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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피란3 - 해양박물관을 보면서 과거 지배자 베네치아의 영욕을 생각하다!
2022년 5월 4일 슬로베니아의 코페르 Koper 에서 이졸라 Izola 에 도착해 요트와 보트가 빽빽이
정박중인 항구를 구경하고는 다시 서쪽으로 달려서 한시간 만에 피란 Piran 에 도착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해변과 부두를 구경한후 3시가 되어 호텔로 찾아가 체크인을 합니다.
피란 Piran 은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만 건너편에 돌출된 반도로 남부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고 북부
해상은 이탈리아와 접하는데 염전이 있어 소금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고 13~18세기에는 베네치아 지배 를
받았으며 구시가지는 돌이 깔린 골목과 역사적 건축물이 해안선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 합니다.
피란은 항구도시로 요트와 보트가 빽빽하게 정박중이니 걸어서 해양박물관 Pomorski Muzej 에 들어가니
베네치아 공화국 지배아래 항구도시로 발전해온 해양역사와 소금의 산지이니 제염역사를 전시하고
있는데, 크로아티아 서부와 슬로베니아 서부 달마티아는 베네치아를 빼놓고는 역사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베네치아 는 아드리아해를 내려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돌아 콘스탄티노플이나 알렉산드리아로 가는데
도중에 슬로베니아의 피란과 크로아티아의 해변 도시들을 장악해서는 배의 선원과 해군은 자국인을
쓰지만 갤리선의 노잡이는 이 지방 사람들을 고용 했으며 여기 항구에서 식량과 채소며 과일등을 선적했습니다.
베네치아는 유리공업 을 일으켰고 선박을 만들어 동방무역에 나서니 제노바, 피사, 아말피와 더불어 4개도시에
크로아티아의 라구사(두브로브니크)와 5대 무역국으로 불리니 콘스탄티노플과 흑해, 레반트 지역과 이집트
의 알렉산드리아와 교역해 비단과 후추를 비롯 향신료 등 동방무역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서로 싸웁니다.
마침내 제노바와 베네치아 두 도시가 살아남았고 두 도시는 오래토록 전쟁을 벌이니 1차 성 사바스 전쟁
(1256 ~ 1270년)으로 1262년 세타포치 해전, 1264년 사세노 해전, 1264년 티레 전투,
1266년 트라파니 해전, 1267년 아크레 전투이며, 그후 2차전쟁, 3차전쟁을 거쳐 4차전쟁 까지 이어집니다.
1261년 베네치아의 유혹에 넘어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해 세운 라틴제국 이 니케아 제국에 멸망
하고 미하일 8세가 동로마제국을 재건하자 베네치아의 소아시아와 흑해 무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베네치아
의 빈 자리를 동로마 제국과 손잡은 제노바 공화국이 빼았으려 하자 양국은 동지중해에서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베네치아와 같은 해군 역량을 보유했던 제노바와의 전쟁이었기에 때로는 큰 패배를 겪기도 하였고, 특히 4차
전쟁에서는 제노바, 헝가리 왕국, 파도바에 의해 도시 전체가 봉쇄 되고 제노바군이 도시 외곽까지 돌입
하는등 베네치아는 멸망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반격을 가해 재기에 성공했지만 휴전을 조건으로
많은 영토를 잃고 말았으니 특히 헝가리에게는 여기 슬로베니아의 피란등 달마티아의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제노바와의 전쟁을 겪은후 베네치아는 섬 주위에 육상 영토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으니 베네치아 인근
육상 국가인 파도바가 제노바 편을 들면서 순식간에 도시가 고립 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이 끝난후 베네치아는 평화적인 합병 또는 술수를 통해 롬바르디아 내륙으로 진출해
본토 속령을 넓혀 나갔으며, 1402년 밀라노까지 영향권 하에 넣게 되었는데 1410년 베네치아의 함대는
3,300척 규모에 달했으며 헝가리가 쇠퇴하면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서부등 달마티아도 다시 회복합니다.
한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기치 아래에서 부활한 동로마 제국은 다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튀르크족(오스만 투르크) 이 아나톨리아 서부로 들어와 동로마령 아나톨리아를 잠식하기 시작했으니
1299년에는 오스만 1세가 오스만 베이국을 세우고는 동로마 제국의 잔여 아나톨리아 영토를 탈취합니다.
소아시아 북서부의 조그마한 세력에 불과했던 오스만 은 건국후 동로마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더니
발칸반도 일대가 내전과 계승분쟁, 자연재해 등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유럽까지 진출하였고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아우르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오스만 투르크 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앞바다인 에게해와 동지중해 일대의
헤게모니를 쥔 베네치아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이후 베네치아와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는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백년간 충돌하게 됩니다.
