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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제퍼슨의 대외 정책
루이지애나 매입과 버의 음모
1804년 루이지애나를 표기한 지도
첫 번째 취임사에서 제퍼슨은 광활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미국의 세력권 안에 집어넣으려는 자신의 비전을 피력하였다. 당시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무렵, 루이지애나 영토는 파리 조약에 따라 스페인이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제1통령에 올랐으며 1801년에 스페인을 합병하자, 자연히 스페인의 영토였던 루이지애나는 도로 프랑스가 가지게 되었다. 1802년 뉴올리언스 항이 미국과의 무역을 할 수 없게 되자, 제퍼슨은 서부의 주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제퍼슨은 제임스 먼로와 로버트 리빙스턴을 파리로 보내 프랑스와 뉴올리언스 매입에 대하여 협상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폴레옹은 아이티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던 투생 루베르튀르(Touissant L'Overture) 장군과 싸우느라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국고에 돈이 없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협상 대표로 외무상인 탈레랑을 보내 뉴올리언스는커녕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 값을 1500만 달러로 제시하였다. 본래 미국이 뉴올리언스를 샀던 가격이 2,000만 달러였으나 뉴올리언스 면적의 수백 배에 해당하는 루이지애나를 미국의 제시가보다 500만 달러나 싸게 주었다. 제퍼슨은 협상 소식에 매우 기뻐하였으나 곧 그는 땅을 살 법적인 권한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헌법을 신봉하던 제퍼슨은 땅을 살 권한을 의회에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수정헌법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루이지애나 편입에는 반대의견이 있었고, 매입에 반대하는 이들은 "사람도 살지 않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늑대와 떠돌이 인디언, 엄청난 쓰레기뿐인 땅을 가뜩이나 부족한 돈으로 사들였다"며 제퍼슨을 비난하였다. 제퍼슨 본인도 "미주리 강 상류에는 매머드와 큰땅늘보를 비롯해 선사시대 생물들이 존재하고, 소금으로 이뤄진 산이 펼쳐져 있다"라고 믿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땅값 지불 지연과 프랑스의 국고가 아이티의 반란에 들어갈 군비로 인하여 갈수록 비자, 나폴레옹은 탈레랑에게 만약 미국이 루이지애나 영토의 값을 빨리 지불하지 않으면 프랑스는 영국에게 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라고 지시하였다. 먼로와 리빙스턴이 고심하고 있을 때, 제퍼슨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 수정헌법의 이익도 따지지 않은 채 상원에게 병합 조약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연방주의자들의 적은 반대를 제외하고 대다수 상원의원들이 이를 찬성하여 미국은 루이지애나 영토를 미국에 준주로 편입시켰으니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바로 루이지애나 매입이라고 부른다. 이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는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났으며 새 영토가 셍긴 제퍼슨은 이제 그 곳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과 스페인인, 멕시코인,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였다. 각 민족 간의 다툼을 막기 위해 제퍼슨은 루이지애나 정부법을 만들어서 루이지애나 준주를 다스릴 정부를 만들고 세금을 걷을 체계 또한 갖추게 하였다. 하지만 제퍼슨은 미국 독립 당시 '대표없는 곳에 과세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의회에 의원들을 보내지도 못하는 준주인 루이지에나에 과세를 하였다.
1803년 7월 4일 제퍼슨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고 공표하였다. 이후 루이지애나 매입이 끝나자 제퍼슨은 새 영토에 무엇이 있는지 관찰하기 위해 서부 탐험대를 만들어 보냈다. 메리웨서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가 대장으로 임명되어 새 영토에 있는 과학적인 자료 수집과 분석, 원주민의 민족사 기술, 원주민과 미국 간의 무역망 설립과 새 영토의 자연 탐험을 목적으로 삼아 미지의 서부로 떠났다.
루이지애나 준주에 있는 프랑스인, 스페인인 등 주민들의 불만은 전 미국 부통령 에런 버가 나폴레옹에게 접근하고 다시 루이지애나를 빼앗아 새로 친프랑스적인 국가를 만들려는 버의 음모를 낳았다. 버는 워싱턴 D.C.에서 부통령으로 뽑히지 못하고 출신주인 뉴욕 주에서도 주지사로 당선되지 못하자 크게 분노하던 버는 루이지애나 준주에서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인 제임스 윌킨슨과 멕시코를 공격하고 자신을 "멕시코의 황제"라 참칭하였으나 윌킨슨은 도중에 버를 배신하고 제퍼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전임 부통령이 이러한 반역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에 격노한 제퍼슨의 군사적 행동으로 버는 연방군에게 체포되어 워싱턴 D.C.로 호송되었다. 버가 구속된 후 제퍼슨은 버에게 내란반역죄 혐의로 기소하고 재판을 열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릴 때, 대법원장 마셜은 당시 반역 도모를 했던 모임에 버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설명하였다. 이를 들은 제퍼슨은 크게 놀랐고 마셜과 대법관들은 버가 반역죄 혐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하며, 그가 무죄임을 판결하였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조지 워싱턴 행정부 당시 미국은 지중해에서 해적들의 노략질을 받을까 두려워, 북아프리카에 있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국 중 하나인 바르바리 제국에 일정한 조세를 내고 보호를 요청하였다. 제퍼슨은 점차 바르바리가 조세를 올려서 국고가 바닥이 날 지경이 되자, 이에 항의하여 1801년 미국 해군과 해병대를 트리폴리로 보냈다. 미국의 함대와 스웨덴에서 파견한 약간의 함대가 바르바리의 해군과 맞서 싸웠다. 4년간 계속된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은 '트리폴리 해안으로 진격한' 미국 해병대가 승리하였다. 미국군의 전함이 침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05년 승리자로서 바르바리와 평화 조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당시 미국의 사망자는 35명, 부상자는 64명이었으나 바르바리군의 사망자는 800명, 부상자는 1200명이었으니 미국의 최초의 해외 원정으로서 꽤 큰 성과였다.
