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소망
성경 말씀: 예레미야애가 3:19-39; 로마서 5:1-11
요약
성경에서 다루어지는 소망은 언약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에게 그분 약속을 주심으로, 그들은 그 이루어짐을 소망합니다. 따라서 소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에 깔려집니다. 언약의 삶은 믿음의 삶이면서 또한 소망의 삶입니다. 믿음과 소망의 함께는 언약의 삶의 구별됨을 보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바람
사람은 마음으로 믿고 또 바랍니다. 즉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믿고 또 바랍니다. 믿음과 바람은 개인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개인의 마음은 믿음과 바람의 온상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믿음과 바람을 따라 외부의 변화를 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거나 바라게 하려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나 바람의 내용은 개인의 마음을 향해집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려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개인의 마음의 믿음은 종교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즉 믿음은 마음에 있는 종교성으로 다루어집니다. 종교적 믿음은 개인의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개인들은 지성이나 도덕성과 같이 종교성도 지닙니다.
그렇지만 바람의 경우는 문제입니다. 바람이 마음에 내재된 지 의문입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바람으로 표현됩니까? 물론 사람들은 나은 삶을 바라며 산다고 말해집니다. 그러나 나은 삶에 대한 바람이 마음의 본질인 지는 의문입니다.
사람들은 상황에 처해 바랍니다. 나은 삶은 나은 조건을 뜻합니다. 나은 조건 외에 성장에 대한 바람이 언제나 말해집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 자라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은 조건이나 성장에 대한 바람은 세상의 변화를 따라 야기됩니다. 바람은 세상과 그 안의 개인들이 변화에 종속되기 때문에 표현됩니다.
바람은 변화를 전제하기 때문에, 개인의 마음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것으로 보일 수 없습니다. 믿음과 같이 개인의 마음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바람은 변화에 수반된 내용입니다. 변화를 따른 바람은 종교성보다 지혜로 다루어집니다. 지혜는 원천적으로 나음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변화를 배경으로 바람으로 들려집니다. 세상은 변화함으로, 고정된 시각으로 보아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가 의식되는 만큼, 세상의 나음은 바라집니다. 지혜는 나음을 향한 변화가 바라지면서 형성됩니다.
지혜는 나음 혹은 좋음을 전제합니다. 나쁨을 유도하는 것은 지혜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변화의 인과관계만 보입니다. 지식은 현상을 좋거나 나쁘게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바라지는 것을 위해 이용됩니다.
현대 사회는 과학 기술의 지식이 팽창함에 따라 진전됩니다. 그렇지만 그 바탕에 사람의 바람이 깔려있습니다. 모두 과학 기술의 지식을 이용하여 개인의 나음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극단적 이기심에 의해 이용됩니다.
이 경향으로 지혜는 지식으로 퇴색됩니다. 일상 삶에서 지혜로 가르쳐지는 것은 실제로 이기심을 지식의 이용으로 성취되게 하는 것입니다. 삶의 지혜는 개인의 행복으로 여겨지고, 개인의 행복은 이기심 충족으로 묵인됩니다.
이루어짐의 소망
세상의 변화를 따른 바람과는 달리, 성경의 바람은 이루어짐을 향합니다. 이루어짐을 향한 바람은 기도에 잘 표현됩니다. 세상 조건의 나음을 향한 바람이 기도로 표현될 때, 하나님의 이루심을 향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바람이 기도로 표현될 때, 변화가 아닌 이루어짐으로 향해집니다.
지혜로 바라지는 것의 추구와 바라지는 것에 대한 기도는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바라지는 것의 성취와 바라지는 것의 이루어짐은 다릅니다. 지혜의 삶은 성취되지만, 기도의 삶은 이루어집니다. 전자는 문화로 표현되지만, 후자는 그리스도교 삶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마음으로 바라지는 것의 표현이 이루어짐을 향하지는 않습니다. 이루어짐은 언약에서 제기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 약속을 이루어짐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이루어짐의 말씀입니다. 언약과 이루어짐은 같이 갑니다.
