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도울 때
장애인에게는 '네가 우리를 어떻게 옹호해?'라는 소리를 듣고, 비장애인에게는 '네가 뭔데 그들을 옹호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면 장애인에게 빌붙어 먹고산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이해된다. 나만 해도 한 여성으로서 여성 인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남성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알고 말하나 싶은 마음이 슬며시 든다. 미안하게도 치기만만한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옹호는 아닐까 의심하게도 된다.
장애인도 그럴 수 있다. 비장애인이 당신에게 있는 장애로 인한 인생의 난관들을 얼마나 알까 싶을 것 같다. 그렇다. 모른다. 당사자성 없는 장애인복지 지망생에게 아직 명쾌히 풀리지 않은 숙제다. 겪은 적 없는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때마다 물어보면 되지.
아!
사람이 사람을 돕는 거다.
장애인복지를 지망한다는 말에 불편한 구석이 있다.
장애인복지를 지망한다는 말에 불편한 구석이 있다. 장애의 종류는 다양하고 다르다. 고작 장애인이라는 한 단어로 집단화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 편의를 위해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남발해 장애인복지법상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깡그리 동일한 사회적 약자 프레임을 씌우는 것 같아 불편하다.
인간을 어떤 특성으로 구분해 집단으로 나누는 용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어떨까. 아동, 청소년, 노인, 여성, 남성, 성소수자, 장애인, 비장애인, 황인, 흑인, 백인 등등. 조금이라도 '우리'와 '그들'로 구분 지어지는 용어라면 애초에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설정의 세상 속에 산다면 어떨까.
편견이 덜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이 조금 더 온전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각자의 삶을 대신 살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각기 다른 인간들이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귀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특정 사람을 가리킬 수 없는 인구학적 용어가 특정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자주 사용되면서 사람과 사람 간의 이해를 제한하는 것 같다.
말의 편의상 장애인복지를 지망한다고 하지만, 비장애인인 내가 장애인을 돕고 싶은 것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꾸는 내가 더불어 사는데 제약을 크게 받는 이를 돕고 싶은 것일 뿐이다. 누군가는 그게 그거지,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장애인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고 싶다. 그런데 또 분명히 장애라는 특성(경험)이 그 사람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유일한 특성은 아니지만 제법 중요한 특성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돕는 일을 하겠다면, 어떤 장애라는 특성이 공유하는 어떤 행동과 경험들에 대해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한국에 온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아가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도 있다. (?)
그런데 여전히 장애인복지를 지망한다는 말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 아동복지를 지망한다는 말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데 왜 장애인복지를 지망한다는 말은 비교적 더 조심스러울까?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이미 차별의 단어로 사용돼 버렸기 때문일까.
불편해야 할까? 불편하지 말아야 할까?
장애인들이 집단으로 달리기하는 장면을 보고 여느 사람들과 다른 것 같아 불편하다는 시선에 의문이 생겼다. 아동들이 집단으로 달리기하는 장면, 여성들이 집단으로 달리기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상상됐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집단으로 달리기하는 모습을 불편하게 여기는 일이 자칫 장애인을 과하게 약자 취급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다정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깨달은 점은 현실 배경을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장애인들끼리 달리기를 한다고 불편할 이유 없다. 다만 장애인들이 집단으로 달리는 일이 시설에서 이루어졌기에 경계해야 했다. 복지관은 이런 고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것 같다. 운동 프로그램을 짠다면 원하는 지역 주민이 신청하는 식이니까. 그러나 시설의 단체 프로그램은 입주자들이 참여해야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쉽다. 자발적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진행하는 달리기가 아니라, 기관이 기획하고 진행하는 달리기라는, 그 배경을 놓치면 안 됐다.
그런데 또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종종 있는 단체로 아침 운동하는 고등학교 기숙사를 생각하면, 시설이라고 괜히 심각하게 생각했나 싶기도 하다. 힘들 때도 있지만 즐거울 때도 있고 체력도 길러지는 시간을 마다할 이유가 무엇인가? 시설 입주자들 간의 관계도 그랬다. 입주자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안 되나? 옆집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는 일이 무엇이 나쁜가. 이 부분도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실천 기준을 찾아갔다. 나쁘지 않다. 시설 입주자가 애초에 충분히 지역사회에서 여느 사람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회가 아니다. 그렇기에 굳이 마다해야 한다.
좋은 의도와 상관없이 단체 활동은 장애인을 지역사회에서 따로 분리되기 쉽게 만든다. 이와 관련해 복지 영상에서 본 장애인 합창단 영상들이 기억에 남는다. 합창단원이 되는 일이 그 시설 입주자들 대부분의 꿈이라는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나도 노래 못 부르지만 노래 부르는 일이 좋고 재밌는데’라는 자기중심적 감상 수준에만 머물러있었다. 그런데 석범 오빠가 그 장면이 어색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제야 보였다. 평범한 초등학교의 한 학급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답이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시설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하나같이 합창단원이 되고 싶다고 답한다? 그 이질감을 바로 느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장애인복지 지망생 모임을 하며 들었던 생각들을 적었습니다.
부족한 생각과 문장이 많을 것 같습니다. 모순도 있는 것 같고요.
지적해 주시고 공부할 자료 추천해 주시면 배워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이런 사유가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민서야. 너와 동료들의 질문이 참 좋다.
다시, 깊이 생각하고 나눌 수 있어 기쁘다.
말로써만 떠다닐 뻔했던 의견과 생각이
글로 차분히 자리잡으니 참 좋다.
기록하고 이를 나눠주어 고마워.
난 정말.. 너의 글이 좋아.
오늘 나눈 것 외에도 민서는 이런 물음을 갖고 있었구나. 앞서 질문을 던져둔 이는 이리 답을 찾아가는구나..!
많이 배워. 고마워.
나야말로 곁에서 생각의 영감을 주는 네가 있어서 고마워.
하나같이 꿈이 합창 단원인 것은 아닐거에요. 그런 모습을 저의 입장에서 많이 본 거죠. 굉장히 적은 정보만 보고 너무 깊은 사유룰 하기보단, 있는 그대로를 충분히 만나보면서 생각과 행동이 조금씩 성장해 가길 바랍니다. 만나보지도 않고 너무 조심스럽게 완벽한 행동을 할 순 없답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많이 만나세요
아, 일부를 보고 하나같이라는 표현을 쓰면 안 되겠군요. 만나보지 않고 너무 조심스럽게 완벽한 행동을 할 순 없다는 조언이 와닿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겪은 적 없는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몸의 장애가 있다고해서 몸의 장애가 있는 다른 사람을 잘 헤아릴 수 있는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라고 잘 도울 수 있을까?
마음을 헤아려야 도울 수 있는가?
겪은 적 없는 마음을 헤아려 보는 일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극복해야만 하는가? 극복할 수 있는가?
민서의 성찰에 꼬리를 붙잡고 저도 생각에 잠깁니다.
이웃들과 장애 개념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 모임 멤버들 가운데 장애 당사자의 부모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지금 민서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걸까요?
이제 어렴풋합니다.
1. 공부를 시작하며
https://cafe.daum.net/daechaungholib/F9aL/562
2. 공부를 마치며
https://cafe.daum.net/daechaungholib/W9o4/6
마음을 헤아려야 꼭 잘 도울 수 있는가..
아.. 생각에 잠기는 질문입니다.
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