유럽과의 관계
제퍼슨의 두 번째 임기 중,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세계의 패권을 놓고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었다. 워싱턴이 중립법을 발표하자, 제퍼슨은 미국이 어느 편에 들지도 또는 어느 나라와도 무역을 해서는 안된다는 워싱턴의 견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나폴레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국 정부는 분명 중립을 선언하던 미국의 선박들을 약탈하고 그 선원들을 붙잡아 영국의 군대에 강제로 징용하였다. 영국 의회는 긴급 칙령을 공포하여 유럽과의 모든 무역을 금지하였다. 나폴레옹은 1806년의 베를린 칙령과 1807년의 밀라노 칙령에서 효과적으로 유럽으로부터 영국 무역을 고립시키고 이를 무시하는 중립국의 선박을 마음대로 침략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제퍼슨은 이러한 영국과 프랑스의 행동에 미국의 중립성이 흔들리다며 심각하게 동요하였다. 이 긴장은 버지니아 주 해안에서 일어난 체서픽-레퍼드 사건에서 절정에 다다랐는데 영국의 전함 레퍼드 호(The Leopard)가 미국의 선박 체서픽 호(The Chesapeake)를 수색하겠다는 것이었다. 체서픽 호의 선장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레퍼드 호는 체서픽 호에 대포를 발사하여 미국인 선원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론은 제퍼슨에게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받은 제퍼슨은 의회의 협조를 얻어 1807년 출항금지법에 서명하였다. 이 법안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어느 국가든 다 무역할 수 있는 미국의 중립성을 존중해 줄 때까지 영국 또는 프랑스와의 무역을 일체 금지하였다. 배를 출항시킬 수 없자, 많은 미국인들은 즉각 유럽과 위험한 밀무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제퍼슨은 이에 크게 노하여 연방정부의 권한을 이용, 연방군을 동원하여 미국의 해안을 지키고 캐나다와의 무역로를 차단하였으며 의심스러운 밀무역업자의 선박을 공격하여 침몰시켰다. 또한 수송선을 포함한 모든 배는 군대나 정부 관료의 승인을 받지 않고는 승객이나 짐을 실어 나르지 못한다고 명령하였다. 출항금지법은 민주공화당에게 매우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 경제에서 무역을 많이 의존한 뉴 잉글랜드 지방은 다시 연방주의자당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제퍼슨은 출항금지법을 지지하는 도중 연방정부에게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당하였다 주장하는 지지자들의 지지를 잃었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는 출항금지법 적용 후, 자신들의 경제가 그리 심각하게 나빠지지 않았다며 이러한 제퍼슨의 정책을 크게 비웃었다. 1808년 제임스 매디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의 평판은 출항금지법으로 매우 나빠졌고 민주공화당의 여당으로서의 지위 역시 흔들리게 되었다.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
대학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버지니아 대학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버지니아 대학교의 더 런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제퍼슨은 계속 공직에서 일하였다. 그는 더욱 수준높은 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지만 다른 대학들처럼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대학을 짓기를 매우 희망하였다. 제퍼슨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할 것이라 믿었고, 또한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대학이 특정 계층이 아닌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800년 1월에 조지프 프리스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퍼슨은 대학을 짓기 전 십수년간 대학 건축과 운영 계획 등을 만들어 놓았다고 썼다.
