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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마음공부방] 제3 수행편 – 제1장 일상수행의 요법(要法)
<일상수행의 요법 8조<
설교 : 박세훈 교무님
일시 : 원기 106년 12월 8일
타이핑 : 주진성
제1장 일상수행의 요법(要法)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
[가르치다]
가르치다라는 말이 평범한 말이고 우리가 다 아는 것 같지만 가르치다에 대한 말에서부터 우리가 조금 다르게 가르친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서로가 다르게 각자가 처한 상황과 각자의 경험에 따라서 ‘가르친다’라는 것을 다르게 해석을 할 것 같아요. ‘가르치다’라는 말이 한자로는 교육이잖아요. 교육 ‘교’자가 보면 학생을 살짝 때려서 본받도록 한다는 뜻이 있어요. 저기 회초리가 있거든요. 저 오른쪽에 있는 거 회초리예요. 왜 지금 보면은 인권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있지만 원래 한자어로 교(敎)자라는 것은 살짝 때려서 가르치는 것이 ‘교’자고 육(育)이라는 것은 낳는 것도 들어가고 기르는 것도 들어가요. 낳아서 기르는 것이 ‘육’이니까 균형감이 있겠죠. 앞에는 조금 강하게 교육을 한다고 하면 뒤에는 부드러움으로써 가르친다는 것이 두 개가 포함되죠. ‘교육’이라는 말은 education 이라는 말이 이제 영어로 교육인데 이게 라티어의 합성인 거죠. e라는 것은 밖으로 ducation은 이끌다. 무엇을 밖으로 이끄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교육이에요. 한자의 교육과 영어 서구권의 에듀케이션도 좋은 뜻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뜻이 저는 더 좋은 것 같아요. 한국 사람이어서 그런지 한국어로 ‘가르치다’라는 것은 ‘갈다’ 와 ‘치다’의 합성어인데 ‘갈다’라는 것은 연마하다 ‘연마하다’라는 뜻이 있어요. 갈아서 갈다 연마하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냐면 부단한 노력이 들어가 있어요. ‘치다’라는 것은 키우는 거예요. 가르칠 때 때로는 엄하게 하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소를 치다 양을 치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보살펴 키우다 사랑이 들어가 있어요. 이렇게 언어로 보면은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 원불교에서 ‘가르치다’라는 것은 뭘까? 일단은 이 세 개의 뜻이 좀 비슷한 것들이 있는데 따뜻함과 부드러움, 강함과 그다음에 보살핌 이런 것들이 있는데 원불교에서는 어떨까 가르침에 대한 두 가지 접근이 있어요..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중점을 두고 가르침을 바라보는 것이 있고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죠 잘 가르친다라는 것이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 있어야 되냐 거기에 포커스가 있을 수도 있고 실제로 ‘자리’라는 것에 포커스가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 가르치는 거냐 두 가지가 있을 거에요. 원불교는 종교니까 앞에 더 있겠죠.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르치냐에 대해서 더 있을 거예요. 잘 가르치는 것은 우리 사범대 다니는 경주 교우가 방법론을 가르치겠죠. 저는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중점을 두곤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일상수행요법 8조를 여론상 진리에서 바라보면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은 어때야 되냐? 불생불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좌타의 국한을 넘어서 가르쳐야 돼요. 수강료 많이 냈고 밀리지 않고 내는 사람 잘 가르치고 조금 늦게 내는 사람 마음이 흔들리거나 나하고 가까운 사람한테는 좀 잘 가르치는데 나하고 먼 사람은 아니라거나 ..지금 일어나는 비리들이 다 그렇잖아요. 