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발자국 나의 경력과 역할
1980년의 악몽
가을 녘인데도 초겨울 같은 을씨년스런 바람이 옛 같지 않게 몰아치고 있었다.
어차피 인생은 공허한 무상이요 윤회라고 하던가.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이 있고, 타향도 정이 들면 청산이라 했거늘. 서울의 인정은 너무 매섭고 매정하여 살벌함까지 느껴야 했던 것은, 부덕의 소치로 나만의 소외감이었을까. ‘밤새 안녕’이란 유행어가 난발하고 영문 모를 ‘숙청의 비명’ 아래 추풍낙엽처럼 인걸人傑들이 떨어지는 악몽의 순간이었다. 자고나면 기 막히는 놀라운 뉴스와 엄청난 사건들이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여도 모두가 숨을 죽이던 살얼음판이었다.
“그 댁은 별일 없겠지요” “예 우리는 독립된 사법부인데요.”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무서운 사태를 강 건너 불 인양 바라보고 있던 참으로 어리석은 아낙이었다.
1980년. 온통 나라전체가 괴변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의 연속 속에 곤두박질치던 8월 10일 ‘예외란 없다’는 사실이
현실로 불이 떨어졌다. 대법관이던 남편도 속절없이 천직으로 여겼던 자리를 물려나야만 했다. 이것은 총 뿌리의 구테타, 정치의 주도세력이 사법부에도 태풍처럼 강타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대법원을 물려난 가장家長, 그 가장에 매달려 있는 나와 아이 셋, 뿐만이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일하던 비서관과 사무원들, 운전기사까지 직장을 잃었으니 당장 그 가족들의 생계를 어찌할까. 나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무엇으로도 표현 할 수 없었고, 위로의 말을 잃어 망연자실(茫然自失)이란 말을 그때야 체험 했다. 그들은 준비된 생활대책이 없었으니 절박한 상황은 전쟁터와 같았으리라. 어이없고 외롭고 적막했던 가슴, 주체할 수 없이 얼굴을 가리던 소나기는 강이 되어 바다로 흘려 가는 것 같았다.
부정부패 비리에 얽히고설키고 연유되어 물려난 실직자들, 아무런 이유도 결격사유도 모르는 체 직장을 떠나야 했던, 아니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 유선무사(有線無事)로 현직에 남아 있는 법관과 법복을 벗어야 하는 퇴임자의 차이는 무엇이 어떻게 달랐을까. 세상은 온통 인사(人事)로 뒤끓는 소란한 날들 속에 나는 절망감과 허망함에 귀를 막고 말을 잃었다.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했다는 한 가지 이유로 법복을 벗어야 한다면, 누가 그 어려운 사법고시시험을 거쳐 판검사가 되겠는가. 소 서민들의 억울함은 어디에 호소하여 법의 보장을 받을 수 있을까. 또한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 라는 국민들의 여론에서 벗어나 신뢰받는 독립된 사법부가 되고,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소신껏 판결할 수 있으랴.
’정의사회구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었던 국보위는, 법의 존엄과 정의와 진실을 지킨 법관들의 법복을 벗겼다. 이 사실에 대해 나는 중고등학생이던 사춘기의 내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무척이나 고민스럽고 괴로운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름대로 평범한 생활철학과 뚜렷한 인생관과 남 못잖은 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최상의 성실과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직장과 가정을 가꾸어 왔었다.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지만, 언제나 ‘양심에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 며 30여년의 외곬 인생길을 걸어온 한 법관의 삶이, 한 시대의 변혁으로 멈추게 되었다는 것은 가족뿐 아니라 나라의 슬픔이요 절망이기도 하다.
산다는 것 …
그 속으로 역사가 지나갑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어제, 오늘, 내일은 결코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내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서 무슨 일을 하게 되며
이 나라 내일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역사를 배우게 될까요
역사가들은 오늘의 이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여 기록하고
우리의 역사는 훗날 독립기념관에 무엇이라 남기게 될까요
산다는 것은 바로 내일의 역사가 될 것이다.
내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 없는 고뇌와 고통의 침묵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지나온 날보다 더욱 건강하고 밝게 자라줄 것임을 믿는다. 그이와 아이들이 훗날 계엄령이 없는 나라, 총부리가 없는 사회, 화염병이 사라진 거리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문민정부의 시대를 맞을 때 -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참된 일을 소신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기구 하면서 ……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1981.10.24. 일기장에서)
박정희 시해사건의 주범 김재규 피고 공판결과에 대해 국보위는 초법적인 조치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법관 전원 합의체의 15명중 ‘수소의견’을 제시한 5명에겐 근무지였던 서울에서는 2년 동안 변호사개업마저 할 수 없게 했다. 침묵하던 남편은 현직에서 물려난 두 달 후에 혼자 쓸쓸히 낙향하였다. 책임감이 정확하고 철로 길처럼 곧게 살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원칙으로 삼고. 일 밖에 모르는 듯 하던 그이는 그렇게 퇴임 자가 되었다. 고향마을 구석진 골목, 난방도 안 되는 셋집에서 간판도 없이 변호사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는 별난 이산가족이 되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교육으로 두 살림을 살아야 하는 나는 온갖 회한에 잠겼다. 서울과 대구 사이를 오가는 고속버스나 또는 기차에 영육을 싣고 상 하행으로. 남편이 현직에서 물러난 전 후 3개월 남짓한 기간은 내게 길고 긴 터널! 황당한 악몽의 시기였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격세지감을 느낄 때가 오리라’ 역사는 말한다.
註 : ‘소수의견’이란 김재규 피고의 살인 행위가 ‘내란목적이냐, 단순살인이냐’가
재판의 초점. 고등군법회의에서 대법원에 올라온 항소심(抗訴審)은 소수의견인
단순살인 죄가 적용되면 정부부장인 김재규 피고의 부하들은 사형만은 면할 수 있었다.
첫댓글 "1980년의 악몽" 그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돌이켜 보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드셨을까....
사회에 인정 받는 상류층 가정에서 하루 아침에 그 많은 것을 잃고도 꿋꿋히 잘 견디며
이렇게 멋지게 성공한 삶을 살아 오신 청향님은 인생을 참!1잘 살으셨어요.
앞 날에 평안과 행복이 함께 하시기를...
그땐 얌전히 학교만 다니던 학생신분이라... 등교하는 버스안에서 뉴스를 들었지요..
부통령(정확한 직책이 부통령이었던가 총리였던가) 이 갑자기 대통령 권한대행을 한다고 하는 뉴스였는데....
응? 뭐지 이상한데? 하고
버스에서 내려 같이 등교하는 친구에게 서거소식을 들었었던...
그일로 힘든 시간을 겪으신 분들이 있었네요....
앞으로는 좋은일만 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