1819년 마침내 버지니아 대학교의 설립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식으로 개교하지는 않아 1825년에야 대학에 학생들이 편입되었는데 버지니아 대학교는 학생들에게 원하는 선택과목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한 최초의 대학교였다. 당시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건축 사업 중 하나로 제퍼슨의 교육 이념에 따라 교회보다는 도서관을 중요시하였다. 사실 대학 캠퍼스 예배당은 그의 본래 계획에는 없었으나 설립하도록 허락하고, 대신 예배당이 대학교에 관한 모든 교육적인 정책에 철저히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1826년에 죽을 때까지, 제퍼슨은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을 자신의 집인 몬티첼로로 초대하였는데 이 중 훗날 유명한 소설가가 되는 에드거 앨런 포도 있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교의 교정을 만들면서 교육과 신생 공화국의 농업 중심의 민주주의를 강하게 나타내는 디자인을 채택하였다. 전문적인 학생을 육성하려는 제퍼슨의 교육 이념은 그의 교정 설립 계획에서도 잘 드러났는데 전문적인 학생을 육성하기 위해 만든 교정을 더 런(The Lawn)이라고 이름붙였다. 대학생들은 여러 개의 교정 별관에서 독특한 자신들만의 전문 분야를 개척해 나갔는데, 별관은 사각형의 건물로 교실, 실험실, 교무실, 그리고 기숙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매우 특이한 것이, 정면에서 보면 별관들의 크기가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크기가 약간 다르다. 또한 별관들은 각 학생용 시설과 여러 개의 회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큰 정원과 텃밭은 뱀 모양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제퍼슨이 주창한 농업 중심의 생활방식을 강조하고 과학적 농업 기술을 가르쳤다.
제퍼슨의 매우 질서있고 꼼꼼한 교정 설립 계획은 중앙의 더 런이라 불리는 사각형 건물을 놓고 좌우에 서로 연결되는 회랑과 학생 전용 건물들을 세워놓아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안뜰은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과 같이 평지에 에워싸져 있었다. 도서관의 맞은편에 있는 부지는 훗날 세워질 건물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잔딧밭으로 내버려두었다. 더 런에 있는 건물들의 크기는 중앙의 도서관에 가까워질수록 크기가 달라지는데 계속 가까이 갈수록 건물이 차이가 나며 건물의 위치 역시 계속 도서관으로 다가갈수록 약 1m씩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중앙의 도서관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이러한 디자인은 미래로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제퍼슨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스타일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는 과거 민주주의 국가들의 건축 스타일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가장 잘 나타낼 것이라 생각하였다. 각각의 건물들은 모두 고대 2층의 신전의 정면으로 디자인하였고 도서관은 로마의 판테온을 모델로 삼아 건축하였다. 이 소박한 벽돌로 쌓은 교정 건물들의 조화는 종교와 교육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공공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질서정연한 건축학적 결정체였다. 이러한 교정 설립 계획과 건물 건축은 오늘날까지 지적인 생각과 염원을 표현하고 있는 인간이 만든 건축물의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미국 건축가 협회 회원 간의 투표에서 제퍼슨의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이 미국 건축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칭송하였다.
버지니아 대학교는 버지니아 주의 교육 체계의 결정체로 만들어졌다. 제퍼슨은 모든 주의 주민들이 이제 자신의 능력에 따라 대학교에 들어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죽음
제퍼슨의 무덤 위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묘비
제퍼슨은 미국 독립기념일인 1826년 7월 4일에 향년 83세로 사망하였는데 향년 그 날은 미국 독립선언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독립 선언서를 같이 쓴 동지이자, 부통령 재임 당시 대통령으로 가장 큰 정적 중 하나, 그러나 화해하고 다시 좋은 친구로 지냈던 존 애덤스도 사망하였는데 애덤스는 제퍼슨이 죽고 몇 시간 뒤에 세상을 떴다. 애덤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 있는데…"라고 하였으나, 이미 그 시간 제퍼슨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제퍼슨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으나, 정작 죽을 때에는 엄청난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퍼슨의 장인이 죽을 때, 제퍼슨과 그의 처남이 땅을 나누었는데 당시 빚이 있던 장인의 몫까지 제퍼슨과 처남이 다 맡아야 하였고 그 빚의 이자까지 불어나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
제퍼슨은 빚을 갚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 이전에 땅을 팔았으나 당시 그가 받은 지폐는 전쟁이 끝난 뒤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돈 가치가 매우 떨어져 쓸모없게 되었다. 콘월리스는 전쟁 때, 제퍼슨의 농장으로 쳐들어가 농장을 파괴하였고 영국인 채권자들이 전쟁이 끝난 뒤 제퍼슨에게 와서 돈을 당장 갚으라고 요구하였다. 그 뒤로 대통령이 된 뒤, 국가에서 주는 수당으로 조금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1819년 경제 불황 때, 빚을 갚아달라는 친척의 말에 돈을 꾸어주었으나 갚지를 못하자, 다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제퍼슨에게 돈을 꿔 준 채권자들은 몬티첼로에 들이닥치고 몬티첼로를 압류하여 경매에 부치려 하였으나 다행히 제퍼슨은 몬티첼로를 끝까지 지켜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땅은 경매로 넘어갔다. 1831년 제퍼슨의 552 에이커(223 헥타르)에 달하는 영지는 제임스 T. 바클레이라는 사람에게 7000달러로 팔렸다. 토머스 제퍼슨은 샬러츠빌에 있는 몬티첼로 영지에 묻혔다. 그는 유서에서 몬티첼로를 정부에 헌납하고 모조 전쟁이나 바버리 전쟁에서 죽은 해군 장교들의 아이들을 가르칠 학교로 쓰기를 희망하였다. 제퍼슨의 묘비문은 그가 스스로 쓰기를 고집하였는데 묘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HERE WAS BURIED THOMAS JEFFERSONAUTHOR OF THE DECLARATION OF AMERICAN INDEPENDENCEOF THE STATUTE OF VIRGINIA FOR RELIGIOUS FREEDOMAND FATHER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
묘비 아래에 있는 사각형의 기둥에는 또 이렇게 쓰여져 있다.
