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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6장 57-68절 억지 재판
여러분들은 어쩐지 몰라도 저는 아닌데도 박박 우기는 사람을 보면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예전에 도시의 큰 교회에서 성경을 함부로 푸는 청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들을 귀는 닫아 놓고 자기 말만합니다. 억지를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들을 귀는 열어놓지 않고 자기 주장만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그 억지를 쓰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그당시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고 또 백성들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을 잡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가보니 거기에는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잡혀가신 예수님을 멀찌감치 뒤따라 갔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그 결말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야바의 집뜰로 갔는데 거기에는 하인들이 불을 쬐고 있었숩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하인들 곁에 앉아서 예수님 쪽을 계속 쳐다보면서 불을 쬐었습니다.
거기에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을 칠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짓 증인들은 많았지만 예수님을 사형시킬만한 증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너도나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을 죽일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좋게 생각하고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데 관여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듣기는 하지만 은혜를 받지못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것을 목회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단 교주들의 대부분이 교회를 다닌 적은 있지만 그 들은 내용을 믿지는 못하다가 후에 그 들은 것을 왜곡시켜서 인단의 교리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속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실 그런 경우들이 여기저기서 가끔씩 나타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은헤와 진리로써 들으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 은혜와 진리가 예수님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을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와 진리의 말씀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셨고 지금도 역시 일으키고 계십니다. 하지만 들으면서도 믿지 못하면 그에게는 들은 말씀들이 아무런 선한 역사도 일으키지 못할 뿐 아니라 기독교를 비판하는 비판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거짓 증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 증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 말씀들을 악용하려 하였지만 예수님을 죽일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얻지 못하다가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자기들이 들었던 말을 했습니다. 61절입니다.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이 말씀을 하신 것을 요한은 요한복음 2장 1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한 말에 대하여 너는 왜 아무말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냐?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말합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여기서 악인의 악이 돋보이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입니다. 예수님은 맹세에 대하여 마태복음 5장 33-37절에 이렇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인간의 맹세는 지킬 가능성보다 못지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맹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는 한계도 있고 모순이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지식이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자기 스스로 맹세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맹세도 시킵니다. 빠져나갈 자리를 차단하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예수님께 맹세를 시킨 이유도 역시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넣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의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가야바의 악행에 대하여 예수님은 맹세를 거부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리스도냐고 묻는 가야바의 질문에 대하여는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64절입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로서 죽음 이후로도 할 일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권능의 우편에 앉으실 것이며, 또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예수님 자신을 심문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이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찮게 여기면서 심문했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 가야바나 그 주위에 있는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 역시 예수님이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마땅히 심문을 받아야 할 자신들이 주제넘게도 심판자를 심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통곡하는 날이 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 인정하지도 않으려고 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기 옷을 찢으면서 참담함을 표현하였습니다.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그러자 그 곁에서 듣고 있던 무리들이 말합니다.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가야바는 죽일 꼬투리를 잡았기 때문에 기뻐하고 그 곁에 있는 무리들은 대제사장과 한 마음이기에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억지 재판입니다.
우리 나라가 혼란 가운데 있을 때 안기부에서는 빨갱이를 잡아낸다고 많은 억울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억지 재판을 해서 빨갱이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은 수십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은 간첩을 색출한 공로로 포상도 받고 진급도 했습니다.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여론에 의해 재판의 결과가 왔다 갔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장들의 재판 역시 문제가 많습니다. 잔인하게 여자친구를 살해했는데도 초범이라고 하면서 7년 형을 선고하고는 후에 7년 형을 받은 범인의 가족들이 또다시 재판을 요청해서 형량이 줄어드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재판들이 자꾸만 많이 일어납니다. 사형을 시키거나 아니면 형량을 무겁게 해야 하는 범죄자들의 범죄는 가볍게 만들고 정작 형량이 가벼워도 되는 사람들의 형량은 아주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법은 판사에 따라 기준점이 서로 달라서 판결의 결과가 춤을 추고 있으며 범죄자들의 형량도 역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억울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악의 유형이 예수님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수많은 범죄자들이 영웅대접을 받고 의로운 사람들은 죄인 대접을 받은 것이 인류의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방식의 죄수로 몰아서 죽음에 넘겼습니다. 