후손의 번성과 살 땅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기본적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되돌아봄에서 알게 됩니다. 어떻든 인류 역사는 종족의 흥망성쇠로 이어져 왔습니다. 종족의 흥망성쇠는 그들의 땅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구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의 번성과 그들이 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십니다. 그가 적자가 없을 때, 하나님은 그의 후손이 번성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착된 땅 없이 유랑자인 그의 후손이 정착된 땅을 가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바람은 언약의 소망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세상 변화를 향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이루어짐을 향합니다. 그는 세상 변화에 수반된 가능성을 따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근거에서 바랍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소망은 지혜의 바람이 아닌 언약의 바람입니다. 인류 역사가 보이는 것은 지혜의 시각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 고찰은 지혜나 지식의 시각을 벗어나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을 따라 그의 바람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구약은 지혜나 지식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언약의 시각에서 이스라엘 종족의 번성과 그들이 살 땅을 다룹니다. 이 다름이 간과되면, 구약의 전개는 또한 지혜나 지식의 시각으로 이해되거나 설명됩니다. 이것이 문화적으로 성경의 풀이입니다.
이것이 경우이면, 하나님의 약속과 그 이루어짐의 언약의 시각은 상실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언약의 근거한 진지한 소망의 삶은 이루어지게 되지 않습니다. 소망이 변화의 가능성 한계에 제한되면, 하나님의 약속도 변화의 가능성 한계에서 이해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들은 그 약속에 근거한 소망의 삶을 삽니다. 옛 언약의 삶은 소망의 삶의 개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소망의 시각을 상실했지만, 예언자들은 소망의 시각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삶은 기본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소망의 삶입니다.
부활과 생명의 소망
새 언약은 예수님의 이야기로 주어집니다. 믿음과 소망은 예수님으로 말해집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새 언약의 믿음과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후손과 땅의 약속이 아닌 예수님으로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새 언약의 근거이고, 새로운 바람이 예수님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은 새 언약으로 믿어지고 바라집니다. 예수님의 서사, 곧 복음은 한 사람의 전기가 아닌 새 언약입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역사적 기록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입니다.
옛 언약은 믿음과 소망을 종교성이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과 그 이루어짐으로 보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옛 언약의 시각을 새롭게 하여 예수님으로 새 언약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새 언약의 믿음과 소망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에 대한 소망입니다. 복음서에 서사된 예수님의 삶은 믿음과 더불어 소망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을 믿는 믿음은 믿는 이들의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은 예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보인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을 믿습니다.
예수님으로 보인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 곧 새 언약의 삶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복음에 접해지는 예수님은 종교적 깨달음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역사적 인물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부활과 생명으로 서사하는 글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으로 접해지면, 예수님은 종교성이나 지혜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새 언약으로 다루어집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으로 주어집니다. 달리 말하면, 복음이 새 언약으로 읽어지지 않으면, 부활과 생명은 말해질 수 없습니다.
부활과 생명이 말하게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죽음과 수명의 담화로만 삽니다. 그들이 종교성이나 지혜로 삶을 영위하더라도, 단지 세상에서 나은 삶을 바라며 삽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면서 믿고 소망합니다.
새 언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을 믿으며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을 세상에 이루어짐으로 보이시기에,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은 세상으로부터 파생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삽니다. 부활과 생명은 세상 변화를 따라 야기되지 않기 때문에,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은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삶을 삽니다. 새 언약의 삶은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는 말씀의 하나님이시니, 저희 믿음과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저희는 아버지께서 말씀으로 이루시는 삶을 믿으며 소망합니다.
비록 세상에서 살더라도 세상을 알아 변화를 따르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루시는 삶으로 아버지와 함께합니다.
세상의 가능성을 따라 변하는 삶을 살지 않고,
아버지께서 함께로 이루심을 소망 가운데 기다립니다.
저희 소망의 삶이 종말론적으로 열매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