BORN APRIL 2 1743 O.S. DIED JULY 4 1826
한국어로 번역한 제퍼슨의 묘비문은 다음과 같다.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자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토머스 제퍼슨, 여기 잠들다.
구력 1743년 4월 2일 생1826년 7월 4일 졸
그는 자신이 한 일에서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제외시켰는데 자신이 한 일 중 가장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묘비문 밑에 쓰여있는 이니셜인 O.S.는 구력, 즉 율리우스력을 뜻하는데 제퍼슨이 태어날 때 영국은 아직 율리우스력을 썼고 1752년에 가서야 영국 정부는 신력법을 선포하여 쓰는 달력을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꾸었다.
기타
외모와 성격
많은 사람들은 제퍼슨이 홀쭉하고 매우 큰 키를 자랑한다고 설명하였다. 실제로 제퍼슨의 키가 6피트 4인치(190 cm)로 파티 등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언제나 돋보였다고 한다.
"몬티첼로의 성인"으로 불리던 제퍼슨은 새로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사람들로부터 또다른 별명인 "인민의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가 평생 국가보다는 인민을 중요시여겼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여졌던 것이다. 그는 백악관에서 손님을 맞을 때 매우 검소하고 싼 옷을 입고 맞아 이러한 대통령의 근검절약 정신에 미국 인민들 역시 감명받았다. 제퍼슨의 국무장관 제임스 매디슨의 아내인 돌리 매디슨과 제퍼슨의 딸들은 제퍼슨의 이러한 백악관 의례를 완화하고, 검소하기 그지없던 백악관의 만찬을 호화스럽고 흥미로운 파티의 장으로 만들었다. 비록 제퍼슨은 자유 언론의 강력한 수호자라 자처하였으나 급진적인 언론과는 마찰을 빚어 인민들에게 급진적인 성향으로 가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
제퍼슨은 매우 실용적으로 글을 썼으며 글에서 자신의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여러 언어에 능하였다. 그는 아일랜드의 시인 오시안의 작품들을 아일랜드어에서 영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제임스 맥퍼슨에게 보내 감수를 요청하였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의회의 의원들 앞에서 일반교서를 연설하는 대신, 일반교서를 써서 그 서한을 의회에 보내 의회가 제퍼슨을 대신하여 대외에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는 8년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두 번 연설하였는데 하나는 1기 대통령 취임사, 다른 하나는 2기 대통령 취임사였다. 제퍼슨은 혀가 짧아 발음이 부정확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구두로 연설하는 대신 글을 쓰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제퍼슨은 성격이 매우 내성적이고 폐쇄적이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제퍼슨은 아내 마사의 죽음 때, 그와 그녀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들을 붙태우고, 당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대인관계
제퍼슨은 정적(政敵)에게도 비교적 관대한 인물로 자신과 미 합중국 대통령의 자리를 놓고 경쟁한 바 있는 에런 버를 한때나마 존중했었다. 제퍼슨은 평소에 버를 미워했던 알렉산더 해밀턴의 도움으로 미 합중국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으며 낙선한 버가 부통령이 되자 버를 정적으로서 대한 것이 아니라 부통령으로서 대하고 그에 걸맞은 예우를 갖춰줬다. 하지만 버에 대한 제퍼슨의 감정이 실망으로 바뀌는 사건이 1804년 7월 11일에 발생했는데 그것이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였다.
제퍼슨은 그들이 살고 있는 뉴욕주에서는 분명히 결투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이 법으로 금지된 결투를 하기 위해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결투가 허용된 뉴저지주로 이동해서 결투를 벌여 결국 알렉산더 해밀턴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제퍼슨은 버에게 크게 실망한 나머지 버를 차기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에서 제외시켰으며 버 대신 조지 클린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목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또한 그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제퍼슨은 버를 정계에서 영원히 매장시켰다.
