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과 부의 이동 & 돈되는 땅의 4가지 조건
대한민국 제1의 도시 서울특별시
서울은 25개 구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망>
대한민국 6대광역시
인천,대전,대구,광주,부산,울산
구럼,대한민국 제2의 도시는 어디일까요?
아시다시피 부산입니다.
서울과 가까운 인천이 아니라
왜멀리 떨어진 동남쪽의 끝에 있는
부산이 제2의 도시가 되었을까요?
그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박정희 대통령이 모티브로 한 독일의 아우토반
독일 아우토반은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완공은 1940년대에 되었는데 건설 목적은 우리나라
경부고속도록 건설처럼 경제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실제 실업률이 줄어들었고
국민의식도 확고하게 성장했다고 하네요.
독일 아우토반 하면 속도가 무제한이냐? 라는 질문이 많은데
원래 아우토반은 속도가 무제한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최근에는 속도 제한을 둔 구간이 많아졌으며
무제한 구간이라 할찌라도 130Km의 속도를 권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도 무제한이라는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라 봐야겠죠.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1970년 7월 7일
박정희,육영수 여사,정주영 회장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일의 아우토반을 보고 감명받아
태국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던 정주영 회장에게
경부고속도로의 견적을 내 보라고 지시했다.
"당시 건설부에서 추산한 비용은 700억이었는데
정주영 회장은 이에 턱 없이 적은 280억원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자 정주영 회장은
'돈도 기술도 장비도 부족하지만 우리가 해낼 수 있다'고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또 박 대표는 "정 회장이 최고 경영자인데도 늦게까지 지프차에서
인부들과 함께 먹고 자며 목디스크가 걸릴 정도로 일을 했다"며 "심지어 건설 인부 중
정 회장보다 시멘트 반죽을 잘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최초의 고속도로 공사다보니 장비가 부족해 도로를 정비할 롤러를 소가 끌고 갈 정도로 열악했다"고 전했다.
"당시 건설비가 모자라 롤러를 한 대 사다 분해해서 복제해 쓰곤 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공사가 어려움을 극복한 사연도 있었다.
"겨울에 오산 인터체인지 부근 공사 때 트럭 뒤에 불을 달아서 언 땅을 녹이며 공사를 진행했고
서산 간척지 사업 때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자 폐 유조선으로 바닷물을 못 들어오게 막았다"고 말했다.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한남IC에서 출발하여
서울,대전,대구,부산까지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
기존의 철도·국도와 중복을 피하면서 수도권과 영남공업지역
인천항과 부산항의 2대 수출입항을 연결하는 대동맥 역할을 하며
전국을 1일생활권으로 묶고 있다.
지리적으로 일본,미국 등 과 가까운 영남권 개발은 시대적 흐름이었습니다.
부산외에도 울산,포항,마산,창원,광양,여수,거제 등
경상도 도시들은 이후 산업화와 함께 한국경제를 이끌며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강남, 송파, 잠실일대
1970~80년대 경제성장이 진행되면서 논(전)과 밭(답),산(임야),묘지 등
미개발지였던 강남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 잠실마을의 역사와 강남개발
송파구 잠실동(옛날 잠실마을) ... 잠실(蠶室)은 누에를 사육하는 곳이지요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잠실을 두었던 데서
마을이름이 잠실(蠶室)이 되었는데 서울 동쪽에 있으므로 동잠실 또는 잠실리 부리도 등으로 불렸다고 하지요
지금의 서대문구 연희동 쪽에 있던 서잠실 송파구 잠실동,신천동에는 동잠실이 설치되었으며
잠실마다 실을 뽑아서 승정원에게 바치게 하였다고 하네요
서초구 잠원동의 잠실은 송파구 잠실보다 늦게 생겼으므로 '신잠실'이라고도 불렀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지형도 바뀌며 생활풍습도 바뀌었지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치루면서 우리의 산야는 벌거숭이가 되었고
해마다 어김없이 대홍수가 찾아와 잠실일대는 모조리 범람하고 훼손되며 황무지로 변해 갔지요
지금은 강남을 대표하는 곳이지만 50여년전만해도 서울의 한 모퉁이에
한강으로 둘러싸인 90여만평의 모래밭이 있었을 뿐이었지요
해방이후 마을 주민들은 모래밭에 채소농사를 지으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장마철 대홍수에 농경지가 수몰되면 마을 주민들은 때꺼리를 걱정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마을사람들은 밥벌이를 위해 강건너로 이주하기 시작했지요
서울잠실은 50년 전만 하더라도 인가조차 거의 찾아볼수 없는 허허벌판의 황무지였어요
그래서 잠실마을을 도심속에 낙도라 불렀다 하네요
그러나 해방후 1949년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따라 이 지역은 신천동, 잠실동으로 시에 편입되었지요
그런후 많은 세월이 후른뒤 강남개발 정책에 따라 사통팔달(四通八達)의 도로망이 완비되었고
이 일대는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형성되고 신시가지가 건설되면서 오늘날처럼 비약적인 발돋움을 하게된 것이지요
인구 천만의 국제도시, 서울특별시
우리나라 인구는 약 5,000만명,경기수도권인구 약2,400만명
서울은 한반도의 중심부 서쪽에 있어요.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가 시 전체를 둥글게 감싸지요.
서울의 기후는 따뜻하고 비가 많은 남부 지방과 춥고 비가 적은 북부 지방의 중간 정도예요.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이가 크고, 강수량은 우리나라 평균 강수량 정도이지만,
비는 여름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편이에요.
오늘날 서울은 거대한 도시예요.
하지만 옛날 조선이 서울을 도읍으로 정할 때만 해도
지금의 종로구와 중구에 해당하는 지역만이 서울 땅이었어요.
