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동에서 태어난 옥구 장씨 장덕수 그분이 23살 때 화순 사평(배수)에서 태어난 장흥고씨 그녀와 1949년 11월 26일(음) 결혼합니다. 5남 2녀의 자녀을 두구요. 처음에 연속 딸만 출산하여 외할머니께 쉽지 않은 구박도 받으셨나봅니다. 그런데 불로동 178번지는 본적으로 기록하고 그랬는데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양복점을 하신 그분은 6.25 전쟁중이라 많이 힘드신 가운데 양복점 일을 하셨나 봅니다. 꾸준히 사업은 번창하신 듯 합니다만 재봉틀케이스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셨습니다. 양림동에서 운영하셨는데 양발 공장도 함께 운영하셨던 걸로 기억됩니다. 꽤 넓은 부지의 공장을 운영하셨는데 마당에 큰 소나무도 몇 그루 있었고, 뒤안엔 무화과나무도 있어서 여름 끝자락에 무화과 열매도 따먹고 그랬습니다.
마당에 건물을 증축하여 운영하셨는데 철거반이 동원되어 일명 망치부대인데 그들이 동원되어 기둥을 부스려는데 그분이 잘 타협하셨던 걸로 기억됩니다. 저와 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든 형제들은 슈퍼에 외상장부를 가지고 맘대로 살 수 있는 혜택을 누릴정도로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전국체육대회 때 양림동 집에서 선수들이 머물릭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전화기도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합니다. 2국 2150번!
사직공원 아래여서 참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사직공원 팔각정도 그분과 함께 아침마다 올라가곤 했습니다. 동물원도 수영장도 있어서 참 좋았던 동네였습니다. 양림동 공장을 운영하실 때 직원분들과 버스타고 구례화엄사로 놀러 다녀온 적도 있습니다. 화순 사평(배수) 냇가에도 놀러가셨는데 물이 깊어서 제가 그분 등에 업혀서 물놀이를 하였고 그분이 물고기를 초장에 찍어서 그냥 드시는 것을 보고 놀래기도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쯤인가 밥상을 들어 그냥 네동댕이 치실 정도로 무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1차 사업 실패로 잠결에 눈을 떠보니그분이 그녀의 무릎에서 우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1차 사업 위기로 공장은 소태동으로 이사를 하였고 그곳에서 재봉틀 공장을 다시 운영하셨습니다. 재봉틀도 근영미싱이라고 부르고 아마도 그분의 아호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소태동으로 이사하실 때 전화를 놓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으로 전봇대를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집 뒤 빈터에 고추를 심었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추를 따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공자에서 근무하신 분들은 목공에 윤화병, 칠에 차, 상택이 형 등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업 2차 위기 때 다시 학운동 숙실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재봉틀케이스를 제작하시면서 행주도 함께 운영하셔서 우리들은 행주를 비닐봉지에 넣는 작업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430평이라 텃밭도 일구고 배추며 무우도 심으시고 돼지도 키우고 그러셨습니다. 하지만 다시 3차 위기가 닥쳐와서 큰형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였지만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였던 거 같습니다. 군에 입대한지라 그 이후 상황은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사업 실패로 이어져서 가족 모두 힘든 시기를 보내셨던 것 같습니다.
제대 한 후 학운동 집은 사라지고 화정도 주공아파트에 지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모두 힘든 시기를 보내시고 계셨습니다. 여러 이유로 화정동 광덕고 사거리에서 햄버거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오뎅도 함께 팔고 계란도 함께 준비하였습니다. 공장 사모님에서 햄버거 장사 아줌마로 변하셨습니다. 양림동 친구분들은 사업 위기가 온 후 소태동으로 이사한 후 만나지 않으셨다고 그러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납니다. 친한 친구분 한범이 엄마 등
아버지은 화정동으로 다시 돌아오셔서 햄버거 장사도 도우시고 염주동 텃밭을 일구시고 그러셨습니다. 그 더운 여름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꽤 많은 땅을 일구고 계셨습니다. 곧 염주 체육관으로 변하는 그 지역입니다.
