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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전과웅 (55세/정선)
◎ 전인범(全仁釩)
생애 /1958년 9월 6일 (60세) ~
출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본관 /정선(旌善)
종교/개신교
부모 /아버지 전주화, 어머니 홍숙자
배우자/심화진
친척
고모 전혜성, 내종형 하워드 고, 해럴드 고
복무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81년 ~ 2016년
최종 계급
ROK army Jungjang.svg 중장(中將)
전인범(全仁釩, 1958년 9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태어나 8세 때 모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해 4년 간 생활 후 귀국, 1977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에 입교하였다. 1981년 4월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임관하여 30사단 90연대 15중대 소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이래 9사단 29연대장,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부 전작권 전환 추진단장, 27사단장,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특수전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2016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현역 시절 한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총 11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 장성 중 최다 훈장 수훈자로 기록되었다.
전역 후 브루킹스 연구소 방문학자, 존스 홉킨스 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해외 연수 중인 2017년 문재인의 요청으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제19대 대통령 선거 경선 캠프 안보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18년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생애 초반
전인범은 1958년 9월 6일에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전주화와 외교관인 어머니 홍숙자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대부분은 서울에 살았으며, 1965년 부모의 이혼 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인 모친 홍숙자가 뉴욕 총영사관 부영사로 발령됨에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4년 동안 뉴욕 맨해튼에서 생활하였다. 1969년 귀국한 뒤에도 그의 모친은 그가 영어를 잊지 않도록 AFKN을 주로 시청하게 했으며 저녁식사 때만큼은 영어로 대화하게 했다. 그 또한 『리더스 다이제스트』, 『뉴스위크』, 『타임』과 같은 시사 잡지를 빼놓지 않고 읽으며 어릴 때부터 국제관계에 대한 감각을 익혀나갔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미국 TV 프로그램 《Combat!》에 나오는 군인 샌더스 중사를 동경하던 그는 12살 때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군사관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육사 진학을 꿈꾸게 되었다.
그 뒤 리라국민학교와 대경중학교를 거쳐 1977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입교했다. 육사 동기생 중 성적이 꼴찌에서 두 번째였으나 영어 시험은 만점을 받았던 그는 1981년 4월 3일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군인 생활
1981년 초임지인 30사단 90연대 15중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 중 1군단장 이기백 중장에게 발탁되어 대한민국 육군 최초로 중위 계급을 달고 3성 장군인 군단장 전속부관을 맡게 되었다.
1983년 10월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 당시 이기백 대장은 합동참모의장으로 대통령을 수행했으며, 전인범 중위 또한 이기백 장군의 전속부관으로서 아웅 산 묘소 참배에 동행하였다. 당시 폭탄 테러로 아수라장이 된 묘역에서 추가 폭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 뛰어든 그는 중상을 입은 이기백 장군을 구출해내어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훈하였다. 그때 폭발로 온몸에 박힌 파편 제거수술을 받은 이기백 대장이 의식이 돌아오자 마자 “각하께선 괜찮으시냐, 지금 몇 시냐, 밥은 먹었냐”라고 묻는 모습에 상관과 부하를 저렇게 챙기고 위하는 게 진짜 군인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1986년 30사단 90연대 2대대 중대장 시절에는 육군의 우수 전투중대장에게 주는 재구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초급 지휘관으로 중대원들의 사격 훈련 중 소총 사격 영점을 못 잡는 병사를 데려다가 실탄을 주고 자신은 표적지 앞에 서서 사격을 하게 해 영점을 잡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군사정권 시절 그가 중대장을 역임한 부대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나면 연세대학교를 점령하는 부대였는데, 그는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군인이 대학생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많은 갈등을 했다. 그래서 원래는 데모 때 중대장이 맨 뒤에 서서 진압을 지시하게 돼 있는데 그는 맨 앞으로 나가서 돌 맞더라도 제일 먼저 맞고 죽으려고 했다고 과거를 회고하였다.
