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의 실제} 철학적 사변(哲學的思辨)에 접해본 사람으로 한번쯤 변증법(辨證法)의 영역을 둘러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변증법이라는 말은 고대그리스에서 시작되었고 초기그리스시대 변증법은 변론 술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 을 변증법의 시조라고 했고 헤겔은 헤라크레토스 에서 변증법의조국을 발견했다고 했다.
헤라크레토스 와 제논의 변증법에서의 큰 특징은 헤라크레토스 의 그것이 모순을 포용하는 것이라면 제논의 변증법은 모순을 배제하는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헤겔(G,W,FHegel 1770∼1831)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에 의해서 자연과 물질의 발전과정으로 이해되었다. 그 인식을 바탕으로 제창된 유물변증법은 레닌(Lenin)에 의해 재해석되고 공산주의 사상으로 더욱 정예화 되면서 인민을 옭아매는 이데올로기 감옥의 모태가 된다.
변증법은 학자에 따라서 이렇게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면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철학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면 비교적 근세의 것인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가 그 하나이다.
-헤겔에 있어서의 변증법은*-모순의 논리이다. 모순의 논리이므로 해서 또 동(動)적 논리이다. 그 범주론 은 유(有)에서 시작한다. 즉 여기에서 유는 이런 혹은 저런 유가 아니라 그저 유이다. 단지 유라고 밖에 그 이상 아무런 규정도 없는 순 유이다. 그것은 아무런 규정도 따라서 아무런 내용도 없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즉 무(無)이다. 고로 유는 곧 무다. 우리는 유(有){正}를 사유하면서 어느 새인가 그 대신에 무(無){反}를 사유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무는 결코 무로서 머물 수 없다. 우리는 무를 사유한다. 무는 사유된다. 즉 무는 사유되어있다. 사유되어 있음에 있어서 무는 역시 유이다. 무는 곧 유이다. 순 유는 순 무와 결코 바대의 것이 아니라 기실은 전연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는 무가 되고 무는 유가 된다. 여기에 제3의 범주 합(合){成}이 성립한다.-*⑦
(한국철학 연구회, {철학개론}, 형설출판사, 1975.)
무슨 말이 무슨 말인지 필자와 같이 우둔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최면술 같은 변론을 이끌어 내면서, 고대로부터 인간의 사유를 끈질기게 유인해온 변증법,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처음 보는 기계뭉치가 무엇인지 모를 때 뜯어서 내용물을 보는 것도 그 실체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따라서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해선 변증법을 구성하는 용어들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그 실체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현재 사용되고있는 변증법의 용어 중에서 우리 나라 말인 「모순(矛盾)」은 중국의 고사에서 빌려온 것이다.
-때는 춘추 전국시대 전쟁에 패해 주나라 황실이 망해가고 군웅이 패권을 다투던 시절, 전시(戰時)이므로 길거리에선 개인들간에 무기를 팔고 사는 일이 성행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난장판에 어떤 사나이가 목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여기 있는 이 방패(盾)는 아무리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도 절대로 뚫리지 않는 좋은 것입니다.” 한참동안 방패를 자랑하고 권해도 손님들의 반응이 업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창(矛)을 높이 쳐들고 외쳐댔다.“이 번쩍번쩍 빛나는 창을 보시오, 서릿발같은 날 이 창으로 말하자면 어떤 방패라도 뚫고 마는 창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나는 늙어서 잘 모르겠는데 어떤 것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것에도 뚫리지 않는 방패가 서로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주위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크게 웃었다.-
어느 것도 뚫을 수 있는 창(矛)과 무엇에도 뚫리지 안는 방패(盾)가 함께 존재하는 것은 모순(矛盾)이다. 그것은 역시 뚫을 수 있는 창과 ,뚫리지 안는 방패의 물리적인 반대로서 모순의 의미처럼 사용할 수 있지만 사실은 모순이 지칭하는 본질적인 의미는 뚫을 수 있고 뚫리지 안을 수 있어서「좋은」반면 또한 뚫을 수 없고 뚫려서「나뿐」가치에 있어서의 반대를 의미한다. 즉 사물의 반대나 대립에 관한 표현 중에 모순은 그것이 담고있는 가치의 대립을 의미한다.
