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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문화를 알기위해 부여를 간다,
온조 대황이 말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던 그 산야
백제를 망하게 했기에 우리국토가 이렇게 쪼그라 들게 한 그 우라질 소정방 놈이 낚시질하던 조룔대가 있는 백마강
서글픈 전설을 낳게한 낙화암과 고란사라는 절
약수 한번을 마시면 3년을 더 살 수 있다는 고란사의 약수
그리고 보기 힘든 고란초 피어있는 2000냔전 백제의 흔적을
1400년동안 진흙속에서 새로운 탄생을 위해 기다리고 잇던 애달펐던 백제와의 대화를 하기 위해
그 유명한 금동봉황향로를 만나 숱한 대화를 하고픈 마음에 난 밤을 설쳐가며 부여로 간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부여역사관
우리는 이 궁의 배치도에 따라 탐방했다.
사비성의 궁궐 천정문
천정전
궁전안의 화려한 모습 진골님 작
궁궐 안
능사
사실 먼저 백제의 첫 도읍지를 탐방해야 하겠지만 불행히도 한성백제시대의 수도가 어딘지
잘 모른다
'한성백제'란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 하남위례성을 수도로 하던 시기이며
이에 대해 백제가 수도를 지금의 공주로 옮겼을 때를 '웅진시대', 이후 부여를 수도로 했을 때를
'사비시대'라 한다.
일설은 송파구 풍납토성 몽촌토성이라 하나
하남시 역사교실에서는 교수 한분이 피를 토하듯 외치시며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은 평야가 좁고 비만 오면 늘 물에 잠기고
또한 고구려 아차산성에서 바로 보이는 가까운 곳에 도읍지일 리가 없고
그 예로 춘궁동안에는 옛날 궁안에서 쓰던 이름을 지금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춘장리 궁내리 ,골말등
춘궁동 주위이름에 옛고을이라는 뜻에서 고골로 불리고
하남시에는 근처에 아차산성
한강을 끼고 있고
밑에는 남한산성의 보루가 있는 하남시가 하남 위례성이라고 외치시며 우리를 하남시 일대를
살피게 하면서 증거가 될만 한 것들을 보여주시나 우린 알 길이 없어 언제고 더 확실한 증거물이
드러나 만인이 인정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 도미부인 상은
하남의 도미나루터를 연상시킨다.
지금의 하남시 팔당대교와 팔당땜 근처지에 배알미라는 마을이 있고 그곳에 도미진 나루터가
흔적만 남아있다.
두 눈이 뽑힌채 풀뿌리를 캐 먹고 살던 도미는 그 옛날의 궁궐인 춘궁동에서 개로왕한테 도망친
도미 부인을 만나 고구려에서 잘 살았다는 전설이있다.
고분 공원
이러한 죽음에서 부터 종교 청학 문화가 역사가 태어났겠지
적당한 크기의 동그란 반원들
죽음이란 열마나 편안한 안식인가 어머니의 품같이 평화가 안식이 공종하는 늘 푸른 이곳
한편의 드라마같은 연극을 긑내고 긴 휴식을 취하는 주인공
자기가 갈구하며 박박 긁던 초록빛 사발 하나씩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기
까지 하다..
고요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의 소요로 인해 초록 사발을 열고 나와 우리와 한자리에
앉아 허심탄회하게 옛 영화로운 생활상을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은 백제인들이다.
'인생은 잘 죽기 위해 산다'
'살아서도 꽃이 되고 죽어서도 꽃이 되리라'...어느 시인작
진골님
어느 분이 그 ㅁ덤속에 벽화가 있다해 진골님과 쫓아가 묘지 앞으로 다가갔다.
얼마나 귀한가 이 작품은 진골님이 애써서 잡은 백제묘지의 벽화이다. 적어도 근 1400년된
작품인데도 색상이 그대로.
'아무도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네.