소령으로 진급한 뒤에는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정책장교 및 군사외교협력장교 보직을 받아 많은 통번역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 한미연합사령관 로버트 리즈카시 대장으로부터 육군표창훈장(Army Commendation Medal)을 받았다.
중령 때에는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 연습처 을지포커스렌즈 연습장교를 맡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합모의 연습을 기획하고 실행한 공로로 2002년 근무공로훈장(Meritorious Service Medal)을 받았다.
2004년 12월에는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이 이라크전 때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다국적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국군이 그 외에는 없어 처음에는 직속 부하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그였다. 그래서 바쁘다는 외국군 장군들 대신 브리핑을 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고자 노력해 점차 조직을 장악하였다고 밝혔다.
그는 미군과 영국군, 호주군 장교 10여 명을 지휘해 5400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이라크 유권자 1400만 명의 투표를 지원 및 감독하였으며, 3500t에 이르는 선거 관련 물자를 각 투표소에 공급하고 치안 유지를 지원하는 일도 맡았다. 선거가 무사히 끝난 뒤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한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 2006년 11월 육군사관학교 37기 동기생들 가운데 1차로 장성 진급자에 선발되어 8개월 뒤인 다음해 7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2007년 7월 국제 테러단체인 탈레반에 의한 아프간 한국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한 카불 군사협조단장으로 급파, 인질 구출작전을 지휘하여 사건 발생 43일 만에 21명의 인질을 구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임무는 군사협조단 단장으로서 국제안보지원군사령부에 파견돼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외국군을 설득할 논리가 부족하니 그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가자고 생각하였다.
우선 스웨덴군 소장에게 ‘사람들 살려야 한다’, ‘사무실이 필요하다’, ‘상황실 출입을 허가해달라’, ‘인터넷, 유선전화, 휴대전화 쓰게 해달라’, ‘숙식 제공해달라’ 등을 부탁했다.
상황실에서는 유학시절에 알고 지낸 독일군, 미군을 만나 사람들이 죽고 사는 문제이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군사협조단을 통해 수집된 인질 및 탈레반 세력의 동향 첩보 등은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는데 기초자료가 됐고, 특히 인질 억류지역에서 동맹군의 불필요한 군사행동을 억제한 노력은 인질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9년 11월 소장으로 진급해 제27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하면서 그는 전역하는 병사들을 위해 전역식을 열어주고 직접 참석해 “군 생활 하느라 고생했는데 내가 줄 건 육군 소장의 경례밖에 없다”며 전역병들에게 부동자세로 경례를 해주었고, 부대를 방문한 군수사령관 앞에서 병사들에게 보급되는 슬리퍼의 열악함을 토로하며 보급에 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사령관 앞에서 슬리퍼를 물고 있기도 하는 등 장병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부대 소재 지역 주민들을 위한 대민 봉사활동과 산천어축제 등 대규모 문화관광 행사 지원에도 노력하여 훗날 그가 사단장을 이임하고 한미연합사로 영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지역 주민들은 “전 사단장의 도움에 보답코자 이임 후 공적비를 건립키로 주민들이 뜻을 모았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2011년 5월에는 한·미 연합작전 태세를 발전시킨 공과 한·미 우호관계 증진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등급 훈장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하였다. 그는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합동참모본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추진단장으로 근무 중 한미가 2007년에 합의한 전작권 전환을 구체적으로 진행하면서 150개에 달하는 전환 과제를 계발하고 진행을 감독하며 미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추진, 복잡한 전환 과정을 관리하는 총 책임을 맡은 바 있다. 미국으로부터 이 훈장을 수훈한 외국인으로는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영국 국왕 조지 6세, 소련군 총사령관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등이 있다.
2011년 11월 18일 미국 국방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시사하는 교훈을 언급하였다. 그는 “《스파이더맨 1》은 우리에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는 것을 가르쳐 주고 《스파이더맨 2》는 원하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음을 알려준다”며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미국인들은 《스파이더맨 1, 2》를 평생 동안 적어도 세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권하기도 했다. 같은 달 21일 사단장 임기를 마치고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으로 영전했으며, 1년 5개월 뒤인 2013년 4월에는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겸 한미연합사 부참모장에 취임하였다.
