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해가 짧기 때문에 관광하기에는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다. 류블랴나에 도착한 시간이 5시
반으로 금방 날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류블랴나로 가는 길
버스에서 내려서 프레세렌 광장으로 간다.
오른 쪽에 보이는 분홍색이 성 마르코(마가)성당이다.
인솔자가 프레세렌 광장에서 류블랴나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한다.
류블랴나는 인구는 30만이 되지 않는 작은 도시로 류블랴니차 강 유역에 위치해 있으며 북부
디나르알프스 산맥의 높은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자연적으로 형성된 저지(低地)로 안개가 자주 낀다.
로마시대부터 만들어진 도시로 기원전 15년경에 로마 제국이 이곳에 에모나(Emona)라는 군사기지를
건설하면서 만들어 졌다. 에모나는 전략도시로서 류블랴나 협곡을 통제하는 파노니아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으나 5세기에 훈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6세기에 슬라브인의 일파인 슬로베니아인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루비가나’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였으나 10세기에 마자르족에게 다시 파괴당했다. 이후 바이에른 공국의 지배를 받다가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선 직후 오스트리아와 함께 바이에른 공국에서 분리되었고, 1144년 류블라냐 성이
건설되었다. 이후 오랜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면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슬로베니아는 이탈리아 왕국 치하에 들어가고, 이곳에는 소규모 자치주인 류블랴나 주가
들어선다. 2차 대전 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가, 1991년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 후
슬로베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류블랴나는 중세시대 성채가 특징인데 성채와 강 사이에 옛 시가지가 있으며 1895년에 심한 지진을
겪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바로크 양식의 오래된 건물 몇 채만이 남아 있다. 신시가지에는 대규모의
티볼리 공원이 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 대부분은 18세기에 지은 것이다. 그밖에 박물관,
화랑, 오페라 극장, 에드바르드카르델리대학교(1595, 류블랴나대학교로 창립), 신학교(1919),
3개의 예술원, 슬로베니아 과학예술원, 야금학연구소 등이 있다.
류블랴나 시내..인터넷
류블랴나...인터넷
류블랴나를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프레세렌 광장(Prešeren Square)에서부터 관광을 시작한다. 류블랴니차 강을 건너 맞은 편 산에 류블랴나 성이 있고 그 아래 시청이 있는데 시간이 있는 관광객들은
성으로 올라가서 성 안에 있는 박물관과 류블랴나 시내를 조망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관광객들은
광장과 다리를 건서 시청 앞 광장 그리고 류블랴나 대성당을 구경하고 드레곤 다리를 건너서 강변의
야외카페를 거쳐서 도살자의 다리와 삼중교를 거쳐서 다시 프레세렌광장으로 와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류블랴나 관광을 마치게 된다.
프레세렌 광장 주변 ...가운데 흐르는 것은 류블랴나차 강으로 용의 다리와 삼중교 들이 보인다.
구글지도
삼중교와 프레세렌 광장
류블랴냐 성
류블랴나 성은 11세기에 처음 지어졌지만, 15세기경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시절에 증축되었고,
17세기에 들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전시회 장소와 박물관으로 상용되고
있다고 한다.
삼중교에서 찍은 사진에 성이 보인다....앞에 보이는 곳은 시청앞 광장이다.
시청 앞 광장
류블랴나 성당 가는 길의 노천카페
인증 샷 한 번 때리고...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류블랴나를 대표하는 성당인 성 니콜라스 성당은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목조로 지어진 성당을 1701~1708년 안드레아 푸조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당에는 정면과 측면에 있는 2개의 청동문이 있는데 1996년
교황 바오로 2세의 류블랴나 방문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류블랴나 대성상(니콜라스 성당)의 청동문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기념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여섯명의 주교는 이 성당에 공이 있었던 주교들이라고
아래는 세마포에 쌓인 예수
이 청동문도 그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맨 위에 내려다 보고 있는 부조는
건ㅁ교황 바오로 2세이다.
대성당 내부...들어가 보지 못해서 인터넷으로 본다.
오전에 장시 서는데 지금은 늦은 시간이라서 비어 있는 시장
용의 다리로 가는 길에 보이는 조각상...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모습이다.
용의 다리로 가는 길의 회랑
류블랴나의 상징인 용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 용의 다리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원래 1901년 목조
다리로 건설되었던 것을 다시 재건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건설 당시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이름이 다리 이름이 될 뻔도 했지만, 용이 류블랴나의 상징인 만큼 용 조각상 덕분에
용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리의 네 귀퉁이에 용이 한 마리씩 세워져 있다. 날개부터
꼬리까지 섬세하게 조각된 용 조각은 류블랴나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많이 등장한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용의 다리...다리 네 곳에 용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동양에서는 용이 상서로운 동물이지만 서양에서는 사악한 동물로 묘사된다.
