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양림동 여행은 시간의 보물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100년 전 광주를 비롯한 전남 지역 근대화의 물꼬를 튼 유적들이 가슴 찡한 이야기와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잘 보존된 전통가옥을 둘러보는 정취와 더불어 시인 김현승의 흔적을 만나는 시간이 반가운 길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동네 꼬맹이들이 모여 딱지치기를 했을 좁은 골목도 고맙다.
100년 전 서양 선교사들의 흔적을 따라
양림동 여행의 이정표가 되는 양림교회광주의 기독교와 근대문화를 이끈 오웬기념각
양림동 시간여행은 양림교회에서 출발한다. 광주 최초의 교회로 1904년 미국 선교사 배유지(Eugene Bell, 1868~1925)가 자신의 사택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작이다.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지어진 것으로 양림동 여행에서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양림교회 바로 앞에는 오웬기념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다. 1914년 선교사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과 그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당시의 유교적 관습에 따라 남녀가 들어가는 문이 달랐기에 출입문이 2개이고,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로 되어 있다. 개화기에 다양한 문화행사가 이곳에서 열리며 근대문화의 전당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각시탈>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왼쪽/오른쪽]아름드리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우일선 선교사 사택 / 우일선 선교사 사택 뒤편에 자리한 선교사 묘원
오웬기념각을 나와 호남신학대학교로 길을 잡으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했던 서양 선교사들의 사택을 만난다. 호남신학대학교가 자리한 야트막한 언덕은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나 어린 주검들을 풍장(風裝)했던 곳이다. 시신을 이불에 둘둘 감아 나무에 걸어두는 것이 장례 의식의 전부였다. 선교사들은 이곳에 사택을 짓고 병자들, 특히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낯선 이국의 끄트머리, 가난하고 병든 자들, 버림받은 주검들이 있는 곳에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이 언덕은 ‘광주의 예루살렘’, ‘선교사마을’로 불리며 치유의 공간, 교육의 공간으로 발전했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광주시 지정 기념물 제15호)은 광주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이다. 장애아와 고아들을 돌보며 한센병 치유에 앞장섰던 우일선(R. M. Willson)이 지었다. 1905년에 건축하고 1921년에 증축했다고 한다. 사택 앞마당에는 선교사들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고국에서 가져다 심은 은단풍나무, 아름드리 피칸나무, 흑호두나무 등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축 시기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선교사 사택으로 쓰였던 다른 건축물들도 함께 볼 수 있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 뒤편 산책로를 따라가면 선교사 묘원에 이른다. 배유지와 우일선을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잠든 곳이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고요한 무덤들 앞에서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왼쪽/오른쪽]수피아여학교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던 수피아 홀 / 배유지 기념예배당인 커티스 메모리얼 홀 [왼쪽/오른쪽]수피아여중의 교무실과 교실로 쓰이는 윈스보로우 홀 /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동상
바로 이어 자리한 수피아여중·고교에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수피아 홀(제158호), 배유지 기념예배당(제159호), 윈스보로우 홀(제370호)이 있다. 수피아여학교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제니 스피어(Jennie Speer)를 기념하기 위해 1911년 그녀의 언니가 헌금한 돈으로 설립되었다. 선교의 근거지였을 뿐 아니라 여성 교육의 요람이 되었던 공간이다.
여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수피아 홀을 중심으로 선교사의 아내였던 윈스보로우 여사의 기부금으로 지어진 윈스보로우 홀, 수피아여학교 설립자 배유지를 기념하는 커티스 메모리얼 홀이 학교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도 교복 입은 여학생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번지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거점으로서 휴교와 폐교를 거듭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들 근대건축물의 중심에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동상이 서 있는 이유다.
수피아여학교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호랑가시나무
우일선 선교사 사택에서 수피아여중·고교로 가는 길목에 호랑가시나무(광주시 지정 기념물 제17호)가 서 있다. 이 나무도 당시 선교사들이 심은 것이다. 잎 주위에 톱니바퀴 같은 가시가 있는데 호랑이가 이를 등 긁개로 쓴다 하여 호랑가시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열매 때문에 ‘예수나무’로도 불린다. 불우이웃돕기를 상징하는 ‘사랑의 열매’ 도안이 바로 이 호랑가시나무 열매에서 나왔다.
휴식이 있는 시인의 길과 전통가옥
[왼쪽/오른쪽]선교사 묘원으로 가는 길목에 조성된 시인의 길 / 호남신학대학 안에 서 있는 김현승 시비카페 앞에서 바라본 무등산과 양림동 일대
양림교회를 지나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는 언덕을 오르고 수피아여학교를 내려다보며 시를 쓰던 시인이 있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가을의 기도>를 쓴 시인 김현승(1913~1975)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후 양림교회 목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내려와 생활한 그는 선교사 사택이 있는 현 호남신학대학의 언덕길을 자주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고 한다.
[왼쪽/오른쪽]좁은 골목 초입에 자리한 다형다방 / 다형다방에서 만나는 김현승 시인의 생전 모습
호남신학대학 안에는 <가을의 기도>를 새긴 시비가 있고, 가까이에 저렴한 가격으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카페가 자리했다. 카페 앞 야외 공간에 서면 양림동 일대와 무등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다시 양림동 골목으로 내려서면 김현승 시인의 호 “다형(茶兄)”에서 이름을 딴 무인 카페 다형다방이 기다리고 있다. 좁은 골목 초입에 자리한 작은 카페로 누구나 들어가 시인과 양림동의 옛 모습을 만나고 직접 찻물을 끓여 차를 마실 수 있다. 차 값은 주머니 사정에 따라 통에 넣으면 된다.
[왼쪽/오른쪽]이장우 가옥의 안채 전경 / 이장우 가옥의 일본식 정원과 사랑채 [왼쪽/오른쪽]주홍빛 금목서 꽃잎이 떨어진 최승효 가옥의 마당과 본채 / 독립운동가를 숨겨주었던 다락이 남아 있는 안채
다형다방에서 나오면 전통가옥인 이장우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1호)과 최승효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2호)을 만난다. 이장우 가옥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공간과 광주 최고의 부자들이 살았던 공간을 분리하는 기준이 되는 집이었다. 1899년에 지어진 전통가옥으로 일자형이 주를 이루는 남부 지방의 가옥과 달리 한양의 가옥처럼 ‘ㄱ’자 구조다. 나름 부를 과시하고 멋을 부린 것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과 사랑채, 멋스런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평상시에는 대문을 닫아놓고 있으니 왼편의 샛문을 이용해 들어가면 된다.
최승효 가옥은 1920년 최상현이 지어 일본 요정으로 운영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 한편으로는 본채에 비밀 다락을 두어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사용했던 공간이다. 현재는 설치미술가 최인준이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전통의 아름다움과 현대미술이 조화를 이루어 시선 닿는 곳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잔잔한 음악을 감상하며 산책하듯 둘러보아도 좋다.
[왼쪽/오른쪽]양림동의 문화전시공간 양림미술관 / 양림동의 옛 모습을 담은 전시관
양림동에는 양림미술관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공간과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청에 미리 문의하면 문화해설사의 재미난 설명을 들으며 마을 탐방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