취미와 활동
제퍼슨은 당시 영국의 휘그당 귀족들에게 인기가 있던 신팔라딘 양식을 미국에 처음으로 소개한 뛰어난 건축가였다. 이 건축 양식은 정치적 자유와 공화주의식 미덕을 아우르는 계몽 사상을 연상시켰다. 제퍼슨은 샬러츠빌에 자신의 유명한 저택인 몬티첼로를 지었는데 이곳에는 자동문, 최초의 회전의자, 그리고 제퍼슨이 발명한 발명품 등 당시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근처에는 미국 대통령이 유일하게 세운 대학교로 제퍼슨이 손수 설계해서 만들어 세웠으며 미국에서 최초로 종교적인 학문을 배제한 순수한 고등 교육을 가르친 버지니아 대학교가 있다. 오늘날, 몬티첼로와 버지니아 대학교는 미국에 4개밖에 없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같이 등재되어 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 베드포드 군 린츠버그 근처에 포플러 수목원을 디자인하였는데 공직으로 심신이 지쳐 있을 때,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아줄 휴양지로 삼았다. 또한 그는 버지니아 주 의사당을 지을 때 로마 제국 시대에 남부 프랑스 님에 세워진 메종 카리를 모델로 삼아서 설계하였다. 제퍼슨은 연방 건축 양식이 미국에 그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제퍼슨은 어릴 때부터 고고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제퍼슨은 때때로 발굴 작업을 한 층 더 발전시킨 공을 높이 사 "고고학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1784년 버지니아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제퍼슨은 무언가 발견될 때까지 단순히 밑으로 계속 파는 방식을 피했다. 대신 쐐기를 토굴에서 제거하여 토굴 안의 무덤으로 들어가 그 곳의 지층 등을 세밀히 관찰하고 관찰 기록을 적었다.
몬티첼로
토머스 제퍼슨은 몬티첼로의 연못을 좋아하였다. 대략 깊이가 3피트(1 m)로 석회반죽으로 연못을 지었다. 그는 낚시에서 잡은 물고기나 장어 등을 가져와 이곳에 놓아 주었다. 제퍼슨이 죽은 뒤, 없어졌으나 지금은 다시 복원되어 몬티첼로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1780년 제퍼슨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만든 미국 철학 협회에 가입하여 부통령으로 재임하기 시작한 1797년에서 1815년까지 회장으로 재직하였다.
제퍼슨은 와인 애호가이자 미식가이기도 하였다. 프랑스 공사 시절(1784년 ~ 1789년), 그는 프랑스와 다른 유럽의 와인 명산지를 돌아다니며 최고의 와인을 사서 자신의 공관이나 버지니아의 집으로 보냈다. 그는 와인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 미국은 유럽과 같이 다양한 와인을 만들지 못하며 그와 똑같이 만들 수도 없지만, 질은 유럽의 것과 다르지 않다.”
제퍼슨은 몬티첼로에 넓은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유럽에서 와인용으로 자주 쓰이는 포도인 비티스 비니페라(Vitis vinifera)의 씨앗 등을 심었으나 미국의 포도 풍토병으로 포도 농사가 수포로 돌아갔다.
1801년 제퍼슨은 현재 미국 의회에서도 쓰이고 있는 의회 의사 절차 설명서 를 발간하였고 1812년에 개정판을 새로이 발간하였다. 1802년부터 흑인 노예 샐리 해밍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그는 이를 부인하거나 대응하지 않았다.
미영 전쟁 기간인 1814년 8월, 워싱턴 D.C.가 영국군에게 함락당하고 미국 의회도서관이 불타자, 제퍼슨은 평생 자신이 수집한 책들을 국가에 헌납하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1815년 1월, 의회는 제퍼슨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제퍼슨에게 23,950 달러를 주고 그의 6,487개의 귀중한 책들을 헌납받았는데 그의 헌납은 의회도서관이 다시 일어서서 명실상부한 국립도서관이 되는 기틀이 되었다. 오늘날 의회도서관 웹사이트에서 연방 의회 정보를 알려주는 도우미를 '토머스'(THOMAS)라 이름붙였는데, 바로 의회도서관에 자신의 책을 아낌없이 기증한 제퍼슨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1764년 발간되어 제퍼슨이 소장하다가 의회도서관에 기증한 두 권의 쿠란은 2007년 미국 최초의 무슬림 출신 하원의원이 된 케이스 엘리슨이 하원에서 선서할 때에 쓰이기도 하였다.
정치 철학
1818년 5월 28일, 모르데케이 매뉴얼 노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퍼슨은 인간의 본성과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제퍼슨은 미국에 공화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영국의 귀족적 정치 독점 방식은 단점이 많고 시민 사회에 대한 미국인들의 열정이 독립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역설하였다. 1790년대 그는 해밀턴과 존 애덤스가 영국의 군주제를 도입하여 공화제를 없애버리려 한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다. 또한 미영 전쟁을 지지하여 미국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영국이 지배하던 캐나다를 압박하여 캐나다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제퍼슨이 생각한 미국의 공화주의 이상은 자유 농민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농업 국가로의 발전이었다. 제퍼슨이 이러한 사상은 상업과 공업을 중시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크게 비교되어, 워싱턴 행정부에서 같이 장관으로 일할 때, 많은 마찰을 일으켰다. 제퍼슨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것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여 후세의 미국인들은 그를 “미국 경험주의의 아버지”라고 이름붙였다. 특히 제퍼슨은 아직 인구가 적지만 단결된 미국이 산업화되었으나 각 민족으로 분열된 유럽에서 발생한 후유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였다.
