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석회장님의 카톡에서]
손흥민 아버지 손정웅(1962년-Present).
명지대 졸업후 상무에 입대하여 2년간 활약한 후 1986년 말 현대에 입단한다.
그해 최전방 공격수로 출장하여 5골을 넣고
1986년 U-23 브라질 순회 축구대회 대포로도 활약했으나 1988년 부상을 당한다.
88년 올림픽 대표감독 박종환 감독의 요청으로
일화 천마에 89-90년 입단하여 조커로 활동하였으나
고질적인 부상으로 28세의 나이에 은퇴한다.
은퇴후, 스페인, 독일, 브라질 등 축구 강국들을 돌아다니며 각국의 유소년 축구를 접한 후 춘천 유소년 FC감독을 맡아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해 왔다. 그는 20년 동안 축구선수로서 스피드와 패기만으로 뛰었던 자신을 부끄러워했는데, 자신의 아들 손흥민을 축구부에 보내지 않고 매일 4년 동안 직접 기본기 훈련만을 시켰다. 공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기 전까지는 패스도 슈팅도 시키지 않았다.
손흥민(1992년-Present) 선수는 하루에 매일 3시간씩 연습했다.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노는 연습. 왼발로만 트랙 한 바퀴,
오른발로 한 바퀴, 이번에는 양발로 한 바퀴. 그러다 보면 땅이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 착시 현상을 겪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무엇보다 아버지는 슈팅 연습을 시키지 않았고 축구경기도 하지 않고 오직 공 감각과 개인기 연습만 시켰다. 함께 연습하던 친구들이 경기를 하지 않으니 떠나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기초 훈련만 주구장창 시키는 축구감독을 학부모들은 신뢰하지 않았다. 손흥민 최종학력은 고등학교 중퇴다.
시합에서는 골 감각과 골이 어느 쪽으로 올지 늘 시뮬레이션 연습을 시켰다. 어느 정도 기본기가 완성되자 2007년 바깥 세상으로 내보냈다. 중고등부에서 7개월동안 선수생활로 주목받았고 곧바로 16세 이하 국가대표팀에 소집되고 연습생 신분으로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흥민이 유럽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해 첫골을 멋지게 넣은 날 아버지가 PC를 뺏어버렸다.
"너... PC로 골 넣은 거 보고 또 보고 하지 말아라. 자만하지 말아라. 공이 들어갔을 뿐이야. 네가 골을 하나 차 넣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기자들이 월드클래스라고 손흥민을 치켜 세우자 아버지가
"그런 말 하지 마세요.얘는 월드클래스가 아니예요."
라고 말했다. 또 아들을 따로 불러서 "넌 절대 월드클래스가 아니야" 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많은 축구선수들을 봐왔고 어느 순간 선수가 망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축구인생이 그랬기 때문에 몸속 뼈져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기존의 한국축구 방식으로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것. 생각과 행동이 받쳐줘야 한다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매 순간 겸손해야 하고 다음 경기에 더 개선된 모습으로 골을 넣어야 한다. 어제의 나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개선된 기술로, 새로운 기술로, 혼자가 아니라 팀과 함께 하는 경기로. 개인이 뛰어나야 팀에 헌신할 수 있다. 팀이 나에게 헌신하면 안된다. 팀에 내가 부담이 되면, 그때는 내가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아버지 손웅정은 2018년 MBC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아들 손흥민은 절대로 월드클래스가 아니다. 축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고 흥민이와 동료 선수들의 피와 땀이 있기 때문에 흥민이의 골이 나오는 것이다. 정말로 살얼음판을 걷듯, 돌다리 두드려가며 건너듯 언행을 조심해야 하고 (프로 선수 생활은)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젊은 동안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선수 은퇴를 일년 일년 늦춰가야 한다. 흥민이의 연애와 결혼도 선수 은퇴 후로 미루기로 했다."
골 기록: 손흥민 144골> 차범근 121골> 박지성 27골
손흥민이 통산 골 기록도 최다이고, 현재 진행형이이다. 차범근은 외국 여행이 금지된 시절의 한국에서 해외에 진출한 개척자였다. 그는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깨고 10년간 분데스리가의 정상에서 군림했다. 차범근의 현역 프로축구 기록은 372경기에 121골이다. 차범근의 이 기록은 이후 손흥민에게 깨지기 전까지 30년 동안 한국서 유지된다. 세계 축구 기술의 발전과 한국 육성 시스템의 진보를 고려하면, 30년 전 과거의 인물이 이 기록을 세웠다는 것에 입이 떡 벌어진다.
손흥민은 현재 종합 403경기 144골로 이 기록을 넘어섰다. 손흥민이 정면 공격수가 아닌 측면을 담당하기에 더 놀라운 기록이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토트넘 홋스퍼의 에이스로서 기술적인 완성도가 대단하다는 전문가의 평가다. 특히 왼발, 오른발 감아차기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힌다고 분석된다.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만 207경기를 소화하고 총 27골을 달성했다. 다만 박지성의 업적은 골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박지성은 팀을 위한 헌신적인 플레이를 주로 했고, 멀티 포지션 역할 및 공수 전환에 능했기에 슛과 골 찬스에 특화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21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과 함께 손흥민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분석한 결과 1조 9885억 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손흥민의 신화는 진행중이다. 앞으로도 한계없이 마음껏 날아오르기를 기대한다.
