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B연필
함성호
1974년 11월 30일, 하다르 아오시 강가에서 야영하던 도널드 요한슨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호미니드 화석을 발견했다. 그 때 라디오에서는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흘러나왔다. 이 화석이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는 데는 많은 이견이 있지만, 아무튼 그래서 미래에 ‘루시’라고 불리게 된 현생인류의 조상들은 아시아로 가느냐, 유럽으로 가느냐 하는 기로에서 중요한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이 가져온 진화의 행보는 나중에 양 문명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 당시 유럽은 간빙기의 온화한 기후가 지속되고 있었고, 시베리아는 아직 빙하기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유럽으로 간 루시와 아시아로 간 루시, 이 ‘두 루시’가 보여준 문명의 양상은 사뭇 달랐다. 비교적 온화한 기후에서 자연의 제약을 덜 받은 ‘유럽의 루시’는 인간중심적인 이성을 발달시켰고, ‘아시아의 루시’는 척박한 환경에서 그것을 개선하기 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순응하는 자연중심적인 이성을 발달시켰다.
서양의 철학이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자연을 해석해내고, 동양의 철학이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인간을 거기에 투사하는 것처럼, 서양의 시문학은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문제로 괴로워하고, 동양의 시문학은 끊임없이 자연과 합일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서양은 신을 ‘발견했고, 그것 때문에 신을 폐기할 수 있는 자유로움도 있었다. 그러나 동양철학의 역사는 언제나 자연에 대한 끝없는 주석의 역사였으므로, 자연을 폐기할 수 있는 권리는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었다. 자연은 ’발견‘을 통해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의 ’노마드‘의 개념도 달라져야한다. 서양의 유목은 양치기가 풀을 ’발견‘하고 양떼들을 거기로 데려가는,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에게 신의 자비를 내리는 것이라면, 몽골로이드의 유목은 일단 사슴 떼를 '만나는'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슴 떼를 만나면 거기서 천막을 치고 그때부터 그들은 사슴과 같은 가족이 된다.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그들은 사슴과 같이 생활하며 약한 가족들을, 다음 이동 때 견디지 못할 만큼 노쇠하거나 병약한 사슴들을 잡아먹고 산다. 가족을 잡아먹으면서 그들은 사슴들과 진정한 가족이 된다. 그러다 사슴 떼가 다른 거주지를 찾아 움직일 때 몽골로이드의 유목민들은 천막을 걷고 각각 사슴의 등에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사슴의 다음 정착지로 이동하는 것이다. 서양의 유목이 양치기의 영도 아래 이루어진다면, 몽골로이드의 유목은 철저하게 사슴에 의해 이루어진다. 거기에 인간의 의지라는 것은 ’어떤 사슴을 먹을 것인가?‘하는 것 외에는 없다.
인간의 생각을 적는 필기구만 하더라도 ‘유럽의 루시’와 ‘아시아의 루시’는 좀 다르다. 필기구의 연원이야 두 루시 모두 딱딱한 나뭇가지나 짐승의 뼈를 이용했겠지만 나중에는 펜과 붓으로 그 물성이 완전히 달라진다. 서양의 캘리그라피는 펜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붓의 종류도 80여 가지나 있지만 주로 재료의 성질이나 크기에 따른 분류이고, 그것이 자체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양의 캘리그라피는 펜 끝의 모양이 자체를 결정한다. 펜에 잉크가 흐르는 동안 적어나가는 서양의 캘리그라피는 그 한시적 시간동안 가장 효율적인 기능을 위해 펜 끝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한자문화권의 캘리그라피, 즉 서예는 붓에 먹을 스미게 해 쓰는 동안에 얼마든지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다. 심지어는 먹의 양을 조절해가며 일부러 거친 터치를 조작하기도 한다.