제퍼슨의 공화주의적 정치 사상은 17세기에 영국 작가들이 창당한 국가당의 이념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개인권을 양도할 수 없다고 역설한 존 로크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역사학자들은 제퍼슨과 동시대 사람인 장-자크 루소도 제퍼슨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미국 은행 설립에 강하게 반대하고 자신의 의견을 존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나는 국립 은행 설립이 상비군 설립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자네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그렇다 생각하네. 그리고 국립 은행 설립으로 야기된 이러한 국고 낭비를 모두 우리의 후손들이 다른 나라에게서 빌린 차환으로 갚아야 할 것이고 후손들에게 희망도 없는 가짜 미래를 물려주는 것일세.”
그러나 매디슨과 의회는 미영 전쟁 당시 경제 불황에 빠진 이유가 국립 은행이 설립되지 않았다 하여 1816년 제퍼슨의 충고를 무시하고 헨리 클레이의 주도로 미국 제2 은행을 세운다.
제퍼슨은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만의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절대권은 정부 설립 여부와 상관없이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그 절대권을 줄 수도, 받을 수도, 혹은 뺏을 수도 없다 역설하였다. 절대권은 바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권한이라고도 설명하였다. 제퍼슨은 절대권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올바른 자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나는 "법의 규제 아래"라고 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법은 폭압자의 뜻이지 우리의 뜻이 아니며, 언제나 우리의 사생활과 인권을 침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퍼슨은 정부가 자유권을 만들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정당한 자유의 제한은 법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자유를 침범하지만 않으면 되는 간단한 것이라고도 말하였다. 제퍼슨은 정부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는 사람들을 규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부 자체도 개인의 자유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도 얘기하였다. 그는 당시 버지니아에서 장자에게만 토지를 상속하는 장자 상속권에게 반기를 들어, 모든 아들들에게 공평히 유산을 분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퍼슨은 인간이 다른 사람과 좋은지 나쁜지 구별할 수 있는 타고난 도덕성과 스스로 자신을 제한할 수 있는 선천적인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도덕성이 무정부주의적 사회를 움직여 오로지 사람의 도덕성만 있어도 정부가 필요없다 하였으나, 그에 대하여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였다.제퍼슨은 여러 번 부족 안에서 스스로 다스리는 아메리칸 원주민의 생활과 제도를 극찬하였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제퍼슨을 보고 감상적, 철학적 무정부주의자라고도 부른다.
제퍼슨은 케링턴 대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부 없이 사는 인디언들이 엄격하고 막강한 정부 치하의 유럽인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제퍼슨은 무정부주의가 귀족, 평민 등 어느 계급에게나 모순적이라고 믿었다. 또한 제퍼슨은 국민들로부터 통치에 대한 찬성을 얻고 미국의 세력 확장을 위하는 미국 정부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칭송하였다.
독립 선언서의 서문에서 제퍼슨은 이렇게 썼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인민의 동의"를 주창한 제퍼슨은 사람들이 과거 조상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나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또한 여기에는 빚과 법도 포함되었다. 제퍼슨은 "어느 사회이든 간에 완벽한 헌법이나 법을 만들 수 없다. 지구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라고 말하였다. 또한 제퍼슨은 법학 혁명의 순환을 계산하였고 "모든 헌법과 모든 법은 19년 뒤에 자연적으로 만료된다. 그리고 법 효력 기간이 그보다 길게 효력되도록 강요받으면 이것은 강압이지, 권리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계산을 통하여 삶의 자연적 순환 기간이 19년임을 알아내었으며 이 19년의 기간 뒤에는 자신이 믿는 "성숙" 의 시대가 온다 생각하였다. 또한 제퍼슨은 국채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역설하였다. 그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전 세대의 빚을 져야 하는 정신적 의무를 부정하였다. 그는 빚을 갚는 것을 보고 "권리에 대한 질문이 아닌 관대함에 대한 질문"이라고 비꼬았다.
제퍼슨은 주의 권한을 지키는 데 앞장을 서서 특히 1798년의 켄터키-버지니아 안에서 연방 정부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크게 우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책 중 일부는 오히려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의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803년의 프랑스인과 인디언이 살고 있던 거대한 영토인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루이지애나 매입이었다. 그가 만든 출항 금지법은 외교 정책으로서는 크게 실패하였으나 연방 정부가 전쟁으로 이끌 수 있는 무역 분쟁을 조종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도 보여주었다.