손흥민~🙌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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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을 슬기롭게 보내는 16가지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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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준 스토리 축구와 김기수 ※
1. 축구
대한중석 사장 박태준은 어느 날 상동 광산 현장에서
낮익은 광부들을 발견했다.
축구 국가 대표선수 함흥철 김정석 조윤옥 등이었다.
국가대표 감독 한홍기의 얼굴도 보였다.
사정을 알아봤다.
축구단 운영에 연간 1억 원쯤 소요되어 평소엔 광부로 부려먹다가
시합이 닥아오면 합숙훈련을 시키는데 대우도 형편없다고 했다.
부아가 치밀었다.
뒷구멍으로 권력에 상납해온 돈만 끊었어도 너끈히 키웠을 축구 선수들을 광부로 부려먹다니
이건 절약이 아니라 낭비 중의 낭비였다.
선수들에게 당장 보따리 챙겨 서울로 가라고 지시해 놓고
대한중석 축구팀을 제대로 육성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호령했다.
석효길 황종현 등 당대의 일급 선수들이 모여 들었다.
곡괭이 든 축구선수들을 우연히 만난것이 번듯한 실업축구단 하나를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박태준은 축구를 좋아했다.온 국민이 즐기는 국기인데다 곤궁함에 빠진 한국이 축구로는 번번이 일본을 이겼기 때문이다.
대한중석 축구단은 뒷날 포스코 축구단 창단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대한중석 축구단이 이름을 날니던 1966년, 한국축구는 안보차원의 비상이 걸렸다. 북한이 런던 월드컵대회에서 이태리를 꺽고 8강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서울 심장부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정보부장 김형욱이 혼쭐나서 부랴부랴 '양지팀'을 급조했다. 대한중석도 선수 차출을 당했다. 북한과 극단적 체제 대결을 벌이는 상황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2. 김기수
1965년 가을 어느날 박태준은 청와대에 불려갔다. 그가 맡은 대한중석이 적자의 터널을 탈출하여 흑자체제를 굳히는 즈음이었다.
"우리나라에 동양챔피언 있는거 알아?" "무슨 챔피언 말씀입니까?"
"김기수란 친구가 있어.물건이야.이게 굉장히 쎄다는데 우리 국민의 사기진작을 위해 세계 챔피언도 나와야지.
지금은 우리 민족이 뭐든 우수하다는 자신감이 절대 필요해." 훅 먹이는 시늉을 보인 박정희가 멋쩍게 웃었다.대한중석을 구했으니 덤으로 김기수도 세계 최고로 키워보라는 뜻이었다.
박태준은 즉시 김기수를 데려오게 했다. 신체 좋은 친구가 나타났다. 악수를 나누었다.아주 크고 묵직한 손이었다. "어디 출신인가?"
"함흥에서 내려왔습니다." "1.4후퇴 때?" "예,흥남에서 배를 탔습니다." 1.4후퇴 때 배를 타고 내려오다가 강릉,포항에 못 내리고 여수까지 가게 되었다고 했다.
"복싱은 언제 배웠나?"
"여수 여강 중학교에서 시작했습니다."
박태준의 가슴으로 묘한 기운이 번지고 있었다.1.4후퇴, 함흥,흥남ᆢ.이런 단어들이 김기수에 대한 관심을 더 자극했다. 1950년 겨울의 그는 원산,함흥,성진을 거쳐 청진까지 북진했었다.
"너의 상대는 어떤 놈이냐?"
"이태리의 벤베누티라는 놈입니다.“
"그런 놈이 있어? 자신있나?"
"한 6개월 연습에 전념하면 얼마든지 붙어볼 자신 있습니다."
박태준은 김기수에게 필요한 것을 다 말하라고 했다.
무엇보다 도장이 급하다고 했다.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경희대 근처라고 했다.
총무이사를 불러 집과 가까운 곳에다 가장 빠른 시일 안에 도장을 지어 주라고 지시했다.며칠 뒤 신설동에 터를 구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근사한 권투체육관이 생겼다.
주먹으로 세계 일등이 되라는 기원을 담아 '권일'체육관이라고 작명했다.
김기수의 wba주니어미들급 타이틀 매치는 1966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박정희도 박태준도 관전했다.비슷비슷 하게 맞고 때리는 예측불허의 승부였다.
대통령 앞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해졌다. 밤10시가 넘어 15회전이 끝났다.
한국 심판은 김기수 승, 이태리 심판은 벤베누티 승,
라디오에 귀를 대고 있는 모든 국민이 초조했다.
코쟁이 주심이 '김기수 승'이라 했다.
텃세가 붙었으면 어떤가.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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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손흥민은 현재 종합 403경기 144골로 이 기록을 넘어섰다. 손흥민이 정면 공격수가 아닌 측면을 담당하기에 더 놀라운 기록이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토트넘 홋스퍼의 에이스로서 기술적인 완성도가 대단하다는 전문가의 평가다. 특히 왼발, 오른발 감아차기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힌다고 분석된다.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만 207경기를 소화하고 총 27골을 달성했다. 다만 박지성의 업적은 골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박지성은 팀을 위한 헌신적인 플레이를 주로 했고, 멀티 포지션 역할 및 공수 전환에 능했기에 슛과 골 찬스에 특화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21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과 함께 손흥민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분석한 결과 1조 9885억 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손흥민의 신화는 진행중이다. 앞으로도 한계없이 마음껏 날아오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