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를 더듬어 보면 밀교(密敎)나 민중 종교에 기반한 민란이 일어나
왕조가 무너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소설 《삼국지》의 앞머리를 장식하는 황건적의 난도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신흥 종교에 뿌리를 두고
농민들을 규합함으로써 한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백련교(白蓮敎)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종파와 비밀결사를 탄생시키며
역사의 변곡점마다 중국 사회를 뒤바꾼 대표적인 종교다.
백련교는 남북조 시대부터 청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일어난 수많은 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들은 때로는 봉기의 핵심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때로는 인력과 탄탄한 조직을 제공했다.
그중에서도 ‘백련교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1796년의 민중 봉기는
청 왕조를 몰락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이다.
현군(賢君)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 100년간의 황금기가 막을 내리고
아편 전쟁으로 대표되는 쇠망기가 시작되는 고빗길에는
바로 백련교의 난이 있었다.
건륭제
건륭제는 청나라 황금시대의 마지막 왕이다. 이후 청나라는 봉건 제도의 악습을 답사하며 몰락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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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교는 남북조 시대 동진의 승려인 혜원이
불교를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창설한 종파인 ‘백련사(白蓮社)’를 뿌리로 한다.
송나라 시대의 승려 모자원이 불교와 마니교를 혼합해 만든 ‘백련종(白蓮宗)’이 그 뒤를 이었다.
여기에 중국인들의 삶 깊숙이 녹아 있는
유교와 도교적 세계관이 융합되어
후대의 백련교가 형성되었다.
지역마다 조금씩 변형이 있기 때문에
백련교의 교의를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공통된 핵심 사상은 미륵불 숭배다.
미륵불은 세상이 말세에 이르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다는 부처님을 말한다.
일종의 메시아 사상이다.
미륵불이 내려오면 천년지상 왕국이 도래하고,
지배 계급의 가혹한 착취로부터 벗어나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교리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민중들을 매료시켰다.
착취와 억압뿐인 현실 속에 살던 백성들에게
미륵불 사상은 희망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이고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
백련교의 역사가 탄압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혁명적인 교리로 세력을 불려 나가는 종교가 지배 계층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이름을 달리하는 여러 분파가 생겨난 것은
조정의 억압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천리교, 청수교, 문향교, 백란회, 선천교 등이
모두 백련교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들이다.
이들은 지역 공동체에 빠르게 스며들어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했고,
마니교에서 들여온 말세론과
천년왕국이라는 유토피아 사상을 중심으로 지배층의 가혹한 탄압에 반발했다.
이런 백련교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으로 이어진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백련교는 ‘명교(明敎)’라고도 불렸다.
암흑 같은 혼란을 물리치고
찬란한 승리의 빛을 가져다준다는 메시아 사상 때문이다.
명 태조 주원장이 새로 세운 나라의 이름을
‘명(明)’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비천한 탁발승 출신인 주원장의 기반이 된 세력이 바로 백련교였다.
그는 백련교가 일으킨 최초의 대규모 민중 반란이라 할 수 있는
‘홍건적의 난’에 참여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건국했다.
백련교는 원나라 시절 몽골 족의 차별대우에 시달리던 한족들에게 희망의 등불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백련교를 사교(邪敎)라 하여 가혹하게 탄압했다.
백련교는 명대에도 민중 속으로 들어가 수십여 차례 민중 반란을 주도했다.
명 태조 주원장
탁발승 출신으로 홍건적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각지의 군웅들을 굴복시키고 명나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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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774년 산둥 성에서 일어난 청수교의 난,
1796년에서 1806년에 걸쳐 일어난 백련교의 난,
1813년 산둥과 화베이에서 벌어진 천리교의 난 등이
모두 백련교도들이 일으킨 민란이다.
1796년에 일어난 백련교의 난을 총지휘한 지도자는 왕총아(王聰兒)라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양양 지방 백련교의 교주로
백련교도들을 탄압하는 조정에 반대해 모반을 준비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에 아내인 왕총아가 남편을 대신해 모반의 깃발을 든 것이다.