그 당시 서울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였지요.
조선 시대 이후 서울은 정치·경제·교육·문화·교통의 중심 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했어요.
서울이 어떻게 커지고 발달했는지 살펴볼까요?
오늘날 서울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한강은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울 남쪽 바깥을 흐르는 강이었어요.
당시 한강에는 한강 철교와 한강 대교만 있어서 한강을 건너다니기가 쉽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한강 남쪽에 도시가 개발되면서부터 한강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다리들이 많이 놓이게 되었어요.
1960년대 이후 서울은 대략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어요.
1970년대에 들어서는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남대문 주변은 길이 넓어지고
백화점, 호텔, 은행, 대기업 들의 고층 빌딩이 속속 들어섰어요.
서울 인구가 1천만 명이 넘어 시작한 1980년대 말부터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들어섰어요. 아파트 건설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늘날 서울은 아파트의 숲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예요.
1970년대에 서울은 우리나라 공업의 중심지이기도 했어요.
영등포와 구로 지역의 공업 단지는 우리나라의 수출 산업을 이끄는 역할을 했지요.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오염 문제 등으로 공장 대부분이 서울 변두리나 그 밖의 위성 도시로 옮겨 갔어요.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거대 도시 서울은
교통 문제, 주택난, 대기 오염 등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요.
특히 교통 문제는 매우 심각해요. 교통 상황을 알려 주는 교통 방송이 등장하고
지하철이 서울 구석구석에 놓여도 교통문제는 아직 쉽게 해결되지 않지요.
주택 문제도 서울의 골칫거리예요.
좁은 지역에 인구가 많이 몰려 있어 집값이 다른 지역에 비해 무척 비싸거든요.
정부는 인구를 분산시키려고 수도권에 일산과 분당 등 신도시를 건설하여 아파트를 많이 지었어요.
정부의 노력으로 서울의 인구가 조금 분산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크게 줄지는 않고 있어요.
지금 서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예요.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종묘 등 조선의 궁궐과 유적들은 전통을 간직한 역사 도시 서울의 모습을 보여 주고,
동대문 패션 상가와 우리나라 정보 통신 산업을 이끄는 강남 테헤란로의 불빛은
문화와 산업을 이끄는 최첨단 도시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답니다.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활력이 만나 조화롭게 발전하는 서울
3개의 동심원(내부, 외곽순환도로, 제2외곽순환도로) 중심축에 주목하라
3개의 순환도로의 동심원을 따라 확장 중인 서울의 개념도
미국 도시생태학자 버제스(E. Burgess)는 1925년 도시가 중심지역으로부터
외부로 동심원을 이루며 확대되어 간다는 ‘동심원 이론’을 주장했다.
CBD(Central Business District ; 중심업무지구)를 중심으로
CBD, 점이지대, 근로자 주택지, 중산층 주택지, 교외주택지로
동심원이 나란히 도시가 확장되어 간다는 원리다.
이 이론은 지금 서울의 확장과정에 적용, 분석해도 의미가 있는 도시생태 이론이다.
지도를 펼쳐보면 서울의 도심에서 3개의 링(ring ; 순환도로)으로 동심원을 형성하고 있다.
첫 번째 내부순환도로, 두 번째 외곽순환도로, 세 번째 제2외곽순환도로(예정)를 따라 확장 중이다.
특히 3개의 순환도로와 주요 교통축이 만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부순환도로 안쪽은 더 이상 개발되거나 확장될 수 있는 부지가 거의 없다.
기존 형성된 구도심에 대한 재건축, 재개발을 중심으로 도시재생이 추진된다.
‘강남 재건축, 강북 재개발’이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도시개발이론의 통섭적인 개념을 현대 도시에 적용하면 입지가치 분석이 가능할 수 있다.
도시가 생성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도시 생태학적 관점에서 전통적 이론을 되돌아 보고 적용해보면
도시 성장의 큰 흐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부동산 시장은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는 복합적인 행태를 띠고 있는데,
지금처럼 부동산 시장 변화 예측이 힘든 시기에는 전통적 이론을 적용해보는 것이 시장변화를 읽는데 의미가 있다.
010-2400-2148
좋은땅 구해주는 남자
카카오톡 아이디 khd2148
강남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땅
놓치면 후회할 명품토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선착순 분양합니다.곧마감됩니다.
강남땅을 저렴하게 살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시간과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용기와,배짱,부자마인드를 갖추신
강남불패의 신화를 꿈꾸는
안목있는 투자가들을 모십니다.
응답하라 1988 마지막회, 성동일 판교로 이사 “농사 지으러?”
성동일은 “어디로 이사 가느냐”는 트럭 운전수의 질문에 “판교로 간다”고 답했다.
이에 트럭 운전수는 “그 곳에 가서 농사짓는 것이냐”고 물어 웃음을 자아냈다.
썰전 153회
판교로 이사 간 덕선이네가 얻은 수익이 무려 40억?!
덕선이네 벼락부자(?) 등극!
만약 덕선이네가 그 때 퇴직금 2억으로 땅을 사서 지금까지 판교에 살았다면,
현재 시세로 대략 40억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덕선이네가 땅을 언제 팔았는지가 중요하다.
1996년 신도시 개발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1998년 개발 용지로 지정됐을 때,
그 후 토지 보상이 시작됐을 때와 아파트 분양이 시작됐을 때,
그리고 지금 모두 시세가 다르다"고 덧붙였다.
"판교 땅을 매입해 돈벼락을 맞은 사례들을 늘어놓으며 "
판교 신도시 개발 발표 이후 판교에 사는 부모님들을 찾아오는 자식들이 많아져,
불효자들이 효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라고 말해 큰 웃음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