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5부 26
“그래 어찌 됐어, 까삐또니치?” 생일 전날 산책을 나갔다가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기분 좋게 돌아온 세료자가 늙은 수위에게 주름잡힌 외투를 건네면서 물었다. 키가 큰 수위는 껑충한 높이에서 조그만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 그 붕대 감은 관리가 왔다 갔어? 아빠가 그를 만나 주셨어?”
“접견하셨습니다. 주임님이 나가자마자 제가 아뢰었습죠.” 유쾌한 표정으로 눈짓을 하면서 수위가 말했다. “자, 제가 벗겨 드리죠.”
“세료자!” 내실로 통하는 문 앞에 선 채, 슬라브인 가정 교사가 외쳤다.
“직접 벗으세요.”
가정 교사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료자는 그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수위의 멜빵을 붙잡고 선 채 그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서, 아빠가 그 사람한테 필요한 걸 해줬어?”
수위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붕대를 감은 그 관리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무언가 청탁하러 일곱 번이나 다녀갔기에 세료자와 수위의 관심을 끌었다. 한 번은 그를 현관에서 마주쳐, 자신과 아이들이 다 죽게 생겼다면서 자신이 찾아왔음을 아뢰어 달라고 수위에게 애처럽게 부탁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후에 세료자는 한 번 더 현관에서 그 관리와 마주쳤고, 그에게 관심을 쏟게 되었다.
“어땠어? 아주 기뻐했지?” 세료자가 물었다.
“기뻐하다마다요! 거의 펄쩍펄쩍 뛰면서 나가더군요.”
“그런데 혹시 뭐 온 건 없고?” 잠시 말이 없던 세료자가 이렇게 물었다.
“글쎄요, 도련님…..” 수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귀엣말로 말했다.
“백작 부인한테서 온 게 있지요.”
수위가 얘기하는 것이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자기한테 보낸 생일 선물이라는 걸 세료자는 금방 알아챘다.
“뭐라고? 어디 있는데?”
“꼬르네이가 아버님 방에 갖다 뒀습니다. 틀림없이 아주 좋은 걸 겁니다.”
“얼마나 큰데? 이정도 돼?”
“그보다는 좀 작습니다만, 좋은 겁니다.”
“책이야?”
“아니요, 물건이던데요. 자, 어서 가보십시오, 바실리 루끼치가 부르십니다.” 가정 교사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자 수위가 자신의 멜빵을 붙들고 있던, 장갑이 반쯤 벗겨진 손을 조심스레 바로잡아 주면서 눈을 찡긋하고는 고갯짓으로 부니치를 가리켰다.
“바실리 루끼치, 지금 가요!” 맡은 의무에 충실한 바실리 루끼치를 늘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예의 쾌활하고 정다운 미소를 지으며 세료자가 대답했다.
세료자는 너무나 즐거웠고 모든 게 너무나 행복했기에, 여름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리지야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조카달에게서 들은 또 하나의 집안 경사를 자신의 친구인 수위와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경사가 관리의 기쁨과 장난감을 받은 자신의 기쁨에 더해져 그에게는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세료자에게 그날은 내내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는 그런 날이었다.
“있잖아, 아빠가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훈장을 받았다는 거 혹시 알고 있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벌써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하러 다녀갔는걸요.”
“어때, 아빠는 기뻐하셔?”
“황제가 내려주신 은덕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만큼 공을 쌓으셨다는 뜻이지요.” 수위가 근엄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세료자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훤히 알고 있는 수위의 얼굴을, 특히 희끗희끗한 구레나룻 사이로 늘어진 턱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그 턱은 언제나 수위를 아래로부터 쳐다볼 수밖에 없는 세료자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할아범 딸은 집에 다녀간 지 한참 됐지?”
수위의 딸은 발레 무용수였다.
“평소에 다녀갈 겨를이 있겠습니까? 걔들도 수업이 있으니까요. 도련님도 수업이 있으시잖습니까. 어서 가보세요.”
방으로 온 세료자는 수업을 받기 위해 책상에 앉는 대신, 선물로 가져온 물건은 자동차가 틀림없다는 추측을 교사에게 얘기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가 물었다.
그러나 바실리 루끼치는 오로지 2시에 도착할 교사를 위해서 문법 수업을 준비시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그럼 이것만 좀 얘기해 주세요, 바실리 루끼치….” 이미 책상 앞에 앉아 양손에 책을 들고 있던 세료자가 갑자기 물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끼보다 더 높은 게 뭐예요? 아빠가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훈장을 받은 거 아세요?”
바실리 루끼치는 알렉산드르 네프스끼 훈장보다 더 높은 건 블라지미르 훈장이라고 대답했다.
“그것보다 더 높은 건요?”
“모든 것 중에서 제일 높은 건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안드레이> 훈장입니다.”
“안드레이 훈장보다 더 높은 건요?”
“모르겠는데요.”
“어떻게 선생님이 모르실 수가 있어요?” 그러고서 세료자는 팔꿈치를 괸 채 깊은 공상에 빠졌다.
그의 공상은 아주 복잡하고 다채로웠다. 그는 아버지가 별안간 블라지미르와 안드레이 훈장을 받는 상상을 하다가 이어서 자신이 수업 시간에 훨씬 더 착해지고, 자라서는 그 모든 훈장은 물론 사람들이 고안해 낸, 안드레이 훈장보다 더 높은 훈장까지 받는 상상을 했다. 새 훈장을 고안하자마자 자신은 그걸 받을 만한 공적을 쌓게 될 것이었다. 사람들이 더 높은 훈장을 고안해 내면, 그 즉시 자신이 그에 걸맞는 공적을 쌓은 식이었다.
그러한 공상 속에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래서 교사가 왔을 때는 시간 및 장소의 상황어와 행위 양상의 상황어 수업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교사는 불만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서글펐고, 그의 슬픔이 세료자의 심금을 울렸다. 학과를 다 외우지 않은 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교사가 설명해 주는 동안에는 확신이 서고 이해가 가는 것 같다가도, 혼자 남게 되면 그 즉시 ‘갑자기’라는 짤막하고 너무나 명백한 단어가 행위 양상을 나타내는 ‘상황어’라는 것을 도저히 기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엇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선생님을 슬프게 했다는 게 안타까웠고, 선생님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는 선생님이 말없이 책을 보는 순간을 포착했다.
“미하일 이바니치, 선생님의 영명 축일은 언제인가요?” 세료자가 느닷없이 물었다.
“공부 생각이나 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영명 축일은 이성적인 인간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여느 날들과 똑같이 공부를 해야 하는 날일 뿐이죠.”
세료자는 선생님을, 그의 성긴 턱수염과 콧등에 생긴 자국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온 안경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고, 이미 교사가 설명해 주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선생님이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선생님의 어조에서 그 사실을 감지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사람들은 저렇게 지루하고 쓸데없는 걸 죄다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기로 약속한 걸까? 대체 왜 선생님은 나를 자기한테서 밀어내는 걸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그가 우수에 잠긴 채 자문했다.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