침묵이 자라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낙서들
가난이 새겨진 발목이 검게 앓는 동안
방은 스스로 문장을 습득하기 시작했어
아무도 방을 열어보지 말아 달라고
신이 없어 더 드라마틱하게 죽을 수 있다고
낮은
밤과 같은 속성을 지니기 위해
두꺼운 커튼과 뾰족한 연필을 무기로 길들였어
누구 없나요?
나는 핏기 없는 문장 속에서 이미 죽었나요?
책 속 유명한 여성 작가들은 대부분 불운하고
핀란드나 북극은 너무 멀어 울음의 대안이 되지 않아
버려지는 습작 시들, 설익은 문장들을 잡아먹고
꿈틀꿈틀 독뱀이 고개를 쳐들 때
밤마다 연필심을 부러뜨리고
불면의 검을 휘두르는 손목
나약한 문장들을 여러 번 타고 넘을 때
어둠은 더욱 자라나 검은 회오리처럼
아픈 발목이 아득해져 도망칠 수조차 없는 세계
그리 오래 어둠을 키운 건
너무 일찍 배운 슬픔의 구조 때문
내게 무능한 신은 폐지 속에서 백번 천번 더 죽어나갔어
—시집 『크로노그래프』 2023.2
-------------------------
강순 / 본명 강수원. 1969년 제주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1998년 《현대문학》으로 시 등단. 시집 『이십 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크로노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