총기 소지에 대한 견해
자유에 대한 제퍼슨의 의견은 개인의 자유로까지 그 범위가 넓어져서 제퍼슨은 이러한 개인의 자유를 크게 주창하였다. 그의 "비망록"(Commonplace Book)에서 제퍼슨은 총기 소지와 관련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베카리아 후작 체사레의 글을 인용하였다. 체사레는 “총기 소지를 금지하는 법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나 정부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그리고 일부 법은 법을 어긴 공격자에게는 이득이 되고 공격을 받은 피해자에게는 해악이 된다…혹여 비무장한 사람들이 무장한 사람들보다 큰 자신감과 분노를 느끼고 공격할 수 있기에 정부는 이들의 살인을 막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독려를 해주어야 한다.” 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제퍼슨은 대체로 총기 소지에 관하여 체사레의 견해와 뜻을 같이 하였다.
경제와 재벌에 대한 견해
제퍼슨은 경제와 재벌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 나는 우리가 정부에 자신의 힘을 믿고 도전하며 우리의 법도 어길 수 있는 주식회사의 재벌이 생겨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
이것은 제퍼슨이 미국 정부와 사회를 크게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재벌에게 내릴 수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사법부에 대한 견해
제퍼슨은 변호사로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결코 좋은 연설자는 아니었으며 법정에 있는 것이 그리 탐탁지 않았다 한다. 오히려 그는 훌륭한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제퍼슨은 판사는 반드시 법에 능통한 법률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만 정책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주장하였다. 제퍼슨은 1801년 연방 대법원의 마베리 대 메디슨 사건 판결을 보고 민주주의의 위반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하며 의회를 조종하여 연방 대법원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수정헌법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정작 의회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충분한 지지 세력을 얻지 못하였다. 제퍼슨은 계속해서 연방 대법원의 사법심사권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 재판관들을 헌법 문제에 관한 최고의 중재인이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이러한 생각을 계속 가진다면 재판관들은 우리를 과두정치의 독재 체제로 몰아놓을 것이다. 우리들의 재판관은 우리들만큼 정직하지만 우리들보다 결코 더 정직하지는 않다. 그들은 정당을 위해, 권력을 위해, 특전을 위해 우리들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재판관들의 표어는 "좋은 판결은 더 넓은 사법부의 권한이다."(boni judicis est ampliare jurisdictionem)라 하지만 그들의 권력은 그들이 평생 그 자리를 유지하는 만큼 매우 위험하며 자신의 입맛에 맞추려는 다른 정부 직원들 만큼 책임감이 있지도 않다. 우리의 헌법은 단 한 개의 법원을 세우지 않았고 우리의 헌법은 어떤 것이라도 신뢰받아도, 시간과 정당이 맞지 않으면 그 정당의 당원은 독재자가 되어 군림할 것도 알고 있다. 헌법은 우리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권리를 쥐고 있다는 그 신성한 원칙하에 빈틈없이 만들어졌다. ”
정치 폭력에 대한 견해
제퍼슨은 유혈 사태인 셰이스의 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 난 뒤, 존 애덤스의 사위인 윌리엄 W. 스미스에게 다음 의견이 쓰여져 있는 편지를 보냈다.
“ 한두 세기에서 몇 명이 목숨을 잃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자유의 나무’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로서 다시 살아난다. 그 피가 바로 '자유의 나무'의 천연 비료인 것이다. ”
자존에 대한 견해
1789년 3월 13일, 제퍼슨은 프랜시스 홉킨슨(Francis Hopkinson)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나는 내 자신의 의견을 가지기 두려워 한번도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의견을 표명한 적이 없다. 나의 이러한 우유부단한 의견은 나에게 개인인 내 자신을 존중하는 것보다도 전체를 더 존중하고 중요히 여기게 만들었다. ”
어록
토머스 제퍼슨의 종교관이 리처드 도킨스의 저작 만들어진 신에 소개되어 있다.
"각 종교의 사제들은 마녀가 빛을 두려워 하듯 과학의 발전을 두려워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과학적 선구자들의 도래에 눈을 찡그리며,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사기극의 분파를 만들어 간다." -만들어진 신 4장 도입부, 리처드 도킨스
사생활
제퍼슨은 평생에 걸쳐 여러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샐리 해밍스 등 외에 절친한 친구인 잭 워커의 아내인 베치 워커에 반해 계속 찾아갔고, 한 번은 워커가 사업상의 이유로 출장을 가자 그는 곧장 베치를 찾아가 구애하였다. 1784년 프랑스 공사로 재직할 때는, 부임 초인 1784년부터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었던 유명인사인 마리아 코스웨이(Maria Cosway)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마리아는 기혼여성으로 마리아의 남편은 제퍼슨과 친구였다. 마리아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와 제퍼슨의 관계를 인정하고, 이를 허용하기도 했다.
제퍼슨은 그의 여자 흑인 노예였던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의 아이 아버지 여부를 놓고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샐리 해밍스는 제퍼슨보다 28살 연하의 흑인 여성이었다. 그 외에 영국 여인인 코스웨이 부인 등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이는 그의 사후 영화화 되어 《대통령의 연인들》의 소재가 되었다.