무덤 속이든지 꿈 속이든지'.....어느 시인
죽은 자의 숨결을 느끼면서 어느시인의 시를 음미해 본다.
천장에도 벽화가 ...2000년전 산 사람의 숨결을 이곳에서 느껴본다. 진골님 감사합니다.
'하늘은 아직도 하늘
햇빛은 억만년을 햇빛으로
아직도 구름이 되고 물이 되어 흐르기까지 ' 남의 글
재연한 백제의 생활상들
고란사절
고란사 절벽에서 자란다는 고란초
궁남지
내 나라가
옛 백제가 얼마나 고운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를 한눈에 보게 한다.
옥양목 걸쳐놓은 듯한 하늘
바람은 능수버들 휘영청 휘날리게 하여 세상 온갖 티끌 먼지를 쓸어내고
연못에 가득찬 푸름이 넘쳐차 푸르름으로 내가 지금 살아 있음에 환희를 느끼게 하고
궁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섬
마음이 한껏 부푼 우리들 이곳이 꿈길인가 환상인가 천상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마음까지 바람에 날리는듯 중력이 없는듯 구름위로 날으는 듯 흐르는
듯다리위에서 선녀가 되어 있어 지금동안 내 살아온 궤적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에
대한 희열로 행복이 춤만되어 지긋이 눈을 감아본다.
깊은 물속의 아픔과 설움에 뿌리를 내린 이연꽃은 어찌 이리도 푸르고 고울수가 있을까
신비롭기까지 한 이 아름다운 연못의 넋을 잃을 정도다.
잠깐 비가 와 빗방울이 진주빛 이슬이 되어 또르르 굴러 떨어뜨리는 모습을 재미있게 보면서
옛날 한 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머리 나쁜 낭만이 제대로 외고 있을리가 없다.
단 '종일 굴러 떨어뜨리는 구슬이 몇말이던가 '
방울 방울 구슬을 만들고 떨어뜨리고...
이꽃은 가시연꽃이다.
연꽃잎은 떡시루 바닥에 까는 시루본 같은데 엮어져있는 골골마다 가시가 뾰족 뾰족 날카롭게
서 있다.
이 험한 곳에거 어쩌면 저리도 고운 연꽃이 피었을까
신기함과 더불어 쨘한 마음이 든다
나를 키우는 내 어머니의 마음이 저리 했을 것 같아서...
백마강
난 하남 역사실에서 아리랑의 탄생 배경으로 이슈 삼는 20여개가 넘는 설을 들은 적이있다.
그리고 그 근원이 백제의 서글픈 역사라고.
백마강과 정선 아리랑 (아리랑의 대표적인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 고개를 날 넘겨주소 (가사가 정확하지 않은 )'
학자들 그 아리랑의 설중 하나는
경복궁 지을때 귀멀고 ...
몽고의 어원중 하나
아라리 가 아리수 등 한글에서 변천
불교 언어중 하나 등 등 20여개가 넘는다.
하지만 너무나 슬픈 백제의 최후가 우리의 마음을 동하게 하여 설운 마음을
음률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지금의 정선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그 유래로 유왕산의 행사를 들어본다
인터넷 사진 글
소정방이 의자왕과 융 그리고 대신 장병등 무려 12000명을 끌고 당나라로 가던 중 백마강으로
가는데 이 왕과 왕자 포로등을 보기 위해 많은 백제 유민들이 사비성으로 몰려 와 계속 따라
가면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왕과 왕자를 배웅하였으며 이 일행들이 산에서 쉬었는데 이때부터
그 산의 이름을 留王산이라 부르는 유래가 되었다.
의자왕은 울면서 따라 오는 유민들에게 어떻게 하든 살아서 돌아 와 다시 백제를 일으키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끌려간 다음해 돌아가셨다고 한다.