그런데 높고 낮음, 넓고 좁음, 크고 작음이 모순이고 유와 무도 모순이라고 본 종래의 모순인식은 변증법을 자연의 발전법칙으로 보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물 변증법으로 발전시키면서 인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물의 변화는 「질(質)」과「양(量)」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질」은 사물의 불변적(不變的)인 요소이고「양」은 가변적(可變的)인 요소라고 말한다. -그러나「양」의 연속적인 변화가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그 점차성(漸次性)이 중단되고(긍정이 부정되는) 비약적인 「질」의 변화가 일어난다. -물의 온도가 증가하여 100도c에 달하면 물의「질」이 액체에서 기체로 변화하고, 또 감소하여 0도c에 도달하면 물의「질」이 액체에서 고체로 변화한다. 이렇게 물질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며 그 발전을 통해서 원자, 분자, 생명세포, 식물, 인간, 사회로 점차로 복잡한 존재 물이 만들어져 간다. 그러므로 발전은 원환적(圓環的)이 아니고 직선적(直線的) 그리고 낙관주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직선적 발전이라고 본다.-그와 같이 생산력도 일정한 한도까지 발전하면 이때까지 생산력의 발달을 보호하고 조장하여 오던 생산관계가 변질하여 생산력의 발달을 억압(부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 특정한 단계에서「구질(舊質)」이 부정되고 「신질(新質)」이 발생하며 발전한다 고 한다.-*⑧
{世界哲學大事典}. 敎育出版公社. 1980.
구질의 부정은 곳 신 질의 발생이라는 논리는 파괴는 곳 고차의 생산이라는 파괴적인 혁명이념으로 되면서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파괴하는 공산주의 운동의 당위성을 세우는 이념적 근거가 되었다.
우리는 이론 또는 문장이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사실을 지칭하는 사실명사의 필요성을 이해한다. 그리하여 모든 문장이 가상명사들로 이루어지면 그것이 아무리 장미 빛 이상이나 화려한 세계를 논한 것이라 하더라도 한낮 뜬소리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이해한다.
마르크스가 그런 논리의 허구성의 이치를 일찍이 알고서 썼다면 인민을 속인 파렴치한 일 것이고 모르고 썼다면 자기의 무지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사상케 한 인류의 죄인이다. 인류역사에 큰 오점으로 기록된 변증법적 유물론이 보이는 오류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가치주의 적 모순개념에 물리적 물질적 명사들을 사용해서 과학적 이론체계로 위장함으로서 마치 이론이 진실이고 결과가 사실인 것처럼 착각을 유도한 것이고, 둘째는 변화무쌍한 가치의 속성을 어떤 특정한 사실 과 불변의 가격으로 관계 (후속변화는 반듯이 긍정적 발전이다)지운 것이다.
예컨대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것이 과연 질의변화이고, 긍정적이기 만한 것인가. 물이 수증기로 변해도 수소원자2에 산소원자1의 분자구조가 바뀌지 안는 이상 그것을 질의 변화로 볼 수는 없다. 밀을 빠아서 밀가루가 되는 것이 질의 변화라면 명태가 변한 황태, 북어, 동태도 모두 질의 변화다. 이런 논란에 이르면 어디까지를 질의 변화로 봐야하느냐 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 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둘째 문제로서 어떻게 뒤따라 일어나는 변화가 반드시 발전(發展), 즉 긍정적(肯定的), 낙관주의적인가 하는 것이다.
물이 수증기로 발전? 하는 바람에 안개가 끼어 김포에 내릴 비행기가 제주도로 피 항 하는 것이 낙관적인가? 우리는 이익을 얻으려고 해놓은 일이 손해를 일으키는 일을 흔하게 겪고「누어 떡 먹기」처럼 좋은 말이 사실은 그것처럼 불편하고 건강에 나뿐일 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좋은 음식도 삼일만 먹으면 싫어지고 미사여구가 반듯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인데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론만의 괴변이고 부도덕한 사술(邪術)일 뿐이다.
인간이 사물에 갖는 관심은 외견상 다양한 것으로 보이지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원인과 결과간에 이행되는 상응 성 여부를 주시하는 명제적 관심과 다음 하나는 사물이 좋을 것인가 나쁠 것인가의 모순을 주시하는 가치적 관심이다. 이러한 명제관과 가치관의 관념구조에서 보면 긍정(肯定)과 부정(否定)의 변증법적 모순구조는 당연히 가치구조이고 따라서 변증법은 가치개념의 논법이다. 이 변증법을 헤겔 은「몰가치론(沒價値論)」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변증법은 「자연과 인생에 편재해서 이(理)가발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본래 인생에 모순의 논리가 존재 하게된 것은 발달된 정신 때문에 가치관을 같게 된 것이 원인이고 그 모순의 논리를 파악해야만 하는 것은 인생이 환경에 적응하는데 장애를 이해 해야할 이치를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적인 적응부터 이룬 다음 실천이 사태의 모순을 현실에서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단계적인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변증법은 헤겔의 명제인 「자연과 인생에 편재해서 이(理)가발전하는 방법」은 아니며「인생이 환경 또는 사태에 적응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