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물류창고에서 만나요(외 1편)
이 은
창고가 보이면 십자 성호를 굿습니다 그것이 창고에 대한 예의이니까요 어제는 S푸드, 훈제된 고깃덩어리들을 포장했어요 그제는 올포유, 당신을 위해 사정없이 옷을 갰어요 하마터면 옷에 깔려 죽는 줄 알았어요 오늘은 아이스크림 공장, 우주선이 희미한 빛을 내며 지나가요 떨어지는 것들은 모두 속도가 됩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얼음이 쏟아져요 얼어붙은 손가락이 비명을 질러요 손가락은 가만히 둔 채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려요 빵과 빵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빵또아에 끼어 있는 손가락이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설렘의 구멍에 얼음을 가득 채워요 설렘과 설렘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꼿꼿이 서서 눈보라를 맞고 있는 설렘, 재빠르게 히말라야산맥의 눈을 퍼담아요 몸속에 가득한 눈보라,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보라, 눈보라에 갇혀서, 뜨거운 어둠 속에서 오소소 돋아나는 눈보라, 눈보라를 혜치고 깨진 얼음 조각 같은 달이 따라옵니다 버스 안에 몸을 숨기고 얼어붙은 손가락을 문지릅니다 오늘따라 버스 안은 엄숙합니다
강 건너에 오늘의 일용할 해가 떠올랐습니다 언니, 우리 내일 또 만나요!
선물 포장
상자가 해체될 때까지 선물이 쌓인다 한 개의 선물이 선물로 포장되기까지 포장을 기다리는 선물들이 불시에 나의 욕망을 들여다본다 네게로 오는 선물이 다시 내게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은 선물이 당신에게 도착해서 선물이 될 때까지 선물은 선물이 아닌 것이다 송달지를 흘깃 보니 내가 사는 주소지 근처 아파트로 배달될 선물들이 포장된다 송장을 분실할 경우 선물은 목적지를 상실한 채 해체 순서를 기다린다 선물이 몇천 개로 늘어나고 쌓이고 쌓인다 거대한 트럭의 아가리를 향해 던져진다 붉고 물렁물렁한 소시지들이 내 팔뚝에 걸쳐진다 선물이 팔뚝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선물은 선물이라 부르는 순간 미끄러진다 사라지고 마는 꿈과 같은 이름이 된다
선물들이 해체된다 해체된 선물이 쌓여서 다시 선물들로 퍼져 나간다
—계간《시산맥》 2023년 겨울호, 제8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 이은 / 강원도 동해 출생. 2006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불쥐』 『우리 허들링 할까요』 『밤이 부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