바로 그곳이 그 유명한 중국에 낙양 북망산이며
그 왕 묘지가 그냥 거칠은 평지 풀밭이라 그 곳을 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허망함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즉 아리랑은 그 기원이 백제가 망했을 때 모든 여인들이 당나라로 끌려가는 남편과 아들 손주를
보기위해 유왕산에
올라 가 배가 당나라로 가기위해 모롱이를 돌아가는데 영원히 보지 못할 남자들을 부르며
부른 소리가 바로 메라니조 ? 음에 노래라고 한다
즉 아리랑 고개를 날 넘겨주소의 고개' 라는 단어가
언덕이 아니라 내 남자를 아들을 손주를 돌려 달라는,
목(項 ) 고개라도 돌려 달라는 애절하고 비통한 노래라는 것이다
이 음률이 돌고 돌아 수백년 흐른 뒤 고려가 패망하여 강원도 산골에서 고려때 선비가 우리의
애절하고 쓰린 심정을 누가 아리요 하는 심정으로 쓴 한시가 민요로 구전되어 온 것이 흐르고
흘러 하여간 600년전 부 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를 붙여 민요로 불리워 졌다고 한.
난 이 정선 아리랑의 유래를 백제 망한 데서 시작해 찾고 있던 교수의 말씀이 생각나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다
당나라로 끌려가는 황포돛배도 지금은 유람선으로 바뀐 배를 보고 그 백제 여인들의 한과
눈물이 섞인 백마강 강물을 ...
榮枯盛衰
우리나라의 르네상스라고 할 정도로 가장 찬란하고 빛났던 문화를 일으켰던 백제가 이렇게
스러지다니,,, 꽃은 피고 지고 자연의 순리다
이 낭만 공연히 서러워서 슬픈 시를 안고 망상에 젖어본다.
의자왕의 초라한 가묘다.
특히 해동증자라 일컽던 의자왕의 묘는 그냥 거친 들판에 묻혀 현존하고 있어
의자왕을 기리는 분들께서 낙양 북망산에서 의자왕 묘라고 하는 자리에서 흙을 퍼 제사를
지내고 가져와 가묘를 만들렀다고 함
알찍 사비성을 내주고 항복한 뒷면에는 백제의 역신인 배반자 지금의 수도방위 사령관급인
예식진이란자가 의자왕을 잡아 성문을 열게하고 왕을 당나라에 바쳤다함
의례 슬픈 역사 뒤에는 이런 역적들이 있었으니 참으로 마음 아린 역사다.
그 후 아들 융은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다시 백제 부흥활동을 했으나 안되었고 손녀딸 즉
의자왕 증손녀는 당나라의 황손과 살았함
이곳의 묘지석을 통해 확인된 고구려와 백제 유민은 흑치상지 장군,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隆),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과 남산(南産),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 헌성의 손자 비(毖) 등이 있다.
이들의 묘지석은 베이징 고궁박물관과 허난성박물원에 보관돼 있다.
잠깐 그 당시로 찾아가 보고 싶지 아니한가. 인터넷 사진 글
우리는 흔히 의자왕 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나라를 망친 망국의 대표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융성했고 막강한 국력도 갖췄었다고 한다.
무열왕 시대만 해도 큰 나라는 백제고 신라가 작은 나라란다.
당시 655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 북부를 침공해 30여 개 성(城)을 무너뜨리ㄱ고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입해 2개 성을 함락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당 소정방은 이듬해인 660년 6월 13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다.
당군(唐軍)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병사 5만 명과 함께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공격한다.
계백 장군이 5000여 병사와 황산벌에서 결사항전했지만 결국 사비성은 함락된다.
의자왕은 왕자와 장군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다.
백제 유민들은 사비성 함락 4개월 만인 660년 10월 주류성(周留城·용어 설명)을 임시
왕성으로 삼는 한편 왜에 긴급지원군을 요청한다.
20년 넘게 왜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급거 귀국시켜 달라는 청도 함께.