용이 류블랴냐의 상징이 된 것은 류블랴나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이아손(Iason라르고 원정대의 영웅) 에
의해 세워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왕자였던 이아손은 황금 깃털을 찾아 바다를 항해하다
흑해 지방에서 황금 깃털을 발견해 지금의 류블랴나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곳에 살던 용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다리는 용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 것 때문에 더 유명해졌지만 슬로베니아에서 아스팔트를
사용한 최초의 다리이고, 유럽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다리이기도 하다.
도살자(정육점)의 다리..이곳도 자물쇠가...
도살자의 다리 위에 있는 조각상...개구리라고고 하는데...
도살자의 다리는 중앙시장의 정육점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 가에 있는 노천카페...사진만 찍는다.
완전체가 되었다.
삼중교(Tromostovje)는ㄴ 1280년부터 있던 목조다리가 불타 버리자 1842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조반니 피코에 의해서 석조다리가 개축되었는데 당시 강성한 도시였던 빈(Wien) 베니치아(Venezia)
그리고 류블랴나가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3중교로 만들었다고 한다.
삼중교 다리
시청 쪽에서 프레세렌 광장을 보고 찍은 삼중교
삼중교에서 찍은 용의 다리 쪽
프레세렌 광장(Prešeren Square) 광장은 슬로베니아 어로는 프레세레노프 광장(Prešernov trg)이라고
하는데 류블랴나의 중심 광장이며 만남의 장소, 각종 축제, 류블랴나 카니발, 콘서트, 스포츠 경기,
정치 집회 등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가장 번화하고 활기찬 장소로 주위에 많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어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다.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고 한다.
프레세렌 광장 ..비누방울 쇼를 한다.
주변의 레스토랑
프레세렌 광장에 있는 프레세렌 동상
프레세랜 광장
프레세렌 광장에서 보이는 1분홍색의 프란체스코 성당...처음에는 붉은 색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분홍색이 되었다고
프레세렌의 동상은 1900년 10월에 정식 동상 제작을 의뢰 하여 오스트리아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가
사망한지 56년이 지난 1905년 9월 10일에 완성되었다. 청동상의 높이는 3.5m이며 프레셰렌의
머리 위에 있는 여인은 바위 위에 앉아 월계수 잎을 들고 있는 뮤즈인데 이 뮤즈까지의 높이를
더하면 9.6m에 이른다.
광장의 이름은 슬로베니아의 독립 운동가이자 국민 시인인 프레셰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프란체 프레셰렌(France Preseren1800~1849)은 슬로베니아가 나은 대표적 낭만파시인으로
슬로베니아의 언어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특히 프레셰렌의 시(詩) ‘축배’는 슬로베니아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하여 와인을 마시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썼다고 한다.
현재 이 시는 슬로베니아의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의 시에 스탄코 프렘를이 작곡을 하였으며,
1989년 9월 27일에 국가로 제정되었다고 한다.
시인이 되기 전에는 변호사였던 프레셰렌은 1834년, 부유한 상인의 딸인 젊고 아름다운 18세의
‘율리아 프리미체’를 사교모임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그의 나이 34세 때였었다. 소심했던
프레셰렌은 16살이나 어린 율리아에게 그 사랑을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결국 율리아와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1836년, 안나 옐로브섹(Ana Jelovšek)이라는
여자와 동거를 하고 배우자처럼 대했지만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편 율리아는 1839년 부와 지위가 높은 남자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럼에도 프레셰렌은 멀리서
그녀를 바라만 보며 짝사랑을 이어갔으며, 그녀를 향한 수십 편의 시를 썼다.
그리고 1849년 2월 8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율리아를 잊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프레셰렌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이곳에 동상을 세울 때 두
사람을 서로 마주보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낭만적이다.
프레세렌 동상 맞은 편에 있는 건물의 율리아 상
프레세렌을 불쌍하게 생각한 후세 사람들이 동상 앞에 율리아의 부조를 마련했다고 한다.
성으로 올라 가 봤으면 좋을 뻔 했지만 광장을 중심으로 대충 둘러보고 이곳에서 15㎞정도 떨어져
있는 돔잘레라는 곳의 숙소로 간다. 내일은 포트토이나와 피란을 보면서 슬로베니아를 떠나
크로아티아로 간다.
버스에 내렸던 곳으로 돌아간다.
숙소가 있는 돔잘레라는 곳...
숙소..슬로베니아에서는 하룻밤만 잔다.
아침 저녁을 뷔페식으로 먹는 식당으로 가짓수는 별로 없지만 유럽의 호텔에서 먹는 식사로는
부족함이 없다.
류블랴나...유투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