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禪과 관법 / 법정스님 글
한동안 소식이 끊겨 궁금했는데, 올 여름 안거를 지리산에서 보내게 됐다니 반가운 소식입니다.
물과 구름처럼 흐르며 떠도는 운수납자(雲水衲子)에게 일정한 주처(住處)란 당초부터 있을 수가 없고,
인연 따라서 걸망 부려놓고 정진하며 지내는 곳이 내 집이요, 인연터 아니겠습니까.
처음으로 빈 암자에서 홀로 지내게 됐다고 하니 홀가분해서 좋기는 하겠지만
거기에는 투철한 수행자의 자기 질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또한 참견할 사람도 없어
좋은 면도 있겠지만, 자칫 잘못 길들이면 게으름에 빠질 함정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사는 사람이 게을러 일상의 기거동작에 질서가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뛰어난 도량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곧 마굴(魔窟)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편지에는 선원의 조실스님한테 받은 `이 뭣인고?' 화두에 전혀 의정(疑情)이 일어나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리고 화두선과 관법은 어떤 것이 더 좋은 수행법인지를 물었습니다.
화두(話頭)란 잘 아다시피 옛선사들의 말씀이나 문답에서 이루어진 기연(機緣)으로
학인들이 끓임없이 참구(參究)해야 할 선의 과제입니다. 물론 이 화두는 중국의 선불교에서 시작된 것이며,
특히 임제선(臨濟禪) 계통에서 성행된 참선 수행법입니다.
같은 선종 중에서도 조동선(曹洞禪)에서는 산천 초목이나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며 낙엽이 지는
온갖 자연현상을 그대로 화두로서 받아들입니다. 현성공안(現成公案)은 이를 가리킵니다.
화두란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존재나 현상의 극치와 근원을 참구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극치와 근원에 대한 의심(疑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온전한 화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뭣인고'나 조주의 `무자(無字)' 화두는 너무나 많이 우리 귀를 스치고 지나간 말이기 때문에
그 신선감이나 의심이 제대로 일어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육조 혜능 스님의 그 시절 회상에서는, 또는 조주 스님의 문하에서는 그때의 말이나 문답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에 그것이 화두로서 긴장감이나 현실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과거의 그 말씀이나 기연들을 일러주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다같이 형해화(形骸化)된 관념으로 다루기 때문에 긴장감이나 현실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절로 화두에 대한 의심이 전 존재로서 일어나야지 억지로 의심하려 하거나 머리로 헤아리는 것은
망상이지 진짜 화두가 될 수 없습니다.
수행자는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정직하며 솔직해야 합니다.
자신의 길이 잘못 든 줄 알았다면 더 망설일 것 없이 곧 바른 길을 택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뭣인고 화두에 아무리 애써도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월과 정력을 부질없는 데다 쏟아버리지 말고
미련없이 거기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개척하십시오.
실참실오(實參實悟) 즉, 진실한 삶을 위해서 라면 전통이나 인습을 박차고 일어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화두선과 관법은 어떤 것이 더 좋고 못한 우열이 없습니다. 관법은 부처님 당시부터 행해진 수행법으로
지금도 동남아 상좌부(上座部) 불교권에서는 널리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화두선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중국의 선불교에서 시작된 수행법으로 한국 불교에서도 이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화두선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이고 관법은 소승선(小乘禪)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런 말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방법의 수행을 하건 간에 최상승의 심지를 계발(啓發),
지혜와 자비가 충만해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혜명(慧命)을 잇고 있다면 그는 최상승선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화두선을 하건 관법을 하건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자기 한몸의 깨달음만을 위해 앉아 있다면 그는 바로 소승선을 닦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최상승선과 소승선의 갈림길은 화두선이냐 관법이냐에 있지 않고,
수행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참구하며 어떻게 회향하느냐에 달린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예전 사람들은 단순하고 순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선사들의 말씀이나 문답이
그야말로 참구의 극치인 화두(話頭)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소란스럽고
거칠디거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게 몰입하는 수행법이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몰입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이 요긴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살피는'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따르지 않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염처경(念處經)》에서 부처님이 친히 설한 바입니다.
선법(禪法)을 처음으로 중국에 전한 것으로 알려진 달마 스님, 그 분의 가르침에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삶 전체를 이끌게 된다(觀心一法 總攝諸行)'고 한 것도 바로 이를 가리킨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달마 스님은 관법을 몸소 닦고 그걸 가르쳤습니다. 그때는 화두선이 나오기 이전입니다.
달마 스님이 관법을 앆고 화두선을 닦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소승선자로 치면서
최상승선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과 옛 선사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고. 이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럼 우리는 무엇 때문에
새삼스레 좌선을 하면서 애써 닦고 있습니까? 이에 대한 답을 옛 스승들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애써 정진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이를 본증묘수(本證妙修)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닦지 않으면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깨닫기 위해서 닦는 것과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정진을 한다는 입장은 그 방향이 아주 다릅니다.
어떤 바탕 위에서 닦을 것인가는 각자의 수용능력에 달렸습니다.
아무쪼록 이 여름철 안거에
그 어떤 말에도 속지 말고 몸소 체험하고 스스로 확인하면서 그윽한 삼매의 꽃을 피우기 바랍니다.
佛日會報 <9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