당시 왜왕은 사이메이 여왕이었는데
여왕은 백제와 가까운 후쿠오카로 직접 가서 구원군을 준비시키고 오사카로 가서는 무기를
준비시킨다. 하지만 여왕은 661년 1월 6일 오사카 항을 출발해 여러 곳을 돌며 군사를 모으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출병은 아들 덴지 왕 대(代)에서 이뤄진다.
덴지(天智) 왕은 어머니의 시신을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로 옮긴 다음 11월에 상을 치르자마자
출병 준비를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663년 총 4만2000명이나 되는 왜군을 주류성으로 파견한다.
육로는 신라군이 지키고 있어 부득이 바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 수군은 663년 8월 27일 주류성과 가까운 금강 하구(백강)에서
백제와 왜군 연합군을 맞닥뜨린다. 일본서기는 당시 왜군의 전투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당나라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군사들과 당 수군이 대전했다.
일본이 패해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
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왜군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김용운 책에서)
당시 동원된 왜 수군의 배는 무려 10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당나라 왕조의 정사를 기록한 책)’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왜군의 시체들로 핏빛이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이 내 나라를 위해 금강에서 이렇게 피를 흘린적도 있네요.
삼충사 백제를 끝까지 지키려다 돌아가신 충신 3분
성충 ... 계백장군님
인터넷 사진 글
국보 9호 정림사오층탐과 익산 미륵사지 탑이 백제의 유일한 탑이라고 한다.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당나라에서 생을 마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묘지 복제품,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이른바 당평백제비문 탁본 등도 볼 수 있습니다.
국보 11호 익산 오층탑인데 정림사탐과 함께 유일한 백제 탑이라 인터넷 사진 글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라함.
정림사지 모형도 이 답으로 참고했다함
백제 정림사오층탑과 일본 호류지 오층탑과 너무 같은 비
즉 백제 문화가 일본으로 흘러간 증거물
이제부터 약사에 길이 남았을 백제금동봉래산 봉황향로 설명이다
백제왕실에서 선왕을 제사 지낼 때 사용하기 위한것 으로 제작 되었던 향로
봉황은 聖人의 탄생과 임금이 치세를 잘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룰 때 출현하는 상서로운 새이고, 천조(天鳥), 서조(瑞鳥), 신조(神鳥)로 여겨져 온 이 봉황이 출현할 때는 뭇 새들의
영접을 받으며 내려오는데
이 때, 아름다운 음악으로 불리는 봉명(鳳鳴)은 5음의 묘음으로서 주악신선으로 상징화
했습니다. 봉황(鳳鳴)의 턱밑 여의주 바로 아래에는 2개의 구멍이,
5악의 뒤쪽에는 5개씩 두 줄로 10개의 구멍이 있어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했습니다. 실제로 대향로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보면 동적(動的)인 자태로 그 아름다움
이 배가됩니다.
용과 각종동물 봉황(鳳鳴)등을 새긴 것은 국가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각을 하였습니다. 특히 용(龍)은 최고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 지키게 하였습니다.
황홀하고도 눈부신 전체의 모습
백제 금동향로는 봉황 뚜껑장식, 봉래산이 양각된 뚜껑,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용 받침의 4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의 꼭지 위에 있는 봉황은 꽁지를 쳐들고 날개를
활짝 펴고 있으며, 그 밑으로는 5인의 악사(樂士)가 둘러 있고, 다시 아래로는 74개의 산이
중첩되어 있다.
향로의 뚜껑은 중첩된 형태의 산악으로 묘사되어있고,
그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봉황이 보주 위에 서 있다.
봉황 바로 아래 즉 뚜껑의 제일 위쪽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 완함, 동고, 종적, 소 등의 5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소발로 깎은 머리는 오른쪽으로 묶여져 있으며 통견의 도포자락과
악기마다의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연주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사이에 표현된 5 봉우리에는 그 상단마다 1마리씩 5마리의 새가 얼굴을 들어 정상부에 있는
봉황을 올려 보고 있다.
