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서 죽을 뻔한 이유는?
제가 성경에 대하여 글을 올리는 이유는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는 습관을 갖게 하고픈 마음에서 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는?==> 오병이어 사건이 모두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오병이어 사건 뒤에는 ?==>
꼭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죽을 뻔한 사건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오병이어 사건뒤에 <각각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임>
왜? 성경은 그렇게 기록해야 해야만 했을까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서 죽을 뻔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명령을 했는가?==>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고 벳새다로 즉시 재촉해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향해 가려고 한 곳은 어디였던가?
==> 제자들이 가려고 했던 곳은 벳새다가 아니라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6:42절부터~~
42절==> 다 배불리 먹고
43절==>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절==>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 이 후에
45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절==>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시고 요한복음6:16절 부터는~~
제자들이 원래 가려던 <벳세다>가 아니라 <가버나움>으로 향해 가려는 것을 볼 수 있다.
요6:16~17절
16절==>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그럼 지도상에서<벳세다>는 어디이고 <가버나움>은 어디인가 살펴볼 필요가 생긴다.
그리고 갈릴리바다를 조금 과장해서 한반도 땅이라고 가정해본다면?===>
오병이어를 일으킨 곳을==> 강릉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고
벳새다는?==>함경도 오지 땅 이라할 수 있고
가버나움은?==>수도권 정도라고 가정해 볼 수 있겠다.
그러면 왜?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가려고 했을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사건과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을 정화시킨 사건사이에
단 한 절의 짧은 구절을 집어넣어둔 것은 왜? 일까에 궁금증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려면 ==>요2장 12절의 말씀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나에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고 난 후에~~
왜? 요2:12절에서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에 내려가
거기서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니라.>~~~ 라고 기록했는지를 알아야한다.
그러면
여기서 왜?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여러 날 계시지 못했을까에 궁금증을 가져볼 만하다.
여기서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고 가버나움에 가서 얼마나 자랑을 했을까?
그러나
가나의 기적을 보지 못했던 가버나움에 있던 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가버나움은 그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그 회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곳 이었는데~~
그 곳에 있던 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이 가나에서 행하였던 그 기적을 제자들이 말해줘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서 여러 날 계시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요4:46~54절에서?==>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두 번째 표적을 일으킴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 두 번째 표적은 무엇일까?
==>이 두 번째 표적은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게될 것 같으니
왕의 신하가?==>
가나에 있는 예수님께 와서 자기의 아들을 가버나움까지 가서 고쳐 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 때에 예수님은 가버나움까지 가지 않고 원격으로 왕의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다.
그리고 그 다음날 왕의 신하의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가나에서 가버나움의 병자를 원격 치료를 해주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첫 번째 표적이후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던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려 했던 것이라 보여 진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가나에서 원격으로 가버나움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셨다는 것을 들은 이후부터는?==>
가버나움에 사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처음으로 돌아와서~~
제자들은 이제 오병이어 사건에서 자신들이 떼어 준 몇 개의 떡으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기적을 일으켜 배불리 먹였던 것을 가버나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자신들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재는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었지만~~
벳새다 촌 동네에 가봐야 알아주는 사람도 대접해 주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기에
==> 가버나움으로 자랑하려고 가게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오병이어 사건 후 예수님의 명령보다는?==>
자신들의 자랑과 자신들의 능력 있음을 드러내 보이려 자랑하려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죽을 뻔 했던 것이다.
결론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가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
가봐야 육신적으로는 별 소득이 없어 보이더라도~~
우리가 가야 할 <영적인 벳새다>가 더 <축복의 자리>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글을 쓸때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조금더 잘 다듬어 쓸 필요가 있습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편에서서 쓰는 것이고 인본주의는 사람편에서 서서 쓰는 것입니다. 인본주의만 조심해도 많은 것을 알게됩니다만
예를들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격의 장점을 들어도 그것은 인본주의입니다.
또는 사람의 잘못을 가지고 이번글처럼 순종하지 않았다고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육신의 생각으로 사람의 생각으로 했다고 해야 신본주의적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생각이냐 영의 생각이냐로 말하는 것이 신본주의 관점으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순종이라하면 그들이 순종치 않은 것이지만, 육의 생각이라 하면 모든 인간에 적용되는 관점이고요. 순종한다는 말도 순종이 아니라 좀 더 진리에 가깝게 쓰면 말씀에 의지하여 또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순종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정환님의 의견 존중합니다~~
그런데 저는 인본주의, 신본주의~~ 이런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에 <주의> 라는 것이 붙어있으면?==> 무엇인가 잘못될 여지가 생깁니다.
물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셨고, 또한 완전한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완전한 육적인 의미와 또한 완전한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글쓴것을 토론할때는?==> 먼저 육적인 것이 이해되어야만 영적인 것도 이해할 수있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도 이해못하는데 무슨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진식 순종하지 않았다 따르지 않았다고 하면 이유나 변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으로 했다고 하면 변명이나 이유가 아니고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이 육의 생각이냐 영의 생각이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정환 정환님~~
님이 말을 이해한다니깐요~~~
그러나 이글은?==> 은혜를 나누자는 것이아니라, 진리를 깨우치자는 의미에서 쓴 글입니다.
은혜를 나누려는 글을 쓰려면?==> 설교 형식의 글이 되어야 겠지요.~~
그런데 은혜를 나누려는 글을 쓰게 되면?==> 그 글의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됩니다.
다 좋은 의견들이시네요
그런데 너무 신본주의이었다 인본주의 밖에 남지않는 바리새인도 있고
인본주의라 손가락질 당한 예수님은 오히려 신본주의 셨죠
저는 신명기를 보면서 인지상정이라 말하는 제 속에 있는 것과 동일힌 것을 하나님께 느꼈습니다
그리고 니고님의 나는 예수다 의 이론도 지지하는데 예수가 니고님이고 니고님이 예수이면 인본주의 신본주의
어느정도 섞인 것이 진리같습니다
아이린님~~
네 그렇습니다.~~ 님의 의견에 동의 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본 이셨고 완전한 신본 이셨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가 어려운말을 써서 이해가 안된것일 수 있습니다 영어에도 하류 중류 상류층언어가 있듯이 신앙의 언어도 인본주의언어가 있고 중간의 언어 신본주의 언어가 있습니다 지키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는 하류 다른 길로 갔다 가 상류의 말이죠 즉 하나님말씀을 따랐냐 마귀의 생각을 따랐냐로 생각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