내 자녀한테는 빚을 내서라도 가르쳐주는데 정말로 뛰어난 인재인데 돈이 없는 사람한테는 내 자녀가 아니면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죠.우리가 원불교의 모든 교리는 일원상의 진리에서 바라봐야 돼요. 대종사님의 본위를 파악하려면 일원상 진리가 있어야 되는데, 일원상의 진리에 대한 것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이죠. 불생불멸은 우리의 본체 자리를 말하는 거고요. 인과 보응은 작용하는 것을 말하는 거죠. 현상을 말해요. 나눌 수는 없어요. 이게 본체와 현상 그런데 불생불멸이 본체를 맡는다면 인과보응은 현상을 말해요. 본체는 변하지 않아요. 현상은 변해요. 원불교에서는 불생불멸과 인과 보응이라고 진리를 설명하고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하죠. 그럼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그 자리를 말해요. 비어 있는 자리 인과 보응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리. 진공 묘유예요. 비어 있는데 묘하게 있어요. 우리 마음도 그렇잖아요. 지금 한 마음도 없이 그냥 듣다가 제가 혜지 교우 이름 딱 부르면 마음이 뭐 하나 확 올라올 거예요. 내가 뭐 잘못했나 예 없던 마음이 생기나요. 그래서 잘 가르친다는 것은 자타의 국한을 넘어서 가르쳐야 돼요. 그 동안은 자타의 국한이 있었어요. 내 자녀만, 내 동문만 내 지형 위주로 가르쳤죠. 그래서 가르침이 널리 퍼지지 못했어요. 뛰어나도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불생불멸의 일원상의 진리에 따라 가르친다고 하면 국한을 벗어나서 가르쳐야 하고요 또 가르친다면 상이 없어야 해요. 저도 상이 많이 있으니까 저도 우리 우진 간사가 참 뛰어난 적이 많이 있거든요. 우진 간사가 저 가르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푹 들어와서 교무님 이거 아닌데요. 이렇게 하면 저도 기분이 팍 상할 수도 있어요. 예 마음 공부가 덜 됐을 때는 나는 교무고 너는 간사 너는 배워야 되는 사람이고 나는 가르쳐야 되는 사람이다. 이러면 제가 우진 간사한테 배울 수는 없겠죠. 상을 놓고 배우는 것이 일원상 진리의 바탕에서 잘 가르치는 사람의 자세예요. 그럼 인과보응의 입장에서 잘 가르친다는 건 뭐예요. 아까 우리 혜지교우가 잘 설명했죠. 인과품 1장이 뭐예요. 제일 중요한 건데, 우주의 진리라는 것은 생멸 없이 돌고 돈다고 했어요. 생멸 없다는 것이 불생 불멸이고 돌고 돈다는 것이 인과보응이에요. 떨어질 수가 없어요. 네 그러면 인과 보응은 이거예요.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분은 인과보응을 믿지 않는 거예요. 인과 보응을 믿는 척하는 거지 믿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지 받는 사람이 곧 주는 사람이에요. 이게 인과예요. 그냥 따로 복잡한 게 아니라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이고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이에요. 네 그러면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적용해보면은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 항상 가르칠 것만 같아요? 또 항상 배울 것만 배우지만 않잖아요. 가르치게 돼 있어요. 순환하게 된단 말이에요. 이게 인과보응이에요. 예 그리고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배웠으니까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은혜예요. 배움이 있으니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면은 보은해야죠. 그래서 배우기만 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종법사님께서는 ‘빚을 지고 있다’고 했어요. 내가 배운 만큼 가르치지 않으면 빚진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기 위해서 가져야 될 마음이 일원상 마음인데 이런 마음이 없으면 잘 가르칠 수가 없어요. 내가 교당을 10년 다녔어요. 회장이에요. 근데 신입 교도가 ‘이거 이거 아닙니까’라고 교리에 대해서 얘기해요. 그러면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니가 얼마나 했다고 회장한테 채 하냐 이런 마음이 나올거에요.일원상 마음이 아닌 거죠.