그 아래 향로의 뚜껑에 장식된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14ㅇㅇ년 전 세월을 보상 받기 위해
새로 태어날을 기다리며 어머니 뱃속에서 태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낭만 )
봉황측면
봉황의 앞 뒤면
인물상
이렇게 힘차고 역동적으로 살아 튀어 나올 것 같은 조각은 우린 흔히 고구려기상을 닮았다
그렇지 아니한가
악기상
ㅋ컴으로 단층 촬영을 한것임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위한 촬영으로
이 향로는 몸체와 뚜껑에 우뚝서있는 봉황의 속을 공간으로 비워낸 밀납법과 금은을 수은으로
아밀감화한 외관상으로 금도금으로 눈부시게 찬란한 외관을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에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작 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불교문화연구가들은 백제금동대향로가 불교의 연화화생설과 관련있다고 하는데,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의 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있는 광대하고 장엄한 이상세계를 말한다.
연화장 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가 있어 그 향수해에 큰 연꽃이
핀 것을 연화장이라 하는 이상세계이다.
즉, 대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 위의 세계가 이상세계라는 설명이다.
신선상
기마상들
동물상
삼신상
가종 동물들상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들로 인해 외국 과 많은 교류가 있음을 시사해준다.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문화분위기에 젖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654년에 작성된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은
그러한 분위기에 젖은 당시 귀족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사택지적비문이 그러한 세계관을 글로 나타낸 것이라면 금동향로는 조형으로 표현했다는 차이뿐이었고,
그 주제는 전면 일치한다.
금동향로의 1백 개 부조상은 영원불멸의 하늘세계의 상징으로서 봉황과 북방 설원(雪原)에서 썰매 끄는
사슴, 상상의 동물인 공작,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의 신성함, 사람과 가장 가까운 영물로서 원숭이 등을
표현하였다. 그래서 고대 백제인의 이상과 꿈, 영원의 세계를 표현한 소우주라 할 수 있다.
각종 조각품들
몸체는 피어나는 연꽃 모양으로 사이사이에 두 사람과 물고기 등 수중생물 26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런 몸체를 고개를
바짝 쳐든 용 한 마리가 세 발을 틀어서 굳건히 받치고 있는데, 한 발은 번쩍 쳐들어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보여 준다.
이렇듯이 여러 상징들로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불교의 연화화생관을 이루고
한편으로는 음의 정점인 수중세계의 용, 그 위의 지상세계, 다시 천상세계로 나누어 양 정점인 봉황에 이르기까지 동양 전통의 음양설을 적용하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어 내고 있다.
봉래산(중국식으로는 박산) 향로는 중국에서는 이미 한나라 때부터 만들어져 왔으나 고대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징적인 향로가 만들어진 예는 없다.
7세기 초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향로는 백제 사람들의 사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사상을
이처럼 섬세하고도 자신 있게 조형적으로 형상화해 낼 수 있었던 백제 문화와 자신감을
우리에게 새삼 일깨워 준다.
향로는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서 냄새를
제거한다거나 종교의식을 행한다거나, 아니면 구도자의 수양정진을 위해 향을 피웠던
그릇이다.
중국에서는 훈로(薰爐) 또는 유로(鍮爐)라고도 하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바로
박산향로(博山香爐)다.
중국의 동쪽에 불로장생의 신선과 상서로운 동물 들이 살고 있다는 상상의 이상향.
바다 가운데 솟아 신선이 살고 있다는 박산향로는 중국 전국시대 말에서 한나라 초인
기원전 3세기 대부터 만들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높이가 62cm에 이르는 대형향로는 발견된 예가 없기 때문에 이 백제향로
야 말로 가히 세계 최대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향로의 몸체와 뚜껑이 모두 조각품이어서 7세기 백제인들의 정신 세계와
예술적 역량의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 향로가 발견된 것은 부여 능산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모두 도굴 당한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어 국가에서 사적13호로 지정하고 잘 정비해
보존해 왔다.