이 ‘흘림’과 ‘스밈’의 차이에서 서양 캘리그라피의 ‘디자인’과 한자문화권 캘리그라피의 ‘정신’이 나뉜다. 서양의 캘리그라피는 자체의 표준화에 관심이 기울어지지만 한자문화권의 캘리그라피는 대상과의 합일을 통해 다시 저 자연의 경이에 가 있고자한다. 한자문화권에 있어서 서예의 전통을 타이포그라피의 영역으로 손쉽게 통합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이포그라피는 일정한 대상을 글씨체를 통해 표현하지만 서예는 오직 하나 물아일체의 경지에 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은 그 대상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동양철학은 늘 자연이라는 문제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서양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것처럼 동양은 자연이라는 신경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연필은 이 ‘흘림’과 ‘스밈’의 두 가지를 통합한다.
말하자면 펜의 ‘흘림’은 시간적으로 정지되어 ‘스밈’의 형태로 구조화된다. 따라서 연필은 펜처럼 긁히면서도 긁힘의 흔적을 스스로 새긴다. (중략) 연필은 점토의 비율에 따라 H, B, HB, F로 나눌 수 있는데, H는 하드, B는 블랙, F는 펌Firm의 머리글자로 경도와 농도를 나타낸다. 그 중에서도 F는 H와 HB 사이에서 아주 독특한 경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쓰거나 그리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F연필은 밑그림을 그릴 때 주로 사용한다. 알다시피 밑그림은 주된 재료로 그리기 시작하면 존재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그럴 때 밑그림용으로 F연필을 쓰면 일부러 지울 필요가 없다. 저절로 종이에서 미끄러져 나가거나 더 존재감이 강한 재료에 의해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밑그림이 완성된 상태에서도 남아있길 바라는 나 같은 사람에게 F연필은 결코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나는 밑그림을 계속 수정해나가면서 그림을 완성한다. 수정작업을 하는데 있어 밑그림은 내가 그리고 있는 선이 과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나는 그림이 완성되어도 밑그림을 지우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내가 그리는 그림은 완성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밑그림의 끝없는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연필은 필기 면과 마찰저항이 적어 흐름이 좋고, 심의 마모도가 적으며 잘 부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심의 마모도가 너무 적은 것도 문제가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2B연필을 집착해서 사용한다. 내가 처음 2B연필을 본 것은 주로 일본을 내왕하는 외항선원을 아버지로 둔 초등학교 때 친구의 이젤에서였다. 그전까지 나에게 있어 최고의 연필은 동아 4B연필이었다. 그러나 같이 그림을 그리던 친구는 톰보우 B, 2B 4B를 골고루 활용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일단 그 디자인에 마음이 끌렸던 게 먼저였다. 나는 친구의 이젤에서 잠자리가 그려진 금빛글씨체의 톰보우 연필을 쥐고 차례로 켄트지에 선을 그어 나갔다. 4B연필의 그 부드러운 촉감, B연필의 상큼한 미끄러짐, 모두 놀라웠으나 2B는 선을 긋는 순간 나를 단박에 매료시키고 말았다. 켄트지는 내가 쥔 2B연필에 의해 조각되고 있었다. 눌렸다 튀어나오고, 미끄러지고, 번지는 힘의 방식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때 B연필도 처음보고 2B연필도 처음 보았지만 친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연필의 종류에 대한 부러움을 일소할 수 있었다. 나는 2B연필 하나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2B연필은 단지 선망의 대상이었다. 돈도 없었고, 내가 태어난 고장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내가 처음 톰보우 2B연필 한 다스를 사게 된 것은 그 후로도 5년은 더 지난 고등학교 때였다. 춘천에서 열린 도내 실기대회 때 강원도청 앞에 있는 생전 처음 가본 화방에서 나는 2B연필을 골랐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내 근처에는 늘 2B연필이 있었다. HB는 너무 딱딱해서 힘의 강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4B는 너무 물러서 서툰 붓처럼 번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2B연필은 강약이 섬세하고, 종이에도 붓처럼 부드럽게 스민다. 캘리그라피에 있어서는 펜처럼 확정적이면서도, 시간적으로는 붓처럼 비결정적이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두 루시’의 통합처럼 느껴진다. 흰 백지 앞에서 무엇을 그릴까 하는 생각도 없이 점을 하나 찍으면서 이끌려가는 과정은 사슴을 타고 사슴이 가는 대로 숲으로 스며드는 몽골로이드의 유목을 닮아있다. 무엇을 그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에는 최초의 힘이 어떤 것이냐는 초기 값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알고리즘이 내포되어 있다.(중략)
나에게 연필이라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 생각 자체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인식된 내 생각을 연필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필이 무의식적인 내 생각을 드러내 준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연필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을 ‘바로 그것’으로 만들어 준다.(중략)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 캐드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마치 철기문화를 목격한 신석기인처럼 그 매력에 급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컴퓨터는 놀랍도록 정확했다. 캐드는 단순히 디자인을 보조해주는 수단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였다. 용량만 충분하면 거기에는 이 세계의 온갖 현상들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전 세계 도시의 가로망, 건물, 나무의 식생, 인구분포도, 기후의 변화까지.
