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이 직접 쓴 책은 없다!
조선 시대 여성으로 살아갔던 신사임당에 관한 사료가 많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는가? 신사임당 본인이 직접 남긴 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지금까지 전해오는 신사임당 관련 이야기는 아들 율곡 이이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글이나 남편 이원수의 친구들이 남긴 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 계열들이 자기 당파의 명분을 세우고자 율곡 이이를 높이면서 그 어머니 신사임당을 한 껏 부풀린 듯한 글들이 전부다.
신사임당에 관한 역사적 진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사임당의 작품에는 '전칭작'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확정된 작품이 아니라 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오는' 작품이다. 전칭작으로 부르는 이유는 48세 일찍 사망했음에도 전문 화가들보다 남아 있는 작품이 많다는 점과 한 사람이 그렸다고 보기엔 화풍의 편차가 조금 크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오는 작품들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사임당의 글씨체를 보자. 막내아들 이우를 비롯해 백광훈, 백진남, 한호의 글씨에서 사임당의 글씨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백진남이 사임당 글씨체를 잘 계승했다고 한다. 사임당은 16세기 초서풍을 연 개창자로 평가된다.
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이현룡)의 학품은 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진다.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 정치적 견해가 노론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면 노론 입장에서는 사임당을 높이는 일이 곧 이이를 높이는 일이었고 필연적인 결과로 사임당의 재능을 부각했다.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의 토양이 되었던 , 강릉
강원도 강릉은 예로부타 예국, 하슬라, 명주, 동원 등으로 불렸고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은 '임영'이라는 이름을 아끼고 사랑했다. '임영'은 큰 바다에 닿아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사임당은 1504년 강릉에서도 북평촌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북평은 강릉 관아의 북쪽에 있는 평야를 일컫는다. 사임당 어머니 용인 이씨는 외손자 권처균에게 집을 물려주었다. 이 집이 오늘날 '오죽헌'이다. 권처균의 호가 '오죽헌'이기 때문이다. 혼인한 후에는 봉평과 오죽헌을 오가며 생활했다. 강릉부에 속한 봉평에 터를 잡고 산다. 봉평의 원래 이름은 태기산과 의풍포의 가운데 글자를 딴 '기풍'이었다. 그러다가 양사언의 호인 봉래의 '봉'자와 평촌의 '평'자를 따서 봉평으로 고쳤다고 한다. 봉평에는 강릉부의 재정 운영과 관련 있는 창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봉평창은 강릉부의 재정 운영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지금도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백오포리에는 신사임당이 이이를 임신한 곳으로 전해지는 장소로 판관대가 있다.
강릉에서 명망이 높고 위세가 큰 집안들로 토성이라는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김,왕,최,박,곽,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임당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임당 어머니의 외가 쪽 사람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의 외할아버지 최응현이 중심 인물이다. 사임당 어머니 용인 이씨는 90세까지 장수하다 생을 마친다.
사임당은 많은 유산을 상속 받았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이 생전에 다섯 자녀와 두 손자에게 나누어준 재산은 노비 173명, 기와집 2채, 논55두락, 밭7복 6속이었다. 이 중 사임당을 포함해 딸 다섯에게 나눠준 재산은 노비 163명이었다. 사임당은 그 중 노비 총 35명을 상속받았다. 남자종 16명, 여자종 14명. 기타 성별을 알 수 없는 하인.
드라마 또는 소설에서 그려지는 사임당의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위해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쓴 책들을 참고하면 인물을 탐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