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탈 교회 시대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신앙에 대한 바른 정립입니다. 한국 땅에 선교사를 통하여 복음이 들어올 때의 모습과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6.25의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초대 선교사들의 상황은 다양하였지만, 종말론 신앙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였습니다. 신앙은 이 땅의 삶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즉 내세에 대한 소망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모습의 하나가 세대 주의적 색채가 가미된 역사적 천년왕국입니다. 전천년주의라고 말하는 종말론은 주님 재림 후에 있는 천년왕국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삶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함께 천년왕국의 삶을 사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신앙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해방되었습니다. 비록 미국의 힘으로 인하여 주어진 결과이지만, 한국교회에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찾아온 이념의 싸움은 남북을 가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끔찍한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6.25전쟁은 한반도에 가장 큰 슬픔이었습니다. 국토가 분리되고,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하여 괴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서로 죽여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게 50년이 지나고 60년대의 보릿고개가 시작되었습니다. 가난의 굴레가 주는 서글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때 교회는 새로운 운동을 하게 됩니다. 바로 기복주의 운동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전도하고 설교하였습니다. 지치고 쓰린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기복주의는 한 줄기의 빛이 되었습니다. 복을 받는다는 달콤한 소리는 서글픈 삶을 살아가야 했던 한국 사회에 도전을 주었습니다. 더불어 병 고침과 예언과 방언이라는 신비주의는 기복주의를 더욱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신비주의적 기복 신앙을 가장 분명하게 전한 사람이 바로 조용기 목사였습니다.
신비주의적 기복주의는 산업화 시대에 강력한 폭탄이 되었습니다. 경제 성장이 일어나면서 곳곳에서 가난을 극복하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더불어 교회는 밀려오는 사람들로 점점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디든 교회 이름만 걸면 사람이 몰려온다는 소리가 횡횡하였던 시절입니다. 신비주의적 기복주의는 교회 성장의 우산 아래 보였습니다. 교회 성장만 한다면 교단과 신학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로교 순복음, 순복음 감리교, 순복음 성결교 등 모두 교회 성장과 개인적 성공에 집중하였습니다. 신앙이 철저하게 개인에게 집중하였습니다. 개인이 성공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일과 월요일이 다른 신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성공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았습니다.
신비적 기복주의는 90년대에 들면서 도약합니다. 여기에는 복음주의라는 또 다른 우산이 작동합니다. 신비적 기복주의가 사회적 기능을 잘 감당하지 못하자 복음주의라는 우산으로 갈아탑니다. 그리고 복음적 사회참여라는 도구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존 스토트이고 대표적으로 로잔언약 운동입니다. 한국에는 옥한흠의 사랑의교회이고 이때 평신도를 깨운다는 구호를 만듭니다. 당시에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옥한흠 목사가 만들어 낸 평신도 용어는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실기한 단어가 됩니다. 이 용어는 로마 카톨릭은 형이며 구교이고, 개신교는 동생이며 신교라는 개념을 연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로마 카톨릭은 계급으로 평신도와 사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 깨어나도 평신도는 사제가 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가 깨어나면 가장 충성스럽게 해야 하는 것이 사제를 섬기는 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평신도가 나오는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약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모두가 제사장이고 단지 직분의 질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성도이고, 형제요 자매입니다. 이 근본 위에 직분의 질서가 있습니다. 목사는 사제이고, 장로와 집사는 평신도라는 개념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90년도의 옥한흠목사의 제자 훈련의 모토로 만들어진 평신도를 깨운다는 말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너도나도 제자 훈련을 하였고, 복음주의 그룹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제자 훈련을 중심한 복음주의 운동도 궁극적 목적이 교회 성장이 되었습니다. 교회 성장을 위한 제자 훈련입니다. 옥한흠목사의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제자 훈련이 아니고,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제자 훈련은 인기가 없습니다. 거대한 사랑의 교회가 되었기에 제자 훈련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대형교회 출신의 교역자들이 대형교회의 담임으로 가는 현상은 교회 성장의 기대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내세에 대한 소망이 급격히 사라지고 현세주의적 신앙이 득세하게 됩니다.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중요한 가치가 들어왔지만, 곡해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철저하게 현세주의적 삶이 지배합니다. 사회적 성공과 부동산 투기를 통한 부유한 삶이 성공한 신앙으로 작동합니다. 이땅이 전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자 대를 이어 성공을 누리고자 자녀 투자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교회마다 수능 백일기도와 같은 샤머니즘이 들어옵니다.
그나마 본질적인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던 모습의 하나는 박영선 목사였습니다. 오직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거대한 교회를 만드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중적 인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교회 성장과 대형교회 건축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렇게 90년대 대형교회의 기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세계교회에 유례가 없는 대형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수백에서 수천억에 이르는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산업화의 열매로 주어진 신도시의 개발은 강남의 성공을 이어받아 곳곳에 세워지고, 교회도 덩달아 거대하게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신도시 개척의 요건이 좋은 시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곧이어 주차장 시설이 교회 오는 우선순위가 됩니다. 주차장이 완비되자 자녀 교육이 신앙의 우선순위가 됩니다. 점점 교회는 개인주의로 더 좁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비적 기복주의와 복음주의는 교회 성장을 위하여 맹위를 떨쳤습니다. 그렇게 60여 년을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힘이 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깃발만 꽂으면 교회가 성장하던 시대가 아니라 꽂아 놓았던 깃발이 뽑히고 있습니다. 탈 교회 시대가 왔습니다. 여기에는 교회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개인적 욕망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임이 탄로가 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삶의 만족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통하여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첫사랑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즉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닌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60년 동안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개인의 만족과 평안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필요할 때는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는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삶의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신비적 기복주의와 복음주의 교회 성장에 머물고 있습니다.
교회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가 되지 않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교회도, 성도 개인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탈 교회 시대에 다시 세워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심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예수 믿음의 목적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빠르게 가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야 합니다. 교회와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입니다.
첫댓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닌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입니다~
교회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
빠르게 가는 것이 아니나 바르게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