제가 가르침에 대해 두 가지로 접근해서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일원상으로 가르치고 일원상으로 배우는또 하나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이 있어요. 이게 사요잖아요. 그죠 6조 7조 8조 9조는 사요예요. 사요라는 것이 뭐예요. 사회를 좋게 하는 사회 대상의 불공법이에요. 그러면은 강자 약자가 함께 발전하는 거예요. 사람도 강자 약자가 있고 사회에도 강자 약자가 있어요. 사회가 잘 사는 복지 국가를 만드는 것이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인데 이렇습니다. 일상생요법 6조와 7조는 뭐예요. 6조가 뭡니까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잖아요. 타력 생활 하는 사람들은 어떤 거예요. 자력이 없으니까 타력 생활을 하게 되잖아요. 자력이 있어도 하는 사람이 있지만은 약자예요. 7조는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에 비해서는 약자잖아요. 그러니까 6조와 7자는 7조는 약자가 강제되는 법이에요. 약자가 강제되는 법 그럼 8조하고 9조는 뭐예요. 가르치는 사람은 강자잖아요. 그리고 9조 공익심, 공도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강자예요. 네 대중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강자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강자가 약자를 돕는 것이 8조 9조고 6조와 7조는 약자가 강자가 되는 거예요. 이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이 음양 상징이기도 해요. 예 강자가 항상 강자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강자가 약자가 되기도 해요. 또 반대로 약자가 항상 약자가 아니죠. 강자가 돼요. 인과에 따라서 돌고 도는 거예요. 정법사님께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둘이 아니에요. 이게 일원상 진리를 신앙하고 수행하는 사람은 그러면서 이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 가져야 될 마음이 겸손이거든요. 겸손 핵심 오만하지 않는 것이에요. 주역에 겸괘(謙卦)가 있어요. 겸손할 겸자 겸계 주옥이 64개로 돼 있는데 64개라는 것은 뭐냐면은 이제 유교에서 인간하고 자연을
봤을 때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대해서 그것을 변화의 체계를 상징으로 만들었어요. 64괘 그 기호 중에 15번째가 겸괘인데 이런 것이 나옵니다. 하늘에 도는 다북찬 것, 다시 말하면 오만한 것을 헐고 깎아다가 겸손한 것을 도와주고, 하늘에 도라는 것은 우주의 도를 말하죠. 우주의 도라는 것은 가득 차 있으면은 그것을 무너트려요. 무너뜨려서 깎아서 겸손한 곳 모자란 곳에 도와주게 돼 있어요. 우주의 이치가 그래요 성주괴공이잖아요. 만들어졌어요. 그러면 그것이 머물렀다가 다시 부서지잖아요. 그렇죠 계속 커지지만은 않아요. 생로병사, 여러분들이 계속 젊어지고 피부가 좋아지고 상태가 계속 좋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정점을 찍었다가는 내려와요 다북 차면은 떨어지게 돼 있어요. 봄 여름. 여름이 피크 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가을로 내려가게 돼 있어요. 그것이 음양상승이에요. 하늘의 도는 차면은 비우게 돼 있어요. 계속 채우지만은 않아요. 땅에 도는 오만한 것을 변형시켜 겸손한 것으로 흘러 보내며. 여러분들 땅을 보세요. 모난 돌이 정 맞잖아요. 높은 산이 깎이는 거예요. 평지가 깎이는 게 아니라 예 튀어나온 곳이 깎이게 돼 있죠. 땅에 도는 그래요. 그렇죠. 물도 그렇고. 귀신은 오만한 것을 해하며 겸손한 곳에 복을 주고..여러분들도 살다 보면 오만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잖아요. 인도는 오만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하면 좋아한다. 제가 상담을 해보고 여러 사람 만나보면 가장 속된 말로 재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잘난체 하는 사람이 다 재수가 없다고 그래요. 거의 그렇더라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것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 싫어해요. 그래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의 핵심은 겸손인 거예요. 경산 정법사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어요.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가르침의 실적이 없으면 지도자의 역량이 자라지 않아요. 그러니까 가르쳐본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가 있어요. 회장을 하려면은 많이 가르쳐 봐야 돼요. 사람들을 자꾸 가르쳐 봐야지 아무리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의 만능이 겸비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경계를 만나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던 사람인거에요. 