청 왕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이 여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당시 백련교의 세력은 서쪽 끝의 쓰촨 성부터 동쪽 끝의 산둥 성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들이 양양의 봉기에 호응하자 반란은 순식간에
후베이, 쓰촨, 허난, 산시, 간쑤 성까지 퍼져 나갔다.
반란 세력은 순식간에 4, 5만 명으로 불어났다.
왕총아는 지략이 뛰어났다.
무리가 모여들어 토벌대가 파견되면 토벌대의 눈을 피해 흩어지고,
적군이 안심하면 어느 새 모여들어 게릴라전으로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청군을 연전연파했다.
왕총아가 이끄는 군대에 여러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백련교 집단은 성을 빼앗을 힘은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를 다스릴 행정적인 노하우는 갖고 있지 않았다.
백련교는 민중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는 있었지만,
대안 세력으로 자리 잡을 역량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백련교 집단은 성을 장악해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변경의 산악 지대로 물러나야 했다.
여기에 청군이 농민들과 백련교 집단 간의 연결 고리를 끊어
반란군을 고립시키는 전술을 폈다.
군량과 인력을 보급받지 못하자 반란군의 전력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청 왕조를 지지하는 지방 신사 계급이
토벌군에 가담하면서 전세는 정부군 쪽으로 빠르게 기울었다.
패주한 왕총아의 반란군은 토벌군에 쫓겨 산으로 들어갔다.
청군은 산 속까지 추격했으나 반란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고,
결국 산을 포위하고 시간을 끄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군량이 다 떨어진 반란군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반청(反淸)의 깃발을 높이 든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왕총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왕총아가 죽었다고 해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반란은 9년이나 계속되었다.
청 왕조는 천신만고 끝에 반란을 평정했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먼저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재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청나라 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제는 잉여 세액 7,800만 냥을 남겼지만,
청 조정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1억 2,000만 냥을 소모했다.
무엇보다 큰 손실은 이 과정에서 정부가 국정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청 왕조는 지방 신사 계급의 도움 없이는
민란 하나 제압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이때부터 청조는 사실상 권위와 신뢰를 잃고 쇠퇴했다.
백련교의 난은 내리막길로
접어든 청 왕조의 쇠퇴를 부채질한 결정적 계기였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65800076
첫댓글 처음엔 팔왕의난 인줄 알았는데 반동탁연합 에피소드를 지나 백련교의 난으로 바뀌는 형세일까요? 중국이 왜 마약과 종교에 관대함 따윈 개나 주었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주원장의 홍건적도 백련교이고 나라이름도 명으로 지은 이유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신천지 탈퇴 간부의 증언을 담은 기사나 홍준표의 인정등을 보며 이건 보통일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판데믹에 , 미중 대결에, 우크라이나 일측촉발직전 까지. 멘탈 정말 꽉 붙들어 메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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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글의 가장 주목했던 부분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련교 집단은 성을 빼앗을 힘은 가지고 있었지만,
"도시를 다스릴 행정적인 노하우는 갖고 있지 않았다.
백련교는 민중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는 있었지만,
대안 세력으로 자리 잡을 역량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
@Red eye 그리고 이런 사파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경계와 감시를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 및 법률이 필요해 보입니다. 각 정당은 당원모집요건과 온라인 가입에 대해 더욱 신경써야 할 것 같고 오픈 프라이머리 방식의 경선 폐지에 대해 심각히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로마황제의 영역에 발을 들어 놓지 말거라!
@Red eye 백련교는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라 임협과 묶인 존재였습니다.
@Red eye 신비주의 종교결사가 가미된 임협의 무리는 황건적 이래로 그 연원이 길지요. 단순한 사이비 종교쟁이들의 난으로 보긴 힘듬요.
청나라는 지방 신사 계급의 도움 없이 백련교를 진압 못하는 무능한 정부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