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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뉴스 데이’
요한복음 1:29-36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절 둘째 주일이다. 새해와 함께 시작하는 주현절은 뭔가 새로운 변화를 결심하고, 선택하는 기회를 준다.
흔히 ‘더 나은 사람이 되기에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를 다시 결심하게 만드는 새해는 참 소중하다. 사실 송구영신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새로운 달력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희망을 품게 마련이다.
누구나 새해를 맞으면 이전보다 더 잘 살고 싶어 한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마치 낯선 시간의 순례자처럼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늘 도전한다. 아직 마음이 젊은 사람은 수많은 희망을 헤아릴 것이고, 마음부터 나이가 든 사람은 이제부터라도 낭비 없는 삶을 위해 자기관리를 한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윌리엄 쉐드의 말이다. “항구에 머무는 배는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작은 변화일망정,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도전에는 항상 고통이 따른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삶을 배워야 한다. 영어 관형구 가운데 자기중심적인 사람, 그래서 남에게 늘 가르치려고 들고, 제 주장만하는 사람을 가리켜 ‘지저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참 엉뚱하다. 오죽 그리스도인들이 제 주장이 강하고 믿음이 독선적이면 그런 현상을 가리켜 ‘지저스 콤플렉스’라고 할까?
본디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 안에서 자유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진리 밖에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산다. 겸손히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방법은 간단하다. 좋은 본보기를 모델로 삼고 닮아 가면 된다. 과연 내게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그 분은 누구인가?
1)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본보기이신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36).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고 있다. 한 번은 사람들의 무리 속에 숨겨져 있는 예수님을 가리켜, 또 한 번은 세상 가운데 드러난 예수님을 가리켜 자기 제자들에게 강조하였다.
요한은 왜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이해하였을까? 그 말을 할 때는 절기상으로 유월절이 가까웠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요 2:13). 사람들은 이미 유월절 분위기에 들떠 있을 것이다.
아마 명절을 앞두고 유월절에 쓸 희생될 양들이 거리에서 거래되었을 것이다. 유월절 명절에는 집집마다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며 어린 양을 잡았기 때문이다. 애굽 사람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가 모두 죽음의 심판을 받을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른 히브리인들의 가정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 세례 요한의 선포는 예수님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야이고, 해방자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어린 양을 가리켜 해방자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보잘것없다. 희생 제물로서 어린 양은 다른 제물인 소나 양과 비교해 보아도 그 무게감이 너무 떨어진다.
세례 요한의 경우 어린 양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사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린 양을 죽이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자랐을 것이다. 요한이 볼 때 어린양은 비참하게 죽어야할 운명이고, 또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당할 마땅한 존재였을 것이다. 요한은 그런 어린 양과 같은 존재로 ‘예수가 우리 가운데 서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마 요한은 이사야 예언서에 담긴 어린양의 수난을 떠올렸을 것이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사 53:7).
사실 요한은 일찍이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누가복음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나란히 기록하고 있다. 먼 친척이었으니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까지는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예수가 누구(who)인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어떤(what) 분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요한은 분명한 믿음을 품고 담대히 선언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
요한은 비로소 확신을 갖고, 단호하게 선포한다. 어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성령의 강림을 목격한 이후 그런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34).
2)
무슨 글이든 제목 달기가 가장 어렵다. 설교는 더욱 그렇다. 오늘 설교 제목을 ‘아뉴스 데이’라고 붙였다. 라틴어인데 ‘Agnus Dei’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뜻이다. 낯설지 않은가? 낯설면 한 번 더 들여다보고, 관심을 갖는다.
‘아뉴스 데이’에서 데이(Dei)는 하나님, 아뉴스(Agnus)는 어린 양이다. 직역하니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었다. 오늘 세례 요한이 두 번이나 반복해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해 말하였다. 누구를 가리켜 한 말인가? 바로 예수님이다.
‘아뉴스 데이’는 크게 두 개의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희생 제물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희생을 통해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적 관점으로는 하나님께 드린 거룩한 제물인 예수님, 인간의 구원을 위해 희생 제사의 제물이 되어 세상의 죄를 씻으신 그리스도를 뜻한다.