그들이 박수를 치면서 예수님을 죽일 수 있다고 좋아했던 죄목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것을 빌라도는 십자가 위해 그의 방식대로 해석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나무판으로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못을 박아 매달아 놓았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왕이 자신을 왕을 상징하는 그리스도라고 했다고 해서 범죄자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만의 악이 아닙니다. 온 세계 속에 만연하고 있는 악입니다. 대제사장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쇼를 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제사장의 구미에 맞는 말로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헤롯이 행한 연설을 듣고 “이는 신의 소리지 사람의 소리가 아니로다”하고 장단을 맞추었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 12장 21-23절을 보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권세를 가진 대제사장에게 아부를 하면서 제사장의 말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악이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억지 재판을 하여 없는 죄도 만들어 내고 죽일 죄를 지은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네로 황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로마시내에 불을 지른 다음 로마 시민들이 크게 흥분하면서 원망하고 분노하자 그 방향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로마에 방화를 한 방화범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로마 사람들 역시 진실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평소에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했던 그들은 네로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어차피 범인을 찾아내지 못할 바에는 누구라고 자기들의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이 죄악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도 일어났습니다. 정치 외교학을 공부하고 졸업한 후에 기자, 광고카피라이터, 홍보하는 일들을 했던 정찬일씨가 쓴 관동대지진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도쿄에서 무너진 목조 가옥만 4만여 채였고, 연와조 건물의 85퍼센트, 석조건물 84퍼센트,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8퍼센트가 무너졌다. 1000만 관동 인구 가운데 이재민만 310만 명에 이르렀고, 14만 2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3만 7000명이 실종되었다. 진도 7.9의 지진은 1881년 이후 처음 겪는 대지진이었고, 진앙이 도시 근처여서 피해는 더욱 컸다. 워낙 강력해서 미리 알고 대비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과 13초간의 지진으로 관동 지역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여진도 계속되었다. 최초 발생 후 3일 동안 무려 1700여 회의 지진이 기록되었다. 진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에서는 지진이 매년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때 일주일 동안 발생한 지진 횟수는 그 전 3년간 일어난 지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렇지만 정작 지진보다 화재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 깔려 죽은 사람보다 불에 타 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압사자는 1만 명도 안 되었다. 파악된 발화지점은 도쿄에 136개소, 군부에 40개소, 요코하마에 60개소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았다. 특정 지역에서 큰불이 번진 게 아니라 사방에서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대부분 화로가 불씨였다. 그 당시 일본인은 밥을 지을 때 화덕을 사용했고, 집과 음식점은 대부분 목조여서 불이 잘 붙었다. 그 때문에 지진이 발생한 지 불과 두 시간도 못 되어 도시 전체는 불에 휩싸였다. 혼조구에 있는 육군 피복 야적장은 피난민으로 북적거렸는데 거기서만 4만 명이 열기에 떼죽음을 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밤 11시에 재앙은 절정에 이르렀다.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곳은 수도 도쿄로, 사망자와 실종자의 75퍼센트를 차지하고 도시 3분의 2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료고쿠바시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무너졌다. 그다음으로 피해가 심한 곳은 요코하마였다. 대형 건물이 무너져 압사한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고 해군의 증유 탱크가 폭발하여 대화재가 났다.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왔던 여학생 200명이 그 자리에서 몰살당하기도 했다. 해안에서는 방파제가 가라앉는 바람에 수재민이 발생했고, 시골에 있던 공장은 지진에 취약해서 노동자 수백 명이 동시에 압사하거나 출입구가 무너져 산 채 불에 탔다.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본 일본 정치가들은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그런 큰 피해를 준 것이 바로 조선인들이라고 뒤집어 씌웁니다. 그로인해 죽은 인원수를 그 당시의 조선신문인 독립신문에서는 6661명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들은 칼과 죽장을 위시한 각종 무기들로 무장한 일본의 좌경단에 의해 죄없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런 인간의 악을 드러내셨습니다. 역사는 끝없이 힘없는 의인에게 죄를 덮어씌워 죄인으로 만든 다음 죽였고, 악인들은 그 권세를 누리는 일들이 반복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억지로 없는 죄를 만들어 덮어씌운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말합니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이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왕의 왕이요, 온 세상을 진리로 인도하실 선지자요, 온 세상을 중보하실 예수님을 완전히 놀림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눈을 보이지 않게 하고는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치면서 묻습니다.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자가 누구냐?” 그런 것을 맞추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에수님이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단순히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오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고 구원하셔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4-15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사람들은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 그들 뿐 아니라 온 인류가 자기들의 죄를 덮고 예수님께 뒤집어 씌우기 위하여 생명의 주를 죽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억지 재판을 했고 역사 속에서와 지금도 교회는 세상의 권세자들에 의해 억지 재판을 받고 있으며, 그 권세자들에게 속은 국민들에 의해 엄청난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지키십시오. 이 세상으로부터 불의한 일을 당할 지라도 당황하지 마시고 죽음을 이기신 에수님을 의지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으로써 여러분들에게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웠던 사람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생명의 주님으로서 여러분들이 진리에 속해 있는 의인임을 밝히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의로운 판결에 의해 악인들은 지옥의 영원한 불못으로 던짐을 당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며 은헤와 진리 가운데 행한 여러분들은 칭찬과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이 여러분들의 것임을 믿고 오늘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욱 돈독히 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