처음 캐드를 접했을 때, 나는 내가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할 때 만약 어떤 도구를 썼다면, 그건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에 표현된 컴퍼스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컴퓨터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유기적이고 정확한 관계들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그러나 컴퓨터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아날로그인인 우리가 그렇게 열광해 마지않았던 디지털 세계의 정확성이었다. 거기에는 우연이라는 세계창조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빠져있었던 것이다. 디자인을 구상할 때는 논리적인 힘이 필수적이지만, 그것을 그리고 만드는 과정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연에 기댄다.
연필을 쥐고 자기 머릿속에 있는 상상을 실현할 때,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삐어져 나오는 선들에 의해서 수정되는 나의 논리와 그 논리에 의해서 다시 수정되는 연필의 생각들이 ‘바로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캐드에서 그려지는 선들은 정확한 수치로 표현되며 미끄러진다. 그 미끄러짐에 힘은 없다. 그것에 힘의 크기는 없다. 순수하게 방향들만 존재할 뿐이다. 수학적인 힘은 있지만 역학적인 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연필은 둔중한 힘, 유려한 선, 끊고, 나가고, 맺는 아름다움이 있다. 캐드가 가진 정확한 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연필선이 주는 힘의 매력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2B연필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HB는 너무 무디어서 힘을 표현하기 어렵고, 4B는 너무 물러서 곧잘 뭉개지기 때문이다. 2B연필은 너무 무디지도 않고 무르지도 않으면서 부드럽게 나가고, 힘을 주면 적당히 물러서 맺음이 확실하다.
내가 2B연필만 쓴지도 어느덧 20년이 훨씬 넘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데생을 하며 2B연필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2B연필만 고집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나는 지금 디지털B연필과 다시 사랑에 빠진 것 같다. 그런데 2B연필과 디지털B연필과의 이중연애는 즐겁다. 왜냐하면 연필에서 우연을 얻고, 디지털에서 정확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도 아마 이 두 가지 도구로 세계를 설계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2B연필을 깎고 남은 나무를 재떨이에 넣고 거기에 다 피운 담배를 대충 눌러 끈다. 머리를 맑게 하는 향나무 타는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찬다.
-함성호 산문집<당신을 위해 지은 집/마음의 숲 발행>에서 발췌
첫댓글 <젊은 수필> 카페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연필에 대한 분석적 고찰,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가끔 2B 연필로 크로키 등을 합니다. 물론 잠자리가 그려진 톰보우를 쓰지요. 저는 정밀묘사를 위해 러프 스케치를 할 때는 F가 아닌, 4H나 6H를 쓰곤 합니다. 그렇게 그려진 연한 선이 겹쳐 회화적으로 맛을 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무리할 땐 2B나 4B로 정리하게 됩니다. 진한 연필 사이로 퍼져 있는 연한 연필들의 자국, 그 씨줄과 날줄 같은 얽음 속에서 드러나는 물상, 그 속에서 회화적 멋과 맛을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