2013년 10월 중장 진급과 함께 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동년 11월에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 2013년 현재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 중 최다 훈장 수상자로 알려져 있다.
특전사령관 취임 후 부대의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 새로운 장비의 개발, 해외 특수부대와의 교류협력 등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를 위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피카티니 레일이나 광학장비와 같이 관행적으로 몰래 사용하던 사제 장비들의 사용을 허용하는 등 기존의 과도한 제재 규정들은 폐지시켰으며, 특히 헬기 사격, 천리행군 인증제 도입과 같이 과거에 하지 않던 실전적 훈련들을 대거 강화하였다.
우선 일반 병사보다 3배 정도 총을 더 쏘는 특전사 요원의 사격량을 5배로 늘렸고 전진하면서 사격할 때 탄피받이를 못 쓰게 하였다. 탄피 하나 없어지면 전 부대원이 나서서 찾아야 하는 것이 매우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대신 탄피를 주울 필요가 없도록 전진 사격 훈련시 1명이 뒤따라가게 하여 실제 몇 발을 쏘는지 세게 하였다. 또한 사령관 취임 당시 특전사에 체계적인 체력 증진 프로그램이 없어 특전사에서 35년간 복무했고 체력 단련과 관련해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원사에게 12개 코스의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특전사 요원의 허벅지가 평균 1cm 커졌고 체력 프로그램 시행 후 6개월 뒤 미군 특전사 요원들과 경기를 해 수영을 제외한 나머지 종목을 한국 특전사 요원들이 다 이기게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훈련들은 특전사의 실제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긴박한 전장상황에서 오역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한미 연합작전 수행능력 향상을 위해 전군 최초로 한국군은 영어로, 미군은 한국어로 브리핑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전 사령관은 이러한 자신의 개혁적인 행보에 관해 “모든 3성 장군은 4성 장군이 되고 싶어하고 4성 장군이 되는 게 군인으로서 더 없는 영광이라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다. 일각에선 내가 부대 훈련을 실전적으로 바꾸고 개혁을 하면서 무리수를 두어 4성 장군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특수전사령관이고 내 임무는 4성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백전백승 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특수전 부대를 만드는 게 나의 사명이다”라고 밝혔다.
훗날 그가 사령관을 이임한 뒤 사제 장비는 장병들의 통일성을 해치고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이에 대해 특전사에 부대장비 및 개인물자를 납품하고 연구하는 특전사 출신의 한 예비역 대위는 “우리 군은 지나치게 ‘군복제 규정’에 얽매여 있다.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은 유연한 사고를 가진 지휘관이었다. 그는 “‘군복제 규정’보다 임무와 전술향상이 더 중요하다. 사고를 유연히 하고 우수 장비라면 사제라도 활용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전술장비 및 피복의 사용과 발전을 장려했지만, 그가 교체되면서 이런 유연한 사고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우리 군의 유연한 사고는 지휘관에 따라 들쑥날쑥 하다”며 아쉬움을 소회했다.
뉴데일리 군사전문기자 태상호는 “전인범 前 특수전사령관 같은 깨어 있는 특수전 지휘관들이 (특수부대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지만 특수작전에 대한 군내외부의 중요성 인식 부족과 비대칭 전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큰 군(Big Army)만 중요시 하는 풍토로 인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라고 현 한국군에 대해 비판했다.