그런데 날로 관람객이 증가하자 부여군에서는 주차장을 확장하여 관람객의 편의를 제공
하고자 했다. 주차장을 이 고분군과 부여나성 사이 계곡부에 있는 계단식 논을 닦아
조성하기로 하고 작업에 앞서 매장 문화재 조사를 하게 되었다.
부지는 계단식 논인 만큼 항상 물을 머금고 있어 질척거렸다.
그래서 이런 위치에 유구나 유물이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발굴도 그러했습니다.
살얼음이 끼일 정도의 추운 겨울이었던 1993년 12월12일 오후 4시30분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부여 능산리 발굴도 어느정도 마무리될 때 쯤이었습니다.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 당시 부여국립박물관 학예사는 공방의 수조라고 추측했던
물구덩이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차가운 물기를 머금고 기와편이 촘촘히 쌓여있던 자그마한 물웅덩이.
이에 김 학예연구사는 신광섭 당시 부여국립박물관장(현 국립민속박물관장)에게 보고를
했고, “한 번 해보자”는 신 관장의 말에 웅덩이를 꽃삽으로 조금씩 노출시켜 나갔다.
1m이상 내려가자 석면,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다량의 기와, 백제금동불상 방배편이
나오면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보통 어른 키보다도 작은 1m 조금 넘는 웅덩이에서 당초무늬가 있는 띠가 보여 광배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향로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요.”
김 학예연구사는 즉시 김정완 학예실장과 신광섭 관장에 보고했고, 신 관장은 ‘야간 발굴’
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습니다.
약 1m20㎝의 물구덩이 속, 얼음장 같은 물을 종이컵으로 퍼냈고 스펀지로 빨아들이고
손으로 진흙을 걷어냈다.
한 시간 정도의 작업량이었지만 왠지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습니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않고 작업에만 몰두한지 3시간 반쯤 지났을까.
발굴단은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유물 앞에서 자신들이 눈을 의심했다.
입으로는 탄성이 절로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명칭은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였다.
그러자 '백제금동용봉수미산향로'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 등
.결국 문화재위원회는 국보 제287호로 지정하면서 명칭을 '백제금동대향로'로 결정했다.
아무런 조사 없이 중장비가 동원돼 주차장이 조성됐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백제의 국보를 잃었을 것이다.
(이 낭만 이글을 읽고 휴우~~~한숨이 나온다.
이 백제 금동향로를 자세히 알기 위해 책을 ㅈ빌렸으나 두꼐가 한 3- cm 넘어 읽다
이향로를 알아야 한다면 고대사 차체를 공부해야 될 것 같기에 포기하고 컴에서 올렸다.
두서 없이 퍼와 미안합니다 우선 피곤하니 나중에 책을 나온 것을 다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낭만)
[출처]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 용봉봉래산 향로 (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작성자
ohyh45(사진 글 전부 다음에서 펌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지기님
안내와 설명을 해 주신 솔새님
복조리 운영자님
경빈님
사진 찍어주신분 여러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2015년 8월 31일 낭만
첫댓글 부여의 역사와 유물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어 고맙습니다.
낭만님 유익한 자료 대단히 감사 감사합니다 !!
자주 뵙기를 바라며~~2탄을 기대합니다 건승 하십시요
덕분에 백제에대한 기타등등
많은 도음 되어 감사 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항상. 유익한. 잘정리된 글 올려주셔서. 더 이해하기쉽습니다 감사이 잘보고갑니다. 다음길에. ~~또. 뵙지요
역사적인 배경을 사진과 설명을 자세히 올려주셔서 유익한 역사 공부를 했습니다
늘 건겅허사어서 좋은 자료와 함께 유익한 글과 사진을 많이 올려주세요..늘 건가앟시고요...
낭만님 백제 역사 자세히 정리하여 올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영원한 문학소녀 낭만님의 정리된 소감문 잘 읽었습니다.
낭만님..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