마틴 하이데거라는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인데 여러분들이 잘 아는 실천 철학자예요.이분이 가르침에 대해서 한 얘기가 있어요. 가르치기는 배우기보다 더 어렵다. 왜 가르치기가 배우기보다 더 어려울까 교사가 훨씬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은 아니다. 가르치기가 배우기보다 어려운 것은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도록 내버려 둘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가르치기가 배우기보다 더 어렵냐고 물었더니 가르치는 사람이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지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가르치기가 배우기보다 어려운 것은 배우도록 내버려 둘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박영준이라는 리더십센터 소장이 있는데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이렇게 말했어요. 이 하이데거의 말을 보고 나는 늘 가르치려 애쓰는 이들을 자주 만나왔고 지금도 만나는 일을 하지만 내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어떤 방식으로 배우고 싶은지 누구에게 배우고 싶은지 왜 배우고 싶어 하는지 배움의 걸림돌이 무엇인지 물어 봐주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이 말은 아까와 같이 우리가 가르칠 때 항상 가르치는 사람이 중심이 됐어요. 그래서 배우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요. 주입식이에요. 그냥 다 짜놨어 뭘 가르칠지 어떻게 할지 시간 뭐 다 짜놓고 항상 중심은 가르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나눠 있어요. 이분법적으로 들어가요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도 되고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데 항상 고정돼 있어. 나는 가르치는 사람 너는 배우는 사람. 일원상 마음이 아니었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이 옆에 책이 있잖아요. 학습의 자유 칼 로조스라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학습의 자유라는 책을 썼는데 이 사람은 이제 이렇게 얘기했어요.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가르친다’는 것은 부처와 부처의 만남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고 배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원상 자리에서 가르침과 배움이 일어나야 돼요. 그냥 그 배움이 있을 뿐이죠. 일원상으로 만났을 때 부처와 부처의 만남이 있고 이랬을 때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됩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자녀를 가르치는 데에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첫째는 심교(心敎)라 마음에 신앙처를 두고 바르고 착하고 평탄하게 마음을 가져서 자녀로 하여금 먼저 그 마음을 체받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행교(行敎)라 자신이 먼저 실행하고 행동에 법도가 있어서 자녀로 하여금 저절로 그 실행을 체받게 하는 것이요, 세째는 언교(言敎)라 매양 불보살 성현들과 위인 달사들의 가언(嘉言) 선행(善行)을 많이 일러 주어 그것을 기억하여 체받게 하며 모든 사리를 순순히 타일러서 가르치는 것이요, 네째는 엄교(嚴敎)라 이는 철없는 때에 부득이 위엄으로 가르치는 법이니 이는 자주 쓸 법은 아니니라. 그러므로, 한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치되 어머니 태중으로 비롯하여 성인(成人)이 되기까지 이 네 가지 법을 아울러 쓰면 착한 사람 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
거예요. 그런데 대종사님께서 가르치는 방법도 이야기하셨어요. 인도품 45장에 가르치는 방법. 그래서 심교(心敎)라는 것은 그 심법을 채 받게 하는 거예요. 제가 어떤 분을 상담을 했는데 어떤 분이 원불교에 오게 된 동기가 본인이 운동을 하면서 부상을 당해서 갑자기 실력이 저하되는 거예요. 되게 힘든 삶을 살았어요. 그래서 이제 자존감도 떨어지고 죽고 싶은 마음도 일어났다고 그래요. 그랬을 때 원불교회에 왔는데 자기라는 존재가 한없이 초라하고 부족한 존재는 꼈는데 오자마자 교무님께서 ‘부처님 오셨습니까?‘라고 하셨대요. 처음 만났을 때 그 말에 몇 년 동안 쌓였던 그 아픔이 다 녹아났다고 해요. 심법을 채 받은 거죠. 우리 회장님들이 회장님의 마음 쓰는 것을 우리 청년 교도들이 배우는 것이 심교(心敎)고 행교(行敎)라는 것은 솔선수범하는 거예요. 