1396년 오스만이 십자군을 격파한 니코폴리스 전투때 베네치아는 대 오스만 십자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1413년부 터 1419년 까지 에게해와 마르마라해 일대에서 베네치아와 오스만
투르크 해군 사이에 일련의 교전 이 벌어지는 등 이전에도 두 세력 간에 대결은 있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베네치아와 오스만 투르크의 본격적인 충돌은 1423년 테살로니키 공성전 부터
였으니 1422년 오스만 투르크군이 동로마령이었던 테살로니키를 포위하자 위기에
빠진 동로마는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테살로니키를 베네치아 에 넘겼습니다.
자신들이 포위하는 사이 테살로니키가 베네치아 땅이 된 사실을 모르고 있던 오스만은 나중에 알게 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와 베네치아가 맺은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테살로니키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으니 수년간의 포위 끝에 1430년 베네치아는 테살로니키를 포기 하게 되었고 오스만의 영토가 됩니다.
오스만 술탄국 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때, 베네치아는 함대를 편성해 지원군
을 파견했지만 교황청과의 협상이 발목을 잡은 데다가 베네치아 본국에서도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가라는 명령을 취소하고 에게해 섬 곳곳에 있는 함대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고
하는 바람에, 베네치아 함대는 그리스 근해까지 진출했지만 콘스탄티노플 구원에는 실패합니다.
베네치아 함대가 제때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했다면 오스만 함대의 포위를 풀었을 가능성이 많았고,
그렇게 되면 공방전 전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었으니.... 콘스탄티노플의
베네치아 거류구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을 내걸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에서 최후까지 싸웠습니다.
사실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군 은 베네치아 단독으로 육상전을 벌이기
에는 너무 강대했으니 육군의 규모가 작은 편인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에 참가했다고 해서 베네치아 혼자서 로마의 멸망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으로도 봅니다.
동로마제국은 군사적 방파제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만으로 오스만 술탄국에 외교적으로 빌붙으며 간신히 생명만 유지하고 있던
불안한 상태였으니 장기적으로 로마의 멸망을 막으려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후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 시절의 무역특권을 어느정도 유지하였으나, 오스만
제국과 동지중해의 제해권 을 두고 충돌하게 되면서 이 특권을 잃게 되었지만 베네치아는 적은 영토
를 가지고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서아시아 일대를 세력권에 넣었던 오스만 제국과 수백년을 싸웁니다.
오스만 제국을 창건한 투르크인이 본래 유목민족이어서 바다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니 그러나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에 케말 레이스라는 걸출한 해군 지휘관
이 등장하고, 셀림 1세 치세(1512~1520) 에 오스만이 직속 함대의 수 를 늘리며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들을 해군 으로 끌어들이는등 해군을 강화하면서 유명무실해집니다.
1463년 오스만 제국은 아테네의 튀르크인 지휘관에게 속해 있던 알바니아인 노예가 베네치아령으로 도망간
사건을 빌미로 베네치아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헝가리, 백양 왕조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에 대항 하였으나, 육지에서 강력한 면모를 보여주는 오스만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네그로폰테와 모레아, 알바니아 일대가 오스만의 공세에 무너지면서 1479년 베네치아
는 패배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네그로폰테와 렘노스, 알바니고,
달마티아 일대를 오스만에게 넘긴 베네치아는 배상금과 연공까지 지불하기로 합니다.
1499년 오스만은 베네치아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걸어왔으니 케말 레이스가 이끄는 오스만 해군의 맹활약
으로 이번 전쟁에서도 베네치아는 패배하고 말았으며 1503년 오스만과 조약을 체결한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의 거점인 두라초, 그리고 모레아 반도의 코론과 모돈을 오스만 투르크에 할양 합니다.
이렇게 베네치아는 4차 십자군 후부터 유지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상실 하고
말았는데.... 물론 '독점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것이지 동지중해에서의 베네치아의
영향력은 1669년 크레타 공방전이 끝난 후 크레타의 상실 이전 까지는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베네치아는 제노바와의 전쟁후 도제 미켈레 스테노의 정책아래 육상으로의 확장을 시도했으니 트레비소
(1389)를 시작으로, 베로나(1405), 파도바(1405), 롬바르디아의 브레시아(1426), 베르가모(1428) 까지
진출해 밀라노 공국과 접하게 되었으며, 16세기 이후 해상 영토의 상실을 만회하려 진출방향을 이탈리아
반도 내부로 돌려 베로나, 파도바 지역을 베네토로 칭하고 볼로냐등 로마냐 지역에 베네치아 속령을 설치합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에게 볼로냐 지역의 반환을 통보했으나 베네치아는 거절하였고 갈등이
촉발되었으니 1508년 12월에 교황이 주도하여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등과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면서 베네치아를 압박 하였고 체사레 보르자와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저지당합니다.