2014년 12월에는 공무 출장 중 터키군 총사령부 재활병원을 방문, 6·25 전쟁 참전용사인 알리 젱기스 투르크오울루를 위문하였다. 그는 6·25 전쟁 기간 가장 치열한 격전지 중 한 곳으로 꼽히는 평안북도 군우리 전투에서 터키군 1여단 소속 소대를 이끌었고, 보육원도 운영하며 많은 전쟁고아를 보살폈다. 전인범 중장은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2015년 4월 5일부터 12일까지는 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와 미 육군 특수전사령부를 직접 방문, 미 통합특전사령관 조셉 보텔 대장과 미 육군 특전사령관 찰스 클리브렌드 중장을 만나 한·미 연합 특수작전에 대한 실질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저격용 소총과 미군 주력 소총인 M4, 권총, 산탄총, 박격포, 방탄복 등을 점검하고 체험하는 등 미군 특전사의 장비와 무기를 현장 견학하고 실제 사격도 하였다. 이와 함께 방미 기간 동안 시애틀에 있는 6·25 참전 기념공원을 찾아 참전용사비에 헌화하기도 했다.
2015년 4월 14일 특수전사령관 임기를 마치고 제1야전군 부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특전사령관 이임사에서 그는 “우리는 야수의 본능을 잃어가는 동물원의 사자가 아닌 초원을 질주하며 천하를 호령하는 용맹함을 간직한 대한민국 육군의 대표부대 특전사 검은 베레 용사들”이라며 “누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도전하고 노력하는 정신이 바로 특전 정신이다. 우리들 특전용사에게 결코 불가능은 없다”고 강조했다.
2015년 6월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New Westminster College)의 특별연구원(Distinguished Fellow)으로 선정되었다.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 총장 로버트 굿윈 3세는 “그는 윤리적 리더십에서 괄목한 성과를 내었고 교육훈련에 평생 동안 헌신해왔다”며 “현 세계의 국가적 안보 위협에 대한 이해는 그가 정부의 국제적, 국가적, 지역 단위 이해관계자들의 민군 상호운용성과 방위협약에 대한 가치 있는 통찰력을 갖추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리더십, 외교와 사이버 보안에 관한 연구의 설계와 전달에 있어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다. 위원회와 나는 그가 우리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새로운 특별연구원이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인범 중장은 특별연구원으로서 학문적 수월성의 최고위 기준에 대한 지원에 공헌해왔고, 뉴 웨스트민스터 대학과 연구원들의 세계적인 조직망 발전에 헌신해왔다고 알려졌다. 이 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는 필리핀 대통령 피델 라모스, 체코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 캐나다 국방참모총장 대장 레이 헤노 등이 있으며, 특별연구원으로 선정된 인물 125명 가운데 한국인은 그가 최초이다.
2016년 5월 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 훈장(USSOCOM Medal)을 받았다. 미 특수전 발전에 공로가 있는 개인에게 수여되는 이 훈장은 1994년 제정된 이후 한국군이 받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미 통합특수전사령부는 미 육군과 해군(해병대), 공군의 특수전사령부를 지휘하는 3군 통합사령부로, 전 중장은 2013년 10월부터 2015년 4월까지 한국 특전사령관 겸 연합특전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연합작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훈장을 받게 되었다. 미 통합특수전사령부는 훈장 수여 증서를 통해 “연합특전사령관으로서 미 최정예 특수부대와 네이비 실(SEAL), 특수전 항공자산 등 1000여 명 이상의 미군을 훌륭하게 지휘했으며, 뛰어난 전문지식과 공익을 위한 헌신으로 한미연합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밝혔다.더불어 전 장군의 추진력과 창의력,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결의와 함께 장기 비전이 대한민국 방어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전 장군의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개인의 추진력은 대한민국과 한미연합사에 큰 기여가 됐다고 전했다.
2016년 7월 28일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을 가졌고 같은 달 31일 전역하였다. 이날 전역식에는 한미연합사령관 빈센트 브룩스 대장, 미 8군사령관 토마스 밴달 중장, 미 2사단장 테드 마틴 소장 등 주한미군 수뇌부와 이기백, 정호용, 김동진,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 등 한미 양국 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 중장의 전역을 축하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의 보국훈장 국선장과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을 각각 받았으며, 특히 보국훈장 국선장은 그가 중위 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걸어주었다.
전 중장은 전역사에서 선배 장군들과 미군 장성들, 동기, 후배들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군인들이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약속을 지켰다.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검은 베레 영원하라”는 특전 정신을 외치며 전역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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