어떤 교무님한테 어떤 분한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냐고 했더니 본인이 학생회 때 교무님과 야유회를 갔는데 야유회가 끝나고 오는 길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대요. 지저분한 음식물 쓰레기가 사람들은 보고도 다 지나가는데 여자 교무님이 정복 치마를 입은 상태인데 팔을 걷어붙이고 맨손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다 치우는 것을 보고 출가를 하게 됐다고 했습니다. 언교 제가 하는 게 원교잖아요. 지금 그렇죠 말이나 글로 저 같은 하수가 하는 것이 언교(言敎)예요. 왜 말이나 글로 기억해서 체 받게 하는 거. 실행해서 채 받게 하는 게 행교 마음을 채 받게 하는 게 심교. 언교. 여러분들이 강연했을 때 정말로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제가 세게 피드백을 할 수도 있겠죠. 그렇죠 철이 없을 때 혼을 내거나 벌을 주는 거예요. 예 이것이 언교입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가르치는 방법이에요. 가르치는 마음가짐은 일원상 마음으로 하는 거고 가르치는 방법은 신교 행교 언교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대종사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열 가지 잘하고 한 가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그 한 가지도 고치기 위해서 꾸준히 하고 10가지 중에서 9가지 못하고 한 가지 잘하는 사람한테는 그 한 가지 잘하는 것을 키우기 위해서 칭찬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는 큰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자력이 있어서 강자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력으로 직접 가르치는 경우가 있지만은 간접적으로 가르칠 수도 있어요. 가르침을 담당하는 학교와 기관에 장학회로 참여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지금 꾸준하게 학사에다가 희사를 하고 어려운 곳에 도움을 주는 것도 잘 가르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고 말씀하셨어요. 조 목사님께서 하지만 이제 근본적인 가르침이 가르침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순위가 있는데 아까
같이 이제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 종교가에서는 우선순위로 할 것입니다. 오늘 배운 것을 이제 한번 정리해 보면 이래요. 우리가 일원상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은 가르치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에요.
배우는 것이 곧 가르치는 거예요. 그걸 둘로 놓지 않아요. 그리고 이 세 가지 단계를 거쳐요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운 것이라고 했거든요. 현실적인 효과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 원불교에서는 그것이 교리에 들어가서 가르치는 것이 사회적 보호 활동이에요. 인과를 알면 가르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가르치면서 나도 성장하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원상 자리에서 내가 가르치고 배우면은 내가 나를 가르치는 거가 돼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내가 나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 잘 가르치는 기법을 습득할 것이 아니라 일원상 자리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부처와 부처의 만남이 되시기를 당부드리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Q. 서원도 교우님
후배들이 이제 교무님에 대해서 뭔가 불쾌하게끔 만들 때 교무님께서는 어떻게 마음을 돌려서 방금 말씀하신 불생불명과 인가 보험의 이치로서 가르치시는지 그걸 좀 실제 어떻게 활용하시는지 좀 듣고 싶습니다.
A. 박세훈 교무님 복잡하지는 않아요. 아까 제가 얘기를 드렸듯이 우리 우진 간사가 본인도 모르게 저를 가르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이제 그때 제가 마음에서 너는 간사 나는 교무 이렇게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그때 한번 확인하죠. 아 내가 이런 상 마음이 아니라 내가 교문데 하는
상에 붙잡혀 있구나 그래서 그 순간 그걸 바라보고 다시 일원상 자리로 돌아가서 온전하게 부처와 부처로 만나려고 노력하죠.
첫댓글 타이핑 감사드립니다
이 날 생각나요 ㅎㅎ 세훈 교무님도 생각이 나고…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복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덕분에 또 한 번 공부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진성 교우님. 다가오는 단회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