1802년부터 흑인 노예 샐리 해밍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그는 이를 언급하지 않거나 회피하였다. 하지만 제퍼슨의 반대파 정치인과 노예제도 폐지론자들, 그리고 미국 정부 출범초기,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영국 등에서 이를 계속 문제삼아 왔다. 그 뒤 매디슨 헤밍스는 자신이 제퍼슨의 아들임을 주장하였으나 이를 입증하지 못해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뒤로도 샐리 해밍스의 후손들 역시 제퍼슨 가의 일원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논란과 공방은 백년 이상 지속되다가 1998년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 유전자 감별법을 실시하였다. 감별 방법으로는 부계로만 유전되는 Y 염색체를 이용한 친자확인법으로, 제퍼슨의 아들로 이어지는 남계 후손들은 후손이 끊어졌고 제퍼슨의 남동생 거의 모두가 영·유아기에 사망하였으나 토머스 제퍼슨의 막내남동생이었던 랜돌프 제퍼슨은 60세까지 살며 후손을 이어갔다.
첫 유전자 검사에서 임상 병리학자인 유진 포스터 박사는 톰 우드슨의 셋째 아들의 후손으로 현재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살고 있는 토머스 우드슨 목사의 유전자를 감식한 결과 제퍼슨 가문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Y염색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하였다. 포스터 교수는 이전에 샐리 헤밍스의 막내아들 이스턴 헤밍스의 후손에 대한 DNA 조사에서 혈연 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발표, 샐리 헤밍스의 자식 중 한 명 또는 전부가 제퍼슨의 후손이라던 토머스 제퍼슨 기념재단과 우드슨 후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1998년 제퍼슨의 남동생 랜돌프 제퍼슨의 직계후손 5명과 샐리 헤밍스의 막내아들 이스턴 헤밍스(Eston Hemings)의 자손 1명을 대상으로 이들로부터 얻은 Y 염색체의 유전정보를 비교하였다. 유전자 검사 결과, 이스턴 헤밍스는 사후 제퍼슨의 아들로 판명되었다. 2007년 11월 학술잡지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1998년 매디슨 헤밍스의 후손들은 제퍼슨가의 남성들과 DNA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제퍼슨 가의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판명되어, 제퍼슨 가의 자손으로 인정되었다. 샐리 헤밍스의 자손들 중 일부는 제퍼슨 가의 후손으로 인정되고 있다.
르네상스맨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 지식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아 계몽 사상을 자신의 평생 정치 철학으로 삼았다. 폭넓은 지식과 교양, 재능으로 그는 줄곧 벤저민 프랭클린과 더불어 18세기 미국 최대의 르네상스 인간(르네상스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제퍼슨은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대통령 외에도 여러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원예가였고 정치인이었으며 그 외에도 법률가, 건축가, 과학자, 고고학자, 고생물학자, 작가, 발명가, 농장주, 외교관, 음악가, 그리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창립자였다.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백악관 연회장에서 열린 만찬에서 49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환영할 때, 케네디가 "나는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이곳에서 혼자 식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역대 백악관에서 열린 만찬 중 재능과 지식의 총집합체에서 여러분들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할 정도로 제퍼슨은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8년의 재임 기간 동안 한 번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이며, 현재까지도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대통령 중 하나로 인정받으며 역대 대통령 조사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2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흑인 여성인 샐리 헤밍스와의 불륜 관계로 5명의 사생아가 제퍼슨의 서자녀일 가능성이 있다는 논란이 있다.
계몽주의
제퍼슨은 반연방주의를 지향하여 자작농을 공화주의 미덕의 모범이라 이상화하였고, 도시와 자본가를 믿지 않았으며 각 주의 독립적인 권한과 강력히 그 권한이 제한된 연방정부를 지향하였다. 제퍼슨은 또한 인권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의 기본 원칙인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역설하였으나 사실 그는 200여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였고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권을 부정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일화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 불곰을 키웠다고 한다.
긍정적 평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가장 혁명적인 인물로서, 신의 이름을 빌어 미국 혁명을 정당화하는 주장을 하였다. 군주제에 저항(영국에 반발하는 것)은 신에 대한 복종이라는 그의 발언에서 이를 알 수 있으며, 권리장전 헌법을 제정할 때에도 이런 종교적인 관점을 많이 강조하였다.
부정적 평가
하지만 인간의 권리를 백인의 부르주아나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 한정 지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생전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둔 것이 1998년 유전자 검사결과 사실로 판명되면서 이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그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다','자유는 하느님의 선물로 이를 침해하는 것은 그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느님이 공정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조국을 위해 몸이 떨린다'는 어록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200여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던 농장주였고 자신의 노예들을 해방하지 않고 죽기 전까지도 그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쇼니 족 추장 테쿰세 형제 등에게 강제로 미국문명을 주입하는 과정에서의 마찰도 존재했다. 일부에서는 그가 부성을 가장한 인종차별주의적, 백인우월주의적 가치관을 지녔다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 노예 제도가 미국인들의 도덕적 성격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노예 제도의 폐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노예 제도로 인하여 참혹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 예언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