정신 차리고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루 도시락 3개를 준비하여 아침 첫 버스에 학교 도서관에 가서, 마지막 버스로 집에 오는 것을 3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습니다. 덕분에 1988년 12월 25일 아시는 분 학생 영어과외를 하던 중 서석고등학교에서 합격 연락이 왔습니다. 첫눈이 내려서 그날이 또한 생일이여서 너무도 기뻤습니다. 모든게 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매일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충장로 중앙교회를 그분도 그녀와 함께 열심히 예배보고 그러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참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여러 이유로 다시 운암동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 회갑연을 북구 식당에서 연회를 열고 행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회보신 분이 지금은 광주대학교 부동산학과 강의도 하시고 솔로몬부동산의 대표이시기도 합니다. 다시 우산동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그녀 모두 충장로 중앙교회를 열심히 다니시고 텃밭도 일구셨는데 당뇨까지 있는 그분이 너무 무리를 하셔서 그만 중풍이 심하게 오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10년을 그녀 홀로 그분을 간호하셨습니다. 자식들이 번갈아 가면서 아버지 운동 시켜드리고 목욕시켜드리고 1층에 막내가 있어서 더욱 극진히 모시게 되었습니다. 오랜세월동안 어머니 홀로 간호하시다가 많이 힘드셨습니다. 인슐린 주사도 그녀가 그분에게 놓아드리고 정성껏 잘 돌봐주셨습니다. 누워계시는 그분을 둘째 세째형님이 모시고 계림동에 있는 예식장을 빌려 어머니 회갑연을 열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시고 어머니께서 노래도 부르시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 업고 2수원지 위에 공터에서 가져온 음식 돗자리에 차리고 상쾌한 공기 마시면서 온가족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혼자 마음대로 외출도 못하시고 말없이 내조에 온 힘을 다하셨는데 그만 그분은 2001년 2월 12일(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화정동 중앙교회에 다니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열심히 운동도 하시고 텃밭도 혼자 가꾸시고 자식들이 찾아가면 상추며 오이며, 깻잎 고추 등을 주시는 낙으로 지내셨습니다. 홀로 지내시는데 자식들이 번갈아 찾아뵈었지만 점점 운동량도 적어지시고 힘들어 하셨습니다. 작은 누나까지 한국으로 나와서 어머니 팔순연을 무주리조트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음악홀을 통째로 빌려서 그녀의 노래도 듣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다음 날 향적봉을 케이블카 타고 올라가서 굽이굽이 산능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 동생집에 가보고 싶으셔서 2012년 3월 25일 드디어 고양시 동생집에서 주무시게 되었는데 내려오시는 내내 정말 잘 다녀왔다고 이제 여한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2012년 5월 11일 작은 누나가 귀국하여 어머니랑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참 행복해 하셨던 순간들 입니다. 누나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후 자식들이 다시 번갈아 가면서 모시기도 하고 자주 집에 찾아뵙고 그랬지만 큰형님 집에서 마지막까지 모셨습니다. 하지만 가족 회의를 거쳐서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2012년 10월 4일 패밀리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온가족 모두 슬퍼 한없이 눈물을 쏟아내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현명한 선택이였거니 생각하면서 자식들 모두 번갈아 가면서 극진히 모셨습니다. 운동도 시켜드리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잊어버리시지 않게 자주 찾아뵈었습니다. 어머니 외로워하지 않으시도록 당번을 정해서 자식들이 자주 찾아뵈었는데도 말씀도 없으신데 다른 분들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자꾸만 말씀이 줄어드시네요. 참 마음이 아픕니다.
뜻하지 않게 피부트러블로 인하여 요한병원도 다녀오시고 기독병원도 가셔서 치료하셨는데 옴이라고 잘못 오인하여 패밀리하고의 의견 충돌로 어머니하고의 인연을 여기까지로 하고 어머니는 새롬요양원으로 2019년 7월 11일 옮기시게 되었습니다. 6층 건물이라 옥상 일광욕도 하시고 자식들 모두 패밀리요양원처럼 다시금 당번을 정해서 자주 찾아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