요한이 살던 시대는 암흑기였다.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예언이 끊기고 하나님의 계시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희망을 보지 못했다. 그때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은 얼마나 큰 희망이던가?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요한에게 희망을 두었다. 메시야라고 기대하였다. 그렇게 말해도 될 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닌 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만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선택받았다.
그런 요한은 자기에게 나아 온 나사렛 사람 예수가 세례를 받는 동안 그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33).
요한이 담대히 증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의 임재 때문이다. 인간의 판단과 분별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야가 저기 있다 혹은 여기 있다는 말에 흔들리고 방황하였다. 세례 요한은 말한다.
‘보라! 여기 어린 양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선 이 사람이 바로 메시야이다.’
요한의 증언대로 메시야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런 고난 받는 종이요,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 고백한다. 그 치유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다. 그런 희생을 통해 오히려 구원자가 되셨다.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 147:3).
치유자는 누구인가? 그는 상처를 위로하고, 치료하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은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 사실 세상에서 아무런 걱정도 고통도 없이 상팔자로 살아온 사람이 남의 걱정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사실 남의 상처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도 상처를 겪어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나도 내 부모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느껴보니 남의 부모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을 가리켜 가장 커다란 상처를 입은 분이기에 그 때문에 남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을 위로하고 생명을 줄 상처 입은 존재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오늘 그리스도인의 사역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상처 입은 치료자’로서의 일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상처 입은 치료자가 지닌 가장 소중한 마음은 바로 ‘긍휼’이다. 긍휼은 마치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긍휼은 그 사람과 같아지는 일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 오셨고, 아예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나는 주님의 긍휼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 긍휼만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배우라고 하신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연민과 공감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감정이입의 능력이 있고, 상대에 대해 역지사지하는 분별력이 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헨리 나우웬은 주현절을 가리켜 ‘사랑과 마주치는 계절’이라고 했는데, 그가 마주치는 사랑은 바로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긍휼은 십자가의 사랑이며, 우리가 받은 사랑이 바로 긍휼이다.
3)
요한의 사명은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을 세상에 널리 증거 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지극히 겸손히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가 증언한 메시지를 보라.
예수님은 우리 죄와 멍에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천상의 위엄을 갖추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죄를 모두 짊어지듯 비참한 모습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으로 오셨다.
희생제물인 어린 양이 인간을 구원한다니, 얼마나 놀라운 역설인가? 이를 ‘지저스 패러독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연약한 어린 양으로 오신다는 것만큼 거룩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양과 늑대는 이솝우화의 단골주인공이다. 착한 것과 악한 것의 대표적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이솝우화에서 어린 양은 사나운 늑대에게 늘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그 착해 빠진 짐승도 그 나름의 삶의 지혜가 있다.
하루는 어린 양 한 마리가 늑대를 피해 수도원 부엌으로 도망갔다. 뒤쫓아온 늑대는 양에게 수도원의 제물이 되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 지른다. 이때 양은 늑대에게 재수 없이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명예로운 제물이 되겠다고 대꾸한다. 착하다고 모두 바보는 아니라는 것을 이솝은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징벌하지 않고, 도리어 고통당하시고 죽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셨다. 구원은 그러한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절정이다.
주현절은 그 사랑을 인정하고, 내 삶에 받아들이는 절기이다.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를 결심한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럴 때 내 인생의 주현절이 비로소 시작된다.
하나님은 강함이 아닌 연약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지금도 자신을 희생하시는 긍휼로 나를 사랑하신다. 나는 그 은총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
새해에 무엇보다 자기 믿음에 투자하라. 이를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나를 위해 힘쓰라. 남에게 알아달라고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이 알아주시기를 구하라. 하나님께 나를 고백하고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무엇보다 늘 감사하며 살라. ‘감사하는 사람은 못 이긴다’는 말은 정답이다. 그리고 모든 감정의 제왕은 ‘사랑’임을 명심하라.
내 주변의 환경이 나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본 받아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이 그 주변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복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의 삶을 살기를 그리하여 나와 내 주변을 변화시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새로운 달력을 낯설게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희망을 품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