특히 율리오 2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 프랑스를
끌어들여 결성한 캉브레 동맹과 벌인 1509년 5월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는 처참히 패배하고 그동안 얻은 이탈리아의 영토를 다 토해 냅니다.
그후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세력에 의해 북이탈리아 영토를 잃은데 불만을 품고 있던 프랑스와
다시 동맹을 맺은 베네치아 는 1515년에 이르러 아냐델로의 패배로 인한 피해를 만회
하고 영토를 회복 하였지만, 그 이후 북이탈리아에서 더 이상 영토를 크게 확장하지는 못합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코스탄티니예 무역 경로를 독점하게 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 독점 패권
을 잃게되고, 16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대서양 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무역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고 그간 베네치아가 독점해오던 향료
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간 포르투갈에 의해 더 싼 가격으로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1521년에는 포르투갈에 향료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당연히 거절당했으니
향신료가 유럽에서 부와 패권 을 좌지우지했던 시대에 포르투갈이 들여온 향신료를 싸게
사서 되팔겠다는 것은 포르투갈에게 부와 패권을 도로 내놓으라는 의미니 포르투갈의 입장
에서는 부와 패권을 베네치아에게 넘겨줄리가 없고, 굳이 베네치아를 통해 팔 이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 함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을 견제 하기 시작한 데다 인도인들의 저항도
있어,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를 통한 향신료 교역 은 다시 증가했고 포르투갈측 첩보 문서에
인도를 포기하고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사는게 이익이라고 쓰여 있기 까지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범선 시대에 아프리카를 왕복해야 하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았던 만큼, 동지중해
무역은 여전히 수익성 이 있었으니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여전히 매우
강했고, 갤리선이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습니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
에게 승리 를 거두었는데..... 그러나 영토면에서는 오히려 키프로스를 상실 하면서 레판토
에서 오스만의 '수염을 태우는 대신 한쪽 팔을 뽑혔고' 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 %가 죽었습니다,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어쩔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 을 체결하였는데,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은 엄청나게
반발했으니 이후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잉글랜드
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공급받지 못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어 진출을 방해하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는 전통 을 유지
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니 점점 고립되어가던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까지 당하고 맙니다.
이후 베네치아는 예전의 부와 힘을 잃게 되었지만 그래도 16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만명 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 대국으로 행세
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섬 을 두고 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으니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격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의 부국답게 엄청난 보급으로 치열하게 항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 프란치스코 모로시니
(1619~1694) 가 1669년에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 에 넘어가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자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자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 했으며 이후 모로시니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이 패배하자
결성된 신성 동맹에 베네치아가 참가하니 복귀해 베네치아군을 이끌고 그리스에서 오스만군 과 싸웁니다.
모로시니는 1688년에 도제로 선출되었고 1694년에 사망했는데 1699년에 신성 동맹이 승리하면서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수복하지 못했지만 보상으로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와 일부 영토 를 오스만에게 할양받았으며 그후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다시 오스만에게 잃게 됩니다.
이후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북이탈리아) 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
으로 국가를 유지했는데....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수 있는 아드리아 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데 주력했고, 1716년 그리스 코르푸 섬(키르케라)을 성공적으로 방어 하며 어느정도 성공을 거둡니다.
프랑스는 1797년 당시 북이탈리아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북이탈리아를 침공 하여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으니.....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중립 내지 합스부르크
제국 편에서 싸웠으나 그 결과 나폴레옹에 의해 점령당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멸망 합니다.
당시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전성기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해서, 전투함이라고 부를수 있는
함선이라곤 갤리선 7척을 포함한 11척에 불과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이 압류한
함선이라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프리깃 2척이 전부였으니 이 프리깃 2척은
나중에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 본국으로 탈출 할 때 사용한 선박이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은,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 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했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전쟁 결과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
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포함한 라인 강 서쪽의 신성 로마제국
영토를 얻고 북이탈리아에 프랑스의 괴뢰국인 치살피나 공화국과 리구레 공화국을 세웁니다.
프랑스는 그 대신 보상 차원에서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대부분을 합스부르크 제국에 할양 했으니 그리하여
베네치아와 여기 슬로베니아의 피란등 영토는 합스부르크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멸망할
당시 1800년 베네치아의 인구는 140,000명으로 과거보다 늘어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인구였습니다.
이후 1805년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체결한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에서 넘겨받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 시켰는데 그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롬바르도~ 베네토 왕국" 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1866년 신생 이탈리아 왕국 으로 이양됩니다.
첫댓글 해양박물관 잘 보았습니다
베네치아 혼자서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진출을 막아내느라 고군분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