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운영자 서재덕입니다. 우선 한가위 즐겁고 풍성하게 보냈셨는지요...
저희 카페에는 달성서씨와 대구서씨 회원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디서 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으나 대구서씨 분들이 본관이 달성(達城),달성서씨 분들이 본관이 대구(大邱)로 있는 경우가 허다하게 있습니다. 현재 대구,달성 양문을 통틀어 본관이 대구(大邱)로 되어 있는 경우가 몇만에 불과합니다. 달성서씨가 통계청에 의하면 40만명이 넘는 성씨입니다. 10%가 되지 않는 인구가 본관이 대구로 되어 있는 셈이지요,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본관이 대구(大丘)로 되어 있는 경우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은 달성과 대구 양문이 본관을 달리하여 대구와 달성이라는 독자노선을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희 운영진들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관련 문헌과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명확한 자료가 없어 고증을 할 수 없었습니다. 판도공,전객공과의 어떠한 연관 관계를 규명할 수 없었으며 다만 의심과 궁금증만이 더하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으나 여기에 연연하지 않고 달성서씨 추선록의 선조님들의 말씀처럼 의심은 또다른 의심을 갖게한다고 하였으니 차후 확실한 문헌이나 고증이 있기전에는 묻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구인이나 달성인이나 본관에 대하여 혼란을 겪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근원 같으나 고증은 할 수 없고 세월의 흐름속에 더 묻히어 찾고자하나 찾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죠,,,
대구와 달성으로 본관이 나뉘어져 사용한 것이 불과 4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경모록(1975)의 발행 이후 양문이 대구와 달성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1977년 대구서씨 족보 발행과 더불어 대구와 달성으로 구분이 지어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달성서씨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양문의 후손분들이 같은 지역에서 사는 곳도 있었을 것이고 어느쪽의 영향을 받았느냐 경우에 따라 항렬이 현 대구서씨의 향렬을 따라 사용한 곳도 있고 달성서씨의 항렬을 따른 곳도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저희도 누대에 걸쳐 달성을 본관으로 알고 있는데.
호적등본에는 대구로 나오더군요...
청주에 계시는 운영자님께서 전화주시어 대략의 상황을 알게되었습니다. 족보를 들여다보니 저희 문중은 판서공파 울진 평해 문중입니다. 평해라는 곳이 지금은 경상북도 울진군이고요. 예전에는 강원도 평해군으로서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한 곳이었나봅니다. 이전에 닭머리라는 닉을 가지신분(정확히 현재 대구에 사시는 서철호라는분~ 그 분의 집안이 평해 문중의 종손이었고 그 분은 그 집안의 차남이셨습니다.)과 연락이 되면 좋겠습니다. 울진평해 문중의 시조묘는 제 고향인 경북 울진군 평해읍 직산리에 있습니다.(언젠가 사진을 올렸습니다. 서정백 증으로 기재된 묘비) 서정백님이 울진 문중의 종손이시고 서철호님은 그분의 차남~
제가 추정컨데 7세손 涉이라는분의 후손중에 어떤 사연으로 병자호란때 경북 문경세재로 피난하셨고~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시지 못하고 거기서 땅끝인 영덕군으로 이주하셨고 자식중의 한분이 평해로 이주하신것입니다. 저는 평해로 이주하신분의 후손인데 평해로 이주한 그 동네에 결과적으로 저희 조상은 최소한 250여년간 옆 동네로 이주하지 않고 살아온셈이었고 25세손부터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26세손인 저는 서울로 진입한 것이니 달성으로 귀환하기전인 서울로의 귀환이 거의 250여년의 세월뒤에 이루어진셈이고(벼슬자리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만) 앞으로 어찌 살아야할지 답답하답니다.
제가 살아온 고향 동네에는 두곳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후손이 없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느 묘를 방언으로 <뭇묘>라하는데~ 일대의 뭇묘를 파헤치면 제 짐작으로는 대부분 서씨 묘일 것 같습니다.~`~카페에 <판서공파/울진평해 문중>칸의 개설을 희망합니다.
게시판을 개설하였습니다. 평해문중에 소통의 광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계보도 관